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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11월 07일 (수) 17:11:2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메이지유신 150주년
10월 23일은 일본 막부 통치를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일왕 세력이 새 시대의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로 명명한 지 150주년이 되는 날.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주관하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아베 총리는 ‘메이지유신의 태동지’로 자부하는 조슈(長州·현 야마구치현) 출신. 그는 정치를 하면서 메이지유신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소재로 활용해왔다. 19세기 중반 학당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를 만들어 메이지유신의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왔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을 아시아의 변방 어촌 국가에서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일왕을 떠받든 사무라이들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켰고 산업화를 달성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 일본을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한 맹아가 됐다는 지적도 많다. 당시 서구의 팽창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중국·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 군홧발을 들이밀었다. <조선일보 2018년 10월 23일>

에도(도쿄)를 근거지로 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수립된 1603년 이래 일본은 쇄국주의를 고수했다. 규슈의 나가사키·히라도에서 네덜란드·포르투갈 상인과의 국지적이고 단순한 교역은 예외적으로 허용했으나 일본 근해로 접근하는 외국 배들은 모두 쫓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도 서양 배들이 계속 접근하자 1825년 2월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전국의 번주(다이묘)들에게 이양선을 몰아내라는 이른바 ‘이국선 타불령’을 선포했다.
그러던 중 1840년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굴욕적인 남경조약(1842)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도 막부는 위기의식을 느껴 1842년 7월 ‘이국선 타불령’을 폐기하고 이양선이 원하면 물, 식량, 연료 등을 제공하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1846년 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2척의 전함을 이끌고 에도만 우라가항에 입항했다. 비들은 통상조약을 제시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자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고 일본을 떠났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53년 7월 3일 이번에는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4척의 검은 증기선을 이끌고 우라가항 앞바다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흑선의 출현에 쇄국 체제를 고집해온 에도 막부는 대경실색하고 혼비백산했다. 페리 제독은 통상, 석탄·식량 공급, 난파선 보호를 이유로 개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겁을 집어먹은 막부의 노중(총리) 아베 마사히로가 이듬해 답서를 주겠다고 해 페리 제독은 “1년 후 다시 올 때까지 가부를 결정하라”고 통고한 뒤 일본을 떠났다.
페리 제독이 1,200여 명의 군인과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1854년 2월 13일이었다. 미 함대는 막부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연일 함포를 쏘아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에게서 정무 일체를 위임받았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천황가(家) 조정에 의견을 구했다. 그때까지 천황은 막부의 통제와 간섭을 받는 무력한 존재였다.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의 황궁에서 제사나 지내며 소일하고 정치적 권한도 없었다. 이처럼 에도 막부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있던 천황가에 의견을 물었으니 아베 마사히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천황의 권위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지방의 각 번(藩), ‘존왕양이’ 기치 내세워 반막부파 형성

