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12.15 토 12:13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12월 04일 (화) 17:12:3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옥사한 지 92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을 받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박열’로 알려진 가네코 여사는 박문자(朴文子)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며 박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일왕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사형을 언도하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히 일제의 만행을 지적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투옥하다 1926년 7월 숨졌다. 일본인이 건국훈장을 받는 것은 가네코 여사가 두 번째다. 일제의 토지 강탈에 대항해 한국인을 변호하고 박 의사 변론도 맡았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2004년 첫 번째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국민일보 2018년 11월 16일>

▲ 일본 정국을 뒤흔든, 감옥에서 가네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태평스럽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의 사진
박열(1902~1974)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7살이던 1919년 10월이었다. 경성고보(현 경기고) 사범과에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하자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반제국주의 이론을 배워 항일 투쟁을 좀 더 철저하게  펼칠 각오로 식민 종주국인 일본행을 선택한 것이다. 도쿄에서 박열은 신문 배달, 날품팔이, 인력거꾼 등 하층 생활을 하면서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다녔다. 저명한 사회주의자들과도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로 변신했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가 될 가네코 후미코(1903~1926)를 만난 것은 1922년 2월이었다. 가네코는 그 어떤 통속소설보다 기구한 삶을 살았다. 가난도 가난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불화로 점철된 가족사였다. 부모의 부부 관계가 일찍 파탄에 이르자 부모 사이를 오가는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친척집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냉대와 멸시, 학대와 방치 속에서 자랐다. 9살 때인 1912년에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충북 청원군에 살고 있는 고모 댁에 양녀로 갔다. 이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된 집안일이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7년 동안 하녀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조선인들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가네코는 16살이던 1919년 도쿄로 돌아와 차별과 빈곤의 벽에 부닥치는 생활 속에서도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조선인 유학생들과 교유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조선청년’이라는 잡지(1922년 2월호)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 불합리한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박열의 열정적인 모습에 사랑과 연대감을 느껴 1922년 4월 동거에 들어갔다.
박열은 1921년 10월 김약수, 조봉암 등 재일 유학생들과 함께 ‘흑도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간의 노선 투쟁이 벌어져 2개월 뒤 박열과 정태성 등 아나키즘 계열은 흑우회로, 김약수 등 공산주의 계열은 북성회로 갈라섰다. 1923년 4월에는 흑우회와 별도의 ‘불령사’를 결성하고 기관지 ‘불령선인’을 발간하며 본격적으로 의열 투쟁을 준비했다. 그 전에 1922년 9월 니가타현 수력발전소 공사장의 조선인 노동자 학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서울로 왔을 때는 의열단과 연계된 사람을 만나 폭탄을 구해줄 것을 요청했다. 1923년 11월로 예정된 황세자 히로히토의 결혼식을 염두에 둔 것이다.
박열은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궁성 우편배달부로 위장 취업했다. 궁성을 매일 출입하면서 천황의 동정과 출행 경로 등을 살폈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도쿄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일제는 조선인이 일본인을 습격하고 샘물에 독약을 풀고 다닌다는 등 온갖 루머를 빌미 삼아 9월 3일부터 조선인과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을 집중 검속했다.

