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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산 너머 남촌에는’ ‘님’의 가수 박재란의 삶과 사랑[1]
‘삼천만의 연인’, 장르에 따라 발성법을 달리 구사하는 만능가수
2018년 10월 07일 (일) 03:04:4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데뷔 6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가수 박재란씨. 1950~60년대, ‘삼천만의 연인’이자 ‘꾀꼬리가수의 원조’로 불리는 박재란은 ‘가창력, 좋은 노래, 외모’까지 삼박자를 모두 갖춘 ‘만능가수’다.

1958년, 대중에게 처음 이름을 알린 ‘럭키모닝’을 시작으로 ‘푸른 날개’, ‘님(창살 없는 감옥)’, ‘강화도령’ 그리고 ‘둘이서 트위스트’, '산 너머 남촌에는', '소쩍새 우는 마을', '아나 농부야',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행복의 샘터’에 이어 번안곡 ‘진주조개 잡이’ 까지. SP시대에서 LP시대를 수놓았던 그의 히트곡들은 장르와 리듬이 제각각이다.

이처럼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했던 가수는 우리 가요계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바이브레이션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창법, 그리고 장르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뛰어난 가창력 또한 놀랍다.

본 칼럼을 본격적으로 연재하기에 앞서 그동안 가수 박재란에 관해 썼던 글을 하나 찾아 먼저 소개한다. 이 글은 지난 2007년, 서울신문에 발표했던 칼럼으로 박재란의 활동기록을 간략하게 정리했던 글이다.

1950~60년대 ‘만인의 연인’이자 ‘멋쟁이의 대명사’, 데뷔 60년을 넘어 지금도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가수 박재란의 삶과 사랑. 그 첫 번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가창력, 좋은 노래, 외모’까지 삼박자를 모두 갖춘 ‘꾀꼬리 가수’

노래만큼 예쁜 가수, 박재란씨는 ‘가창력, 좋은 노래, 외모’까지 삼박자를 모두 갖춘 ‘1960년대 만능가수’였다.

특히 각양각색의 리듬을 폭넓게 소화하며 그 리듬에 따라 다양한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실력파 가수. 아울러 도시적인 세련된 외모로 화장은 물론 의상, 헤어스타일까지 스스로 도맡아 직접 연출했음에도 한껏 멋스러움이 돋보였던 멋쟁이의 대명사였다.

‘항상 웃음을 띤 얼굴’로 기억되는 가수 박재란은 밝고 맑은, 건강한 보이스 컬러에 경쾌한 노래들로 특히 어려웠던 시절, 삶에 지친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불과 ‘3분 내외’의 짧은 노래들이었지만 50~60년대 ‘지쳐있는 삶의 힘찬 응원가’였던 셈.

특히 시인 김동환의 시에 작곡가 김동현이 곡을 붙인 ‘산 너머 남촌에는’은 그러한 대표적인 노래로 박재란씨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이다.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아-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은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저 하늘 저 빛깔이 그리 고울까/아-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버들 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아-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밀 익은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때 나는 좋대나.
-산 너머 남촌에는(김동환 작시, 김동현 작곡 박재란 노래, 1964년)

마치 남쪽에서 불어오는 남풍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는 가수 박재란, 그러나 정작 그 역시도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수시로 잔병치레를 할 정도로 몸이 허약해 전염병이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앓았고 특히 일곱 살 나던 해에 걸린 ‘뇌염’으로 인해 심지어 집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며 장례 치를 준비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의사를 불렀을 때 다행히도 살아났다. 의사도 ‘기적’이라며 ‘제 힘’으로 소생했다고 말했을 정도. 아울러 초등학교 시절, 한국전쟁 중이던 그의 나이 열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마저 여읜다.

우울한 시대를 밝게 물들인 경쾌한 멜로디의 ‘럭키 모닝’,  ‘해피세레나데’,  ‘푸른 날개’...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밝은 모습으로 나섰다. '럭키 모닝', ‘푸른 날개’, ‘해피 세레나데’ 등이 바로 이전의 슬프고 애상적인 노래에서 탈피해 경쾌한 멜로디와 가사로 사회 분위기를 밝게 리드해간 히트곡이다.

럭키모닝 모닝 모닝 럭키모닝/달콤한 바람 속에 그대와 나/새파란 가슴에 꿈을 안고서/그대와 같이 부르는 스윗 멜로디/랄랄라 라라라랄라/단둘이 불러보는 럭키모닝.

