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12.15 토 12:13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평론] 20년만에 고향 찾은 ‘고향무정’, ‘아빠의 청춘’의 가수 오기택[4]
2018년 11월 07일 (수) 16:57:04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처음으로 ‘오기택 전국가요제’에 참석한 주인공, 그 2박3일 동행 취재
고향무정’의 가수 오기택, 20년 만에 고향 ‘땅끝 해남’을 가다

‘고향무정’, ‘아빠의 청춘’의 매혹의 저음가수 오기택씨가 20년 만에 고향, 해남을 찾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오기택 전국가요제’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다.

그는 그동안 건강을 이유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이 가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22년 전 바다낚시를 갔다가 당한 불의의 사고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늦추면 직접 참석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 강행한 고향길이었다. (뉴스메이커 2007년 12월호~2008년 2월호, 오기택[1][2][3]편 참조) 또한 이 날은 ‘오기택 노래비-고향무정’ 제막식도 함께 펼쳐질 예정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오기택 전국가요제’ 방문길에 둘러본 해남은 축제, 그 자체였다.

모처럼의 고향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갖가지 추억이 서려 있는 유년시절의 흔적들과 친구들. 그가 유년시절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지금 어떻게 기억하는지도 함께 들어볼 수 있는 소중한 여행길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오기택 전국가요제의 현장, 그 눈물과 감동의 현장을 두 차례에 걸쳐 돌아본다.  그 2박3일 간의 동행 취재기.

글l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l장성하(사진작가)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이어진 2박3일 간의 동행 취재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그리고 고향의 의미는 누구에게나 남다르다. ‘고향’이라는 이 짧은 단어 속에는 그리움, 부모, 편안한 휴식, 추억 등도 함께 깃들어 있어 여전히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렇다. 고향길은 늘 설렌다. 일종의 회귀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동물들이 죽을 때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누인다든지, 비둘기나 연어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다.

지난 10월 11일, 가수 오기택씨가 20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자신의 이름을 따 매년 해남에서 펼쳐지는 ‘오기택 전국가요제’ 무대에 직접 오르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날은 ‘오기택 노래비’ 제막식도 함께 가질 예정이다.

이제 곧 맞닥뜨리게 될 고향사람들. 그는 늘 꿈꿔 왔다. 언젠가는 고향사람들과 어울려 자신의 노래를 맘껏 부를 그 날을.

해남에서 ‘오기택가요제’가 처음 열린 것은 2007년 한국예총 해남지부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오기택씨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처음 가요제 소식을 접한 건 3회 대회 이후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오기택씨는 노발대발했다.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사전에 동의를 구하거나 협의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이내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흔쾌히 허락한다. 해남 문화예술 발전하는 데에 있어 자신의 이름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사용해도 좋다고.

오기택씨가 이 가요제에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은 것은 지난 2012년도였다. 그러나 오기택씨는 이 초청에 응하지 못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번이나 더 참석하고자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 가요제에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참석치 못했다. 결국 열두 번째가 되는 올해에서야 비로소 참석을 결심, 해남 행을 강행하게 된 것이다.

20년 만의 고향길, 목포행 KTX로 출발

행사 하루 전인 10월 11일, 오후 2시 35분. 그는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 목포행 KTX에 몸을 실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 목도리에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했다. 그를 7년째 돌보고 있는 요양보호사 권남희 여사(58)와 사진작가 장성하와 강민숙, 그리고 필자도 함께 했다. 

오랜만에 고향길에 오른 그는 사뭇 긴장된 표정이었다. 좀 더 몸이 회복된 뒤 건강한 모습으로 찾고 싶었던 고향, 그래서 고향사람들과 어울려 자신의 노래를 맘껏 부르고 싶었던 그였지만 마냥 미룰 수는 없었다. “그동안 건강, 거리 등을 이유로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를 거라 생각하고 힘을 냈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고향 길은 출발부터 비장했다. 모처럼 고향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노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우려도 쉽게 떨쳐내기 힘들었다.