당시는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막 움틀 때여서 천황은 개항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에도 막부는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애써 기존의 권위를 유지하려 했다. 조약에 따라 막부 정권은 시모다와 하코다테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영사 주재와 최혜국 대우 등을 약속했다. 뒤를 이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조건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에도 막부의 강력한 쇄국정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런데 개국·개항이 결과한 것은 쇄국 체제의 붕괴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천황가에 의견을 구하지 않았던 막부의 정무 원칙이 이를 계기로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 것이야말로 막부 정권으로서는 가장 큰 위기였다.
1856년 시모다 주재 초대 미국 총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을 때도 에도 막부의 관료가 고메이 천황 칙허를 얻기 위해 1858년 교토를 찾아갔다. 천황은 또다시 조약 칙허를 거절했다. 그런데 그 무렵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아베 마사히로에 이어 막부의 실권자로 등장한 대로(총리) 이이 나오스케가 1858년 7월 29일 14개조의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고메이 천황의 칙허 없이 일방적으로 체결했다. 시모다와 하코다테 외에 요코하마, 나가사키, 니가타 등 항구를 추가로 개항하고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하며 개항장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되 외국인의 국내 여행은 금지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힘에 밀려 체결한 조약이다 보니 일본 내 미국인의 치외법권은 인정한 반면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관세자주권은 물론 최혜국대우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이이 나오스케는 조약 체결이 부당하다는 국내 반발에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연이어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에도 막부 체제가 이처럼 천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항·개국을 허용하자 고메이 천황이 조약 체결에 불만을 표시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동안 막부의 영향 아래 있던 지방의 각 번(藩)도 ‘존왕양이’ 기치를 내세워 굴욕적 불평등조약에 반기를 들고 반막부파를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이 나오스케는 자신이 제14대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도쿠가와 이에모치 대신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려는 정치적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위해 1858년 이른바 ‘안세이 대옥’을 일으켜 요시다 쇼인 등 100명이 넘는 존왕양이파를 처형해 반발을 증폭시켰다. 막부의 이 같은 강경 조치는 무사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더구나 무사들은 이질적인 외국인이 일본의 중심 도시를 활보하는 것을 보면서 무기력한 막부와 외국인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도쿠가와 막부, 26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 메이지 천황(1872년)
당시 무사들이 좇는 대의명분도 존왕양이였다. 특히 에도 막부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조슈번(야마구치현), 도사번(고치현), 히젠번(나가사키현) 등의 하급 무사는 존왕양이의 강력한 옹호 세력이었다. 이들은 막부 체제의 해체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이에 공감하는 인물들이 세력을 결집하면서 일본은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이는 사쓰마번, 조슈번, 도사번 출신의 존왕양이파가 중앙 정국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막부에게는 몰락의 출발점이었다. 존왕양이파는 암살과 테러를 전술로 삼았다. 이이 나오스케도 1860년 3월 에도성 성곽의 사쿠라다문 밖에서 살해했다. 1861년 미국영사관의 통역관과 영국 공사관의 직원도 살해했다.
먼저 행동에 나선 세력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 3걸’로 회자될 만큼 활약이 컸다. 도사번 출신으로 국제 정세에 밝았던 사카모토 료마, 도미 경험을 통해 국제적 감각을 지닌 막부의 중신 가쓰 가이슈, 문사 이와쿠라 도모미 등도 반막부파에 가담했다.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궁의 조정 대신들도 ‘존왕토막(尊王討幕)’의 기치를 내세워 반막부파의 한 축을 이뤘다.
정국이 이처럼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막부의 쇼군 이에모치가 1866년 8월 병사했다. 1867년 1월 30일에는 고메이 천황이 죽고 아들 메이지 무쓰히토(1852~1912)가 15세 나이로 제122대 천황에 즉위했다. 이후 메이지 천황의 측근은 사쓰마와 조슈의 하급 무사와 연계된 젊은 혁신파로 채워졌다.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인 막부 내 ‘공무합체파’가 중재안을 내놓은 것은 이런 상황 변화의 반영이었다. ‘공무합체(公武合體)’는 막부의 쇼군이 유력 번주들과 함께 국사를 협의하고 그 결정 사항에 대해 천황의 재가를 받는다는 타협안이었다. 양측은 논의 끝에 쇼군이 각 번의 번주와 같은 지위를 유지하고, 쇼군직은 천황에 책임을 지는 추밀원(지금의 의회)으로 대체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1866년 12월 제15대 쇼군에 즉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이 추밀원장이 되어 추밀원을 장악하면 내전을 막으면서도 실리를 챙길 수 있다는 계산으로 중재안을 수락했다. 그 결과 1867년 10월 14일 쇼군이 국가 통치를 포기하고 통치권을 천황에게 바친다는 이른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졌다. 이는 천황과 에도 막부가 화합해 쇼군의 권위도 살리고 천황가의 왕정복고도 이룬다는 외형상 ‘윈윈 전략’으로 보이지만 실은 형식만 천황 체제로 삼고 실권은 쇼군이 계속 장악하겠다는 막부 체제의 기만책이었다.
그러자 당시 천황을 보필하던 이와쿠라 도모미가 1867년 12월 9일, 5개 번의 반막부파 세력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뒤 어린 메이지 천황을 대신해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언했다. 막부를 지지하는 번벌들과 신료들을 제거하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선언이었다. 이로써 일본에는 교토의 왕정복고 정권과 에도의 막부 정권으로 나뉜 2개의 중앙정부가 병립했다.
결국 두 세력은 1868년 1월 패권을 가리는 ‘보신전쟁(戊辰戰爭)’을 벌였으나 3월 에도의 막부군이 항복하고 신정부군이 에도에 무혈입성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26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천황의 신정부가 일본 유일의 중앙정부가 되었다. 내전에서 전사한 신정부군(천황군)을 위해 지은 사당이 오늘날의 야스쿠니 신사다.