박열, 22년 2개월 간 차가운 감옥에서 갇혀 지내

박열과 가네코, 불령사 회원들도 9월 3일 검속되었다. 취조 도중 폭탄 구입 계획 사실이 드러나자 일제는 불령사를 대지진을 틈타 폭동과 천황 암살을 꾀한 비밀결사로 구체화해 10월 20일 박열 등 불령사 회원 16명을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기소했다. 박열 부부에게는 황세자 결혼식 때 천황 등을 암살하려 했다며 1924년 1월 ‘대역 사건’으로 발표했다. 대역죄(형법 제73조)는 천황, 황후, 황태자 등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1심에서 재판이 끝나는 무서운 법이었다.
박열은 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히며 판사에게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조선 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 착용을 허락할 것, 둘째, 법정에 서는 취지를 선언토록 할 것, 셋째 조선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준비할 것, 넷째, 피고의 좌석을 판사의 좌석과 동등한 높이로 만들 것 등이었다. 가네코는 한국 이름 ‘금자문자’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 판사는 첫째와 둘째 조건은 들어주고 셋째는 의사소통에 방해가 된다며 거부했다. 넷째는 판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박열이 철회했다.
첫째와 둘째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박열은  후세 다쓰지 일본인 변호사가 서울에서 구해온 조선 시대의 관복을 갖추고 법정에 섰다. 일본인 판사의 질문에는 무시하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이름이 뭐냐는 물음에는 ‘바가야로’라는 일본말의 욕설과 비슷한 ‘바쿠야루(박열)’라고 답했고 나이를 묻는 질문에는 “누구도 자기가 태어난 날을 아는 사람은 없다”고 태연스럽게 말했다. 직업을 물으면 ‘불령업’이라고 답하고 판사에게는 “그대”라고 불렀다. 실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가네코는 박열의 천황 암살 계획을 사전에 모르는 상태에서 구속되었기 때문에 거사에 대해 박열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박열이 재판에서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기쁨 하나만으로도 나의 모든 손실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달리 가네코는 “나는 내가 실패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실패가 나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실패가 아니었다는 점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토로했다. 박열은 ‘승리’라고 표현하고 가네코는 ‘실패’라고 표현한 것이다.
박열은 감옥에서 자신의 사상을 함축한 ‘일본의 권력자에게 줌’을 비롯해 ‘나의 선언’과 ‘음모론’ 등의 글을 썼다. 가네코도 원고지 3,000장에 달하는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쓰고 200여 편에 이르는 단가(短歌)를 남겼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1926년 3월 25일 사형으로 최종 판결이 내려지자 박열이 1924년 옥중에서 쓴 ‘나의 선언’을 외쳤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뜨려라! 기요틴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 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재판정은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박열은 태연한 얼굴에 오히려 웃음까지 머금은 채 재판장을 바라보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가네코는 박열이 자신을 바라보자 두 손을 번쩍 머리 위로 추켜올리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 재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박열과 가네코는 4월 5일 무기로 감형되어 각기 다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가 있기 전인 3월 1일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1926년 7월 23일 가네코가 갑자기 창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는 급보가 박열에게 전달되었다.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가매장되었고 유골은 후세 변호사가 흑우회 동지들과 함께 화장한 뒤 박열의 친형에게 전달되어 1926년 8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 팔령산에 묻혔다.
가네코가 죽은 후, 과거 감옥에서 가네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태평스럽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1926년 8월 공개되어 “사법 사상 전례가 없는 옥중 결혼”이라며 일본 정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두 사람이 좀처럼 자백을 하지 않자 두 사람을 회유할 목적으로 판사가 1925년 2월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인데 야당인 정우회가 사진을 정계, 재계, 군부, 신문사 등에 뿌리며 집권당인 헌정회를 비난하는 바람에 헌정회 내각은 총사퇴하고 판사도 옷을 벗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차가운 감옥에서 갇혀 지내다 일본의 패망 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최장의 수감 기록이다. 박열은 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고 항일 의열 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세 열사들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는 데 힘을 쏟고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활약했다.
1947년 일본의 국제신문 기자 장의숙과 결혼하고 1949년 5월 영구 귀국했으나 1950년 6·25 때 납북되어 박열의 가족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박열의 아들은 일본에서 고교를 마치고 한국의 육사를 졸업해 준장으로 예편했다. 박열은 1974년 1월 17일 북한에서 서거한 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한국 정부는 1989년 3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첫 대장 백선엽
6·25 전쟁 다부동 전투 승리의 주역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생일잔치가 21일 서울 용산의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렸다. 생일잔치는 백 장군의 백수(白壽·한국 나이 99세)를 축하하기 위해 미 8군이 준비했다. 1920년생인 백 장군은 23일 만 98세를 맞는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미군이 ‘믿을 수 있는 파트너’라고 지칭했던 한국군 장성이다. <중앙일보 2018년 11월 22일>