두 시간 반을 달려 일행은 목포역에 도착, 미리 예약된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 해남은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해남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것은 ‘오기택 전국가요제’를 알리는 현수막과 입간판이었다. “드디어 그리운 친구들을 만난다는 기대감, 그리고 대흥사의 맑은 물이 눈앞에 아른거려 마냥 설레었다.”는 게 해남에 도착한 오기택씨의 첫 소감이었다.

제33회 해남예술제가 열리는 해남은 지금 축제 중

‘한반도의 시작, 땅 끝 해남’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렇듯 해남은 풍광이 매우 이름다운 곳이다. 매년 열리는 ‘해넘이 축제’가 그렇듯 일몰이 특히 장관을 이루는 곳.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만큼 각종 문화축제 또한 1년 내내 열린다. 1월1일 ‘해맞이 축제’를 시작으로 3월에는 ‘땅끝 매화축제’, ‘대흥사 서산대제(4월), ‘흑석산 철쭉제(5월)’, ‘공재문화제(8월), ‘명량대첩축제(9월)’, ‘김남주문학제(9월)’, ‘초의문화제(10월) 그리고 오기택씨가 방문한 날은 ’제33회 해남예술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축제 기간 중에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리는 행사가 바로 해남군민광장에서 펼쳐지는 ‘오기택 전국가요제’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농번기 시즌이었지만 주인공인 오기택씨가 직접 가요제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해남은 들썩이고 있었다. 해남에 도착한 일행은 먼저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해남중학교 동창들이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로 이동했다.

나이 80이 되어서야 해남중학교 동창들을 만나다

옛 친구들과의 약속장소인 식당 ‘천일관’은 유년시절에 오기택씨가 집 가까이 있어 자주 가던 곳이다. 추억도 많다. 특히 이곳을 지날 때마다 문 앞에서 고기 굽던 할머니가 집어주던 고기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동창 16명이 우루루 나와 그를 반겨주었다. 대부분 졸업 후 처음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당시 해남은 중학교가 하나밖에 없어 남녀공학이었다.

“어느덧 평균나이 80세가 되어 이런 자리가 만들어지다니 정말 감개무량하다.”는 김도배(78) 회장의 말처럼 친구들은 ‘모처럼 해남을 찾은 기택이가 보고 싶어 멀리 광주, 목포에서도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고향이 좋고 친구가 좋고 무엇보다 옛 추억이 있는 이 자리가 좋았다.

“중학교 때 기택이는 유독 힘이 세고 운동을 잘했어요, 당시 별명이 ‘센토’였지요.” 김도배 회장의 말에 ‘센토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던 오기택 선생이 ‘일본에서 가장 질 나쁜 사람의 대명사’라고 귀띔한다. 그만큼 그는 짓궂은 개구쟁이였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모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향무정’의 노래로 이어졌다. 내일 노래비 제막식 때 다시 만나 함께 부르기로 한 노래였다.

“정말 가슴이 벅찼어요. 어느덧 80세가 되어서 만난 것도 신기하지만 많이들 변해서 알아 볼 수 없는 얼굴도 많아서 한편으론 아쉬웠죠. 그러나 정말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던, 가슴 뭉클한 시간이었습니다.” 오기택씨의 말이다.

‘오기택노래비-고향무정’노래비 제막식을 갖다

다음날인 12일 오전 10시. ‘오기택 노래비’가 오소재 공원(오소재 쉼터)에 세워졌다. 김현수 북일면장을 비롯한 관계자들, 그리고 해남군민 3백여 명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폭 4미터, 높이 2,8 미터 크기의 돌로 제작된 ‘오기택 노래비’에 새겨진 노래는 ‘고향무정’이었다. 무인도(김운하) 작사, 서영은 작곡의 이 노래는 1966년에 발표된 오기택씨의 대표곡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망향가다.