새 시대의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로 명명

메이지 천황은 1868년 3월 14일 친정(親政)을 선언하고 10월 23일 새 시대의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로 명명했다. 이는 그동안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자신에게 모든 실권을 집중한다는 자신감의 발로이자 일본 근대국가 수립의 불을 댕긴 ‘메이지 유신’의 전주곡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천황은 이미 오래전 잊힌 존재였다. 그러자 하급 무사들이 주축을 이룬 유신의 주역들은 자기들보다 신분이 높은 번주(藩主)나 사무라이들을 누르고 정부의 권위를 세워줄 상징이 필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조차 숭배하지 않던 어린 왕을 ‘현인신(現人神)’이라 치켜세우며 국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신정부는 천황의 정치적 존재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전국을 순행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전국을 100여 차례 이상 행차하는 정치 이벤트가 끝나고서야 천황의 실체가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메이지 자신은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 수련을 통해 서서히 천황의 위엄과 권위를 갖춰나갔다. 신정부의 젊은 지도자들도 천황을 내세워 일본을 민족국가로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1869년 3월 사쓰마, 조슈, 도사번의 번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토지와 백성을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판적봉환(版籍奉還)’ 건백서를 제출했다. 1869년 7월에는 다른 번주들도 판적봉환에 동참했다.
1869년 10월 메이지 천황이 교토를 떠나 도쿠가와 막부 정권의 아성이던 에도로 천도해 새 출발을 다짐한 데 이어 1871년 기존의 모든 번을 폐지하고 3부 43개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의 행정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봉건적인 분할 행정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1871년 11월 메이지 천황이 이와쿠라 도모미를 정사,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을 부사로 하는 46명의 견외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했다. 사절단이 해외로 나간 사이 국내 개혁은 사이고 다카모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담당했다. 특히 사이고는 정한론을 앞장서 주창했다. 그러던 중 사절단이 미국·유럽에서 귀국하면서 정한론을 둘러싸고 극심한 대립 양상이 벌어졌다. 사이고의 죽마고우 오쿠보가 내치 우선을 주장하며 정한론에 반대하자 천황은 오쿠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오쿠보는 서양에서 배운 지식과 경륜을 내치에 쏟아부었다. 부국강병, 식산흥업, 문명개화라는 메이지 유신의 3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획기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했다. 식산흥업 계획에 따라 프랑스식 제사공장, 독일식 광산제련소, 영국식 군수공장을 신설하고 서양의 기술자들을 초빙했다. 민간기업의 발전도 도모해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871년 문부성이 설치되고, 이듬해 프랑스 제도를 모방한 학제가 공포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2만여 개 소학교가 설치되는 등 근대적 학교가 속속 보급되었다. 1872년 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도입했으며 하루를 24시간제로 바꾸고 일요일 휴무제를 실시했다. 도쿄의 신바시와 요코하마를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1872년 부설되었다. 1873년 1월 징병제, 1876년 3월 폐도령(廢刀令), 8월 금녹공채증서 발행조서를 선포해 사무라이들만이 칼을 차는 특권과 녹봉 지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사무라이는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사회적 신분을 상실했다. 무사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조리 진압되었다.

메이지 유신, 주변국들을 불행한 질곡 속으로 몰아넣어

오쿠보 내각은 군비가 확충되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정한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1875년 8월 운요호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에 보내 포격을 유발하고 이 사건을 빌미 삼아 조선에 강력한 개항 공세를 펼친 끝에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내각제 채택’(1885) ‘메이지 헌법 공포’(1889) ‘의회 소집’(1890) 등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속속 발표하며 절대주의적 천황제 국가를 구축해 나갔다.
메이지 치세 동안 중앙집권제를 정비하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산업혁명을 추진한 결과 일본은 봉건국가의 틀에서 벗어나 근대 산업국가로 재탄생했다. 보잘것없는 동양의 외딴섬을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견주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시킨 메이지의 45년 치세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가 찬란한 빛을 발할수록 조선과 대만, 류큐 등 주변국들은 불행한 질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은 1879년 동중국해 서남부에 자리한 섬나라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키고 대만과 조선을 목표로 1895년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과 요동반도, 사할린 남부 지역을 빼앗아 영토를 2배 이상 늘림으로써 일약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메이지 천황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1912년 7월 30일 사망했다. NM

▲ 보신 전쟁 당시의 사쓰마번 무사들(1868년). 펠리체 베아토 촬영. 흑백사진에 채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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