럭키모닝 모닝 모닝 럭키모닝/찬란한 햇빛 속에 그대와 나/빛나는 가슴에 기쁨 안고서/그대와 같이 불타는 스윗 하트/랄랄라 라라라랄라/단둘이 노래하는 럭키모닝.

럭키모닝 모닝 모닝 럭키모닝/청백색 하늘 아래 그대와 나/피 끓는 가슴에 불꽃 안고서/그대와 같이 불타는 스윗 라이프/랄랄라 라라라랄라/단둘이 불러보는 럭키모닝.
-럭키 모닝(유광주 작사, 전오승 작곡, 박재란 노래)

1958년, 오아시스레코드 전속과 함께 발표한 노래 ‘럭키 모닝’이다.

“저는 트로트풍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어요. 대신 대부분 노래들이 폴카나 트위스트, 부기우기, 룸바, 탱고, 쌈바, 차차차 등 신나는 멜로디였죠. 때문에 무대에 서면 관객들이 매우 즐거워했어요. 물론 한꺼번에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불러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지만 정말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었죠.”

▲ 1960년대를 풍미했던 동료가수들과 함께. 뒷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최희준 한명숙 유주용 박재란 현미 윤복희 이금희.
그의 회고에서처럼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최초의 히트곡 ‘럭키모닝’을 시작으로 ‘푸른 날개’, 민요풍의 ‘맹꽁이 타령’, 그리고 ‘님’, ‘둘이서 트위스트를’, '산 너머 남촌에는', '소쩍새 우는 마을', '아나 농부야', '밀짚모자 목장아가씨', ‘행복의 샘터’, ‘진주조개 잡이’, ‘강화도령’ 등 SP시대에서 출발해 LP시대를 수놓았던 그의 히트곡들은 장르와 리듬이 다양하다.

이처럼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했던 가수는 우리 가요계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바이브레이션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창법으로 장르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뛰어난 가창력은 작곡가 입장에서 보면 탐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발표된 곡들이 결국 나아가서는 우리 가요의 폭을 한층 넓히는 기폭제로도 작용했다. 

때로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이들의 빠른 몸동작으로, 때론 서민들의 젓가락 장단에 실려 숱한 세월 동안 대중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가수 박재란씨는 불과 열여섯 살 때, 처음 무대에 발을 디딘다.

군예대에서 활동 시작, ‘일인다역’ 소화해내

본명 이영숙. 처음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던 부친 이수천씨와 성가대원으로 처음 만났다는 모친 유순남씨 사이의 1남5녀 중 4녀로 서울서 출생했다. 네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이 전근함에 따라 가족 모두 천안으로 이사, 천안 제일국민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천안여중을 거치는 동안 그는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 소문난 재간덩어리.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당시 인기 있던 유행가를 전파시킨 역할은 늘 그의 몫이었다. 특히 백난아의 ‘망향초 사랑’을 즐겨 불렀다고 기억한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무대 활동을 적극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경찰악대장 박태준씨. 그의 추천을 통해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 3기생으로 발탁되면서 대구에서 첫 무대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수양아버지까지 되어주는 박태준씨로부터 이 때 받은 예명이 박재란.
 
일선의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위문공연이 주 임무였던 군예대에서 그는 ‘일인다역’을 맡아야 했다. 노래는 물론 무용, 악극 등 쇼에 관한한 모든 걸 소화해야 했던 어린 재란은 대구에서 2년, 서울에서 2년간의 군예대 생활을 거치는 동안 무대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아울러 점차 가창력도 인정받으며 첫 음반을 취입한다. 이 군예대 시절, 대구에서 첫 취입해 발표하는 노래들이 나화랑 작곡의 ‘뜰아래 귀뚜라미’와 김학송 작곡의 ‘코스모스 사랑’. 그러나 이 노래들은 기대만큼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악극단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첫 히트곡 ‘럭키모닝’이 발표되는 때까지 무명인 채로 '희망악극단'과 ‘무궁화악극단’ 그리고 '반도악극단' 등을 옮겨가며 무대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가창력과 미모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뭇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자 ‘삼천만의 연인’으로 점차 발돋움해가기 시작했다.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산 너머 남촌에는’의 가수 박재란의 삶과 사랑[1]’, 2007년 1월 25일 자.)