오기택 선생의 핸드 프린팅도 함께 부착된 이 노래비는 북일면 주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16개 마을 이장들과 관내 단체장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금으로 세운 것. 해남군의 지원도 힘이 되었다.

“이 노래비가 세워진 오소재공원은 마치 노랫말의 현장을 옮겨놓은 듯 그림 같은 곳이죠. 바로 앞에 기름진 문전옥답과 배가 떠 있는 바다가 펼쳐져 있고, 또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저 산(두륜산) 아래에 바로 오기택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 있고... 세상에 이보다 노래와 잘 맞아떨어지는 장소가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일 겁니다.” 윤영현 노래비 건립추진위원장(59)의 말이다.

실제로 오소재 공원은 경관이 매우 뛰어났다. 해마다 해맞이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오기택 선생에게도 이곳은 추억이 많은 장소다.

“유년시절에 늘 지나다가던 고개였죠, 그때는 이곳을 오심재라고 불렀어요. 호랑이도 가끔 나타나고 또 도적들이 숨어 있는 험난한 고개로 유명했지요. 때문에 혼자서 다니지 못하고 오십 명이 모여야만 비로소 넘을 수 있는 고개라 해서 오심재라고 불렸죠. 특히 일출과 풍광이 아름다워 잊을 수 없던 이 소중한 장소에 제 노래비가 세워져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오기택씨는 인사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준비해간 인사말은 필자가 대신해 읽었다. 인사말의 절반이 감사인사를 전할 인물들의 이름들로 채워졌을 만큼 많은 고향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든 노래비였다.

제막식은 ‘고향무정’ 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하객으로 온 그의 해남중학교 동창들이 나와 노래를 함께 불렀다.

1.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산골짝엔 물이 마르고/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2.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 아래/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바다에는 배만 떠있고/어부들 노랫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대표적인 망향가, 특히 옛 친구들과 함께 부르는 노랫소리 때문이었을까, 노래 속 고향의 의미가 한층 가깝게 다가왔다.

공원 앞에는 굽은 도로를 바로 펴는 직선화 선형개량공사가 한창이었다. “앞으로 주변 정리, 급수시설 등을 보완해 북일면의 랜드마크로, 본격적인 관광자원화 작업을 펼칠 계획입니다. 또 해남 예총 등과 협의해 오기택 전국가요제를 이곳과 연계해 개최하는 방안도 함께 구상하고 있습니다.” 김현수 북일면장의 말이다.

제막식 현장은 매우 정겹고 따듯했다. 무엇보다 오기택 선생에게 있어서는 고향의 포근함과 고향사람들의 정, 그 자체였으리라.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던 고향마을을 가다

오기택씨가 태어난 곳은 해남군 북일면 흥촌리다. 모처럼 고향 방문길에 나선 오기택씨는 내친 김에 그가 어릴 때 살던 집과 모교인 북일초등학교(당시엔 북평국민학교)를 돌아보기로 했다. 그의 네 살 터울의 동생 오병석씨와 김현수 북일면장, 윤영현 노래비추진위원회장 등이 함께 동행 했다.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일행은 모교인 북일초등학교로 향했다. 어느덧 개교한 지 백년이 넘었다는 학교의 역사가 말해주듯 나무들이 빽빽했다. 당시는 학생 수가 천 명이 넘었기 때문에 교실 부족으로 나무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다던 옛 기억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학생수가 10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몰라보게 무성해진 예전의 소나무밭을 둘러보던 오기택 선생은 ‘이곳에서 새총으로 비둘기 잡던 생각이 먼저 난다’며 그때는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좋았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3학년 때 까지도 글씨를 쓸 줄 몰랐다고 했다. 본인의 이름조차도. 아마도 전교에서 공부를 가장 못한 사람이 자신이었을 거라며 껄껄 웃는다. 심지어 학교가기 싫어서 교문까지 할머니가 데려다주면 할머니 뒷모습이 보이자마자 뒷문으로 도망쳤던 말썽쟁이 소년이었다고도 했다.

