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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
2019년 01월 08일 (화) 00:51:11 이은주 밝은 성 연구소 원장 webmaster@newsmaker.or.kr

▲ 이은주 한의사/ 한국밝은성연구소장
지구가 편평하지 않고 둥글며 해와 달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돌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지식이 16세기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게서 시작된 것처럼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지식은 그보다 훨씬 앞선 고대 사상가들도 알고 있었으며, 더구나 지구 대기권 밖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거나 우주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 사상가도 있었다.
기원전 6-7세기의 그리스 원시철학자들은 현대의 교과서에 흔히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들의 먼 스승들이다. 엠페도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등등 쟁쟁한 현자들이 우주나 생명의 기원과 시간의 원리를 설파하며 아직 원시인에 불과한 인류의 머리를 일깨웠다.
그들은 우선 우주와 생명을 구성하는 기초성분을 파악하고 그것에 작용하는 에너지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힘썼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설명이 백미다. 인간생명의 근원은 ‘물과 불’이라고 주장하면서, 물은 습하고 저속한 것이며 불은 그것을 건조시키고 승화시켜 인간의 영혼을 고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과 불의 대립적인 두 속성은 승패를 반복하며 ‘전쟁’을 벌이는데 그 투쟁에 일정한 원리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현대 철학에서 등장하는 투쟁이론이나 변증법의 뿌리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뒤에 엠페도클레스가 이 설명을 다듬었다. 사물의 근원은 불과 공기, 물과 흙이다. 불과 물이라는 양극단의 속성을 각기 둘로 나누어 사물의 속성을 세분하였거나 보다 알기 쉽게 부연한 것이다. 주역에서 음과 양 두 대립적 속성이 발전되어 소음 태음, 소양 태양의 4상 이론이 등장한 과정과 비슷하다.
엠페도클레스는 그런데 물과 불 사이에서 작용하는 에너지의 성격을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였다. 흙이나 공기 불과 물은 하나의 물질적 요소들이다. 그것이 작용하게 만드는 데는 어떤 에너지 원리가 필요하다. 엠페도클레스는 그 에너지의 종류를 두 가지로 설명했는데, 하나는 사랑이요 하나는 증오라고 표현했다. 사랑은 결합하고 화합하게 하는 에너지며 증오는 대결하고 불열하게 하는 에너지다.
‘사랑과 증오’라는 이분법적 설명에 이르러 우리는 이것이 선과 악, 인간에게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구분한 기호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과 증오, 혹은 결합과 해체의 개념은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양분하기 어려운 복잡한 의미가 있다.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물과 불’ ‘사랑과 증오’의 상대적 개념은 동양사상에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개념과 대비해볼 만하다. 중국의 주자(朱子)는 음양의 작용에 의한 에너지의 발생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은 남자를 낳고 땅은 여자를 낳았다. 남녀의 두 기가 반응하고 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물을 탄생시켰다. 이 생성과 변화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여기서 남과 여라는 용어는 남자여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음과 양의 기운을 나타내는 상징기호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 세계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물질들 사이에서, 음과 양의 기운은 서로에게 반응하여 결합과 분열을 반복하면서 수많은 사물을 변화 탄생시킨다. 이로써 우주와 지구가 생겨난 것이다.
만일 지구상에 나무가 자라기만 하고 죽지 않거나 꽃이 피기만 하고 영구히 지지 않는다면 지구는 어떤 상태가 될까. 해가 떠서 영구히 지지 않는다면?
생각해보면 생성과 소멸은 하나는 선이고 하나는 악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환의 고리일 뿐이다. 새로 피는 꽃은 떨어진 꽃의 자리를 채우고, 떠나보내는 슬픔은 새로운 생명을 맞는 기쁨으로 위로가 된다. 그 출렁임, 그 오고감, 그 생성과 상실의 반복 사이에서 생의 동력이 일어나고 감정의 아름다움이 일어난다.
기실 현대사회의 스트레스는 지나친 풍요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얻기만 하고 버리지 않고,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않는 ‘소유 우선의 시대’는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된 시간의 정점을 의미한다. 지나친 사랑은 탐욕이 되고, 그 탐욕이 고통을 안겨준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을 말하지만, 그것은 현대인들 사이에서의 상대적 빈곤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풍요로운 시대가 일찍이 있었던가. 너무나 많이 얻고 많이 생산하고 욕망을 채운 나머지 이제 사람들은 이제 사랑의 기쁨, 얻는 것의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 욕망은 끝이 없지만, 이제 정점에 이르러 무엇을 더 어떻게 채울 것인가.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에게 ‘마음을 비우라’는 성인 현자들의 권고는 하나의 지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배부른 사람은 먹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고, 황금에 둘러싸인 사람은 아름다운 것에 감동하기 어렵다.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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