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세시’, 그리고‘천생연분’ 등에 출연, 배우로도 활동

▲ 박재란의 대표곡인 영화주제가 ‘님(창살 없는 감옥)’ 음반 재킷
‘삼천만의 연인’이었던 ‘꾀꼬리가수’ 박재란씨는 빼어난 외모만큼이나 당시 옴니버스 음반들의 커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데뷔 때부터 전성기였던 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음반 재킷을 장식했던 가수가 바로 박재란씨로 필자가 확인한 것만도 무려 1백여 종.

아울러 스크린에도 진출, 59년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은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는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씨와 함께 특별 출연해 주제가와 함께 연기를 선보였고 이어 61년, 서울시민회관 개관 특선 프로로 개봉된 영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에서는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또한 1962년 발표된 히트곡 ‘님’은 특히 가사 중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이듬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울러 이 노래 ‘님’은 지난 2001년, 작사가 차경철의 출생지인 울산 대운산 입구에 노래비가 건립되기도 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서로 만나 헤어진 이별이 건만/차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 하려나/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애달피 울어 봐도 맺지 못할 걸/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님(창살 없는 감옥, 차경철 작사, 한복남 작곡, 박재란 노래)

방송과 영화, 취입과 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언제나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티면서도 하루에 무려 30곡이나 되는 노래 연습과 취입을 해야 했어요. 젊었을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의 환호가 가장 큰 힘이었지요.”

노래와 무대가 전부였던 만큼 또 그 안에서 모든 꿈을 이뤘다. 무대에서 생긴 병은 또 다음 무대에서 치유되었을 정도로 그에게서 노래는 어려움을 이겨낸 치료제이자 면역력을 키워준 힘이었다.

‘대중들 앞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에게도 비로소 ‘자신만의 인생’이 펼쳐진다. 59년, 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운명처럼 남편 박운양씨를 만난 것.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박운양씨는 작곡가 겸 연주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손님으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 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89년 ‘한번만 더‘로 사랑받았던 가수 박성신씨다. (편집자 주 : 1987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회상’으로 데뷔한 박성신(1968년 11월22일~2014년 8월8일)이 그의 둘째딸. 박성신은 1년 뒤인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비 오는 오후’로 가창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발표한 ‘한 번만 더’가 크게 히트했다.)

영화제작으로 파산 후 도미, LA의 나이트클럽에서 활동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 단체를 만들어 전국 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일을 1백% 모르고 살았던’ 순수한 연예인이었던 만큼 세상은 이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1백 평 남짓하던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을 택한 뒤 73년,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Tiger)’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자 그 역시도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혀져갔다.

더구나 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생활은 재기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그 집념이 병이 되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악성 위궤양으로 발전,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2년을 보내는 사이 얼굴은 새까맣게 기미로 덮이고 스타킹조차 신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가늘어져 서있기조차 힘들었어요. 화재로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마저 모조리 날렸지요. 당시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으나 이제는 되레 홀가분해졌어요. 아마도 세상일을 모두 잊으라는 하나님의 계시인양 받아들여졌지요.” 그의 회고다.

긍정적인 삶, ‘피그말리온 효과’ 몸소 실천하다

귀국 후 그는 다시 일어섰다. 현재는 선교활동을 통해 '노래하는 전도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유년시절 숱한 잔병치레를 통해 강한 면역력을 키운 동시에 어려웠던 시대를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던 가수 박재란. 이제 그는 스스로 ‘긍정적으로 대할수록 긍정적으로 되는’,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

“보통 가수가 한 곡을 히트시키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대략 오백 회 이상 불러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실제로 자기 암시에 빠져 삶 자체도 알게 모르게 노래를 따라갑니다.”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던 그, 스스로의 ‘피그말리온 효과’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이다. 경쾌하고 밝은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던 자신의 노래들이 그러했듯. (서울신문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산 너머 남촌에는’의 가수 박재란의 삶과 사랑[2]’, 2007년 2월 1일 자.)

당시 칼럼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일간지라는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박재란씨의 활동사항만을 간략하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글에 미처 담지 못한, 못 다한 이야기를 다음 호부터 본격 시작하려 한다. ‘삼천만의 연인, 꾀꼬리가수의 원조 가수’ 박재란의 삶과 사랑’에 대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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