오기택씨는 27회 졸업생이다. 공교롭게 길을 안내한 동생 오병석씨와 장애인콜택시 기사 모두 동문이었다. 콜택시 기사는 ‘젊은 시절 오기택씨 노래에 심취했었다.’며 ‘한 때 자신도 오기택씨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병석씨가 이 친구는 노래를 아주 잘 한다고 거들었다. “가요제에 한 번 나가보지 그래?” 오기택씨도 덕담을 건넸다. 그 기사는 이름이 ‘정종채’라고 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이름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그날 깜짝 반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북일면 마을의 5일장 ‘좌일시장’을 ‘오기택시장’으로 명칭 바꾸자는 주민 의견도

흥촌리 마을입구에 들어서자 환영 현수막이 가득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 살던 집은 빈집으로 남아있었다. 오기택씨가 이사한 후 이곳은 자전거포나 식당으로 바뀌어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10년째 비어있다. 이곳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50년 째 약국을 하고 있다는 초등학교 동창 신필균(79, 대흥약국)씨는 “초등학교 때 기택이는 싸움 잘하고 힘이 셌다.”며 “그러나 씨름을 해서 기택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학교에서 오로지 나뿐이었다.”고 자랑하자 오기택씨는 ‘이 친구가 우리 학교에서 키가 가장 컸었지만 싸움은 늘 나한테 졌다.’고 맞받아쳤다. 물론 각자 기억은 조금씩 달랐지만 오기택씨는 친구 중에서 싸움 잘 하고 힘센 소년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심지어 친구가 사탕을 먹고 있으면 볼을 쳐서 사탕을 빼낸 뒤 땅에 떨어진 그것을 닦아서 먹었다고도 했다.

마을에는 5일장이 열리는 좌일시장이 있었다. 주민들은 이 시장의 활성을 위해 오기택의 이름을 마케팅에 이용, ‘오기택시장’으로 이름을 바꾸는 방안도 검토 중이라고 했다. 그만큼 이 고장 출신인 오기택씨에 대한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오기택씨는 ‘그동안 간척사업 때문에 북일면 바닷가는 갯벌이 고갈되어 이제는 유명한 세발낙지, 꼬막, 새우 등을 볼 수 없지만 땅 끝 전통시장에 어울리는 특성 있는 시장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며 ‘특산물이나 농수산물이 거래될 수 있도록 구조를 개선해 가고 싶은 시장으로 활성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3천여 평의 땅에 농사 지으며 고향을 지키고 있는 오기택씨의 동생 오병석(76)씨는 자신의 집에 ‘오기택 기념관’을 만들어 각종 기록물들을 보관, 전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자 오기택씨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 좀 더 검토해보자’며 손사래를 쳤다.

오기택 전국가요제, 화려하게 막이 오르다

‘제2의 오기택’을 발굴하기 위한 오기택 전국가요제가 오후 7시부터 해남군민광장에서 화려하게 막이 올랐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오른 12명이 열띤 경연을 펼칠 가요제에서 필자는 심사를 맡았다.

올해는 주인공 오기택씨가 직접 참가하는 가요제인 만큼 초대가수들도 화려했다. 현미, 남상규, 서수남, 오승근, 김흥국 그리고 예고 없이 깜짝 등장한 조영남씨까지. 모두 오기택씨와는 친분이 두터운 동료들이었다. 또한 해남 출신 가수들인 진국이, 정문, 민지 그리고 걸그룹 힌트의 무대도 준비되어 있었다.

축하 영상 메시지도 화려했다. 방송인 송해를 비롯해 가수 이미자, 김상희, 윤항기, 남진, 박상철 그리고 오기택씨를 치료했던 동서한방병원 박상동 이사장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오기택씨가 ‘평소 동료 선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 서왔던 의리의 사나이, 멋진 사나이’임을 강조했다.

눈물과 감동의 무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던 ‘제12회 오기택 전국가요제’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NM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