▲ 백선엽 대장
백선엽(1920~ )의 삶은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대한민국 창군의 초석이었고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지켜낸 ‘다부동 전투’의 영웅이었으며 군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부름에 응한 육군 최초의 ‘리베로’ 지휘관이었다.
백선엽은 평북 강서군에서 태어나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했다. 1941년 12월 만주의 2년제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4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 함경북도와 접해 있는 만주국의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다. 일부 간부만 일본군이고 대부분의 군관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해방 후 국군 장성을 다수 배출한 부대로도 유명했다. 6·25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 용전한 김백일 장군,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 장군도 이 부대 출신이다.
하지만 간도특설대가 간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조선인과 중국 팔로군을 토벌한 특수부대였다는 점에서 백선엽의 간도특설대 경력은 비난을 사고 있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조선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 때문에)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며 독립군 토벌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백선엽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꼬박 한 달을 걸어 평양에 당도했다. 훗날 육군 중장이 될 동생 백인엽도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일본에서 복무하다가 9월 초순 평양에 와 있었다. 백선엽은 평양에서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도왔으나 소련군이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감금하자 1945년 12월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백선엽은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1946년 2월 중위로 임관해 막 창설된 부산의 제5연대로 배속되었다.
그는 승진의 급행열차를 탔다. 2월 A중대장, 9월 1대대장을 거쳐 1947년 1월에는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5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 12월 부산 주둔 제3여단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8년 4월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정보처장으로 발령받아 서울로 상경했다.
백선엽이 군대 내 좌익 숙군 작업을 지휘할 때 만난 인물 중 한 명이 박정희 소령이다. 당시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밝혀져 숙군팀에 체포된 상태였다. 백선엽은 박정희의 간청을 받고 그를 풀어주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군에서 제대 처분을 받은 박정희를 문관 자격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을 내 박정희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육군 참모총장 두 번 역임한 대한민국 최초 대장

백선엽 대령은 광주 주둔 제5사단장을 거쳐 1950년 4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2개월 뒤 6·25가 터졌을 때 백선엽은 3일 동안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 1사단이 적에 포위되자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해 부대를 온전하게 유지했다. 백선엽은 이 전공을 인정받아 개전 1개월 뒤 준장으로 진급했다.
‘다부동 전투’는 백선엽이 제1사단을 이끌고 무공을 과시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미군의 화공과 1사단이 중심이 된 우리 군의 배수진 전술로 다부동 전투는 우리 군의 승리로 끝나 북진을 위한 돌파구 역할을 했다. 1사단은 이후에도 승승장구해 ‘평양 최초 입성’의 영예도 차지했다. 이후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평북 운산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경기도 안성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할 때 가장 먼저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백선엽은 1951년 4월 소장으로 진급,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국군 제1군단장으로 발령받아 동해안 쪽의 북진을 선도했다.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의 한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그해 11월 창설된 ‘백(白)야전전투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군단장으로 복귀한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하고 같은 해 4월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으로 부임해 중부전선을 담당했다. 1952년 7월 23일 육군 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년 1월 13일 33살의 나이로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백선엽은 최고위직인 대장이 되고도 군의 ‘리베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54년 2월 155마일 전선을 담당하는 제1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는 육군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나 초대 사령관으로 3년 9개월동안 야전군을 키우다 1957년 5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을 2년간 맡고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1년 남짓 근무하다가 1960년 5월 31일 군복을 벗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9세였다.
이후 백선엽은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말년에는 주로 공기업 사장을 역임하다가 은퇴했다. 그가 조국에서 받은 훈장은 태극무공훈장 2회를 비롯, 모두 6회나 되고 미국의 각급 훈장 7회를 포함해 우방 11개국의 훈장을 받았다. 2013년 8월에는 미 8군 명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NM
 

김정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