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9.22 일 07:09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9월 10일 (월) 09:34:50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70주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내달 북한을 방문할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북한이 8월 중순부터 중국인의 평양 방문을 전격 중단시킨 데 이어 싱가포르 유력 매체는 ‘시 주석의 9월 9일 방북’을 확정적으로 보도했다. “중국 측 선발대가 평양을 방문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시 주석이 방북하게 되면 2005년 후진타오 주석 이후 중국 최고지도자로는 13년 만에 북한을 찾는 것이다. <조선일보 2018년 8월 20일>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1개월 전인 8월 15일에 수립되었으니 얼핏 보아서는 김일성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통일정부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하고 뒤늦게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운 것처럼 인식되기 십상이다.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분단의 책임을 남한의 이승만 정권에 뒤집어씌우려한 김일성의 책략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사실 대한민국 건국의 모든 과정이 1948년 한 해 동안 정신없이 이뤄진 것과 달리 북한의 건국은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착수되었다. 해방 후 소련이 먼저 설치한 것은 5도행정국(1945.10)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2)였다. 1년 뒤에는 정식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사실상 북한의 정부 노릇을 하게 하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결국 1948년 9월의 정권 수립은 대외용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북한 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으나 당시 남한 정치인은 물론 미국조차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1990년대 구 소련이 몰락하고 비밀문서가 공개된 후 알려졌다.
일본의 패망 후 소련은 동유럽을 강제로 소비에트화하거나 위성국화한 도식을 북조선에 그대로 적용한 반면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남한에 실현하기 위해 우여곡절과 혼란을 겪으며 시간만 허비했다. 소련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열어 대회 마지막 날인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했다. 코민테른이 정한 1국 1당 원칙에 가로막혀 자신들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산당을 북한에 만들 수 없게 되자 남한에서 활동 중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북조선 공산주의자들을 분리할 속셈으로 북조선분국을 창설한 것이다.

분단의 책임을 남한의 이승만 정권에 뒤집어 씌우려 한 김일성의 책략이 제대로 먹힌 셈

▲ ‘소련 해방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1945.10.14)
당시 소련 군정은 예상되는 박헌영 등 국내파들의 반발을 의식해야 하는 데다 아직 나설 때가 아니라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10월 14일 ‘소련 해방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에서 김일성을 ‘조선 인민의 영웅’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극적인 효과를 본 뒤 1945년 12월 17일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당 이름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임명했다.
1946년 2월 8일에는 북조선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해 김일성 위원장, 김두봉 부위원장 체제를 가동했다. 이로써 김일성은 당(북조선공산당)과 정부(임시인민위원회)까지 모두 장악한 명실상부한 북한의 제1인자가 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법(3.5), 선거법(6.24), 주요 산업 국유화법(8.10)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북한을 소비에트 국가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1946년 8월 28일에는 연안파가 주축인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을 합당해 당명을 북조선노동당(북로당)으로 바꿨으나 김일성은 때를 기다리며 한동안 부위원장으로 머물렀다. 서울의 조선공산당 역시 북로당을 따라 1946년 11월 인민당·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남북의 공산당은 비로소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아시아 최초 사회주의 정권 출범

북한은 1946년 11월 3일 단일 후보에 대한 흑백함 투표 방식으로 북조선노동당 도·시·군 인민위원 선거를 실시하고 1947년 2월 20일 북조선 최고 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를 출범했다. 2월 22일에는 최고 집행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를 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2개월 뒤 김구·김규식을 평양으로 초대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것을 보면 속으로는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겉으로는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우는 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기다렸다는 듯 본색을 드러냈다. 8월 25일에는 유권자 총수의 99.97%가 투표에 참가해 98.49%가 북로당이 지명한 단일 입후보자에게 찬성 투표를 하도록 해 남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212명을 선출했다. 남한까지 대표한다는 명분을 살리기 위해 황해도 해주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360명의 남쪽 대의원도 선출했다.
남북 대의원들은 9월 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제1회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정파 간의 갈등으로 의장단을 구성하는 데 5일이나 소비하는 등 회의는 순조롭지 않았다. 9월 8일에야 남로당 위원장인 허헌을 의장, 연안파 김두봉을 상임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또한 스탈린이 낙점한 김일성은 수상, 박헌영·홍명희·김책은 부수상으로 선출해 초대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9월 9일 오전 10시 모란봉극장에서 아시아 지역 최초로 사회주의 정권 출범을 알리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기념일인 ‘9·9절’을 김일성·김정일 생일 다음으로 중시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는 이름도 ‘국경절’로 부르고 있다. 남로당과 북로당으로 갈려 있던 노동당은 1949년 6월 30일 단일 정당으로 통합되었다. 이날 남·북 노동당은 평양에서 연합중앙위원회를 열어 당 이름을 ‘조선노동당’으로 바꾸고 김일성을 위원장, 박헌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형식상으로는 합당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남로당을 흡수한 것이고 남로당 계열이 몰락하는 시발이기도 했다. 현재 북한은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10월 10일을 당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항거한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기념재단이 8월 22일 부산시청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본격 출범했다. ‘부마민주항쟁’ 39년 만이다. 총회에서는 초대 재단이사장에 송기인 신부, 상임이사에 고호석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이 각각 선출됐다. 창립취지문과 정관도 총회에서 채택됐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해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다. 이 항쟁은 사실상 유신독재를 종식한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이 신군부에 의해 좌절되면서 부마항쟁도 크게 조명받지 못한 채 가려져 왔다. 이 때문에 부산·마산에서는 지금까지 저평가된 부마민주항쟁의 의미를 드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측면에서 기념재단 설립을 요구해왔다. <경향신문 2018년 8월 23일>

1979년에 이르러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유신체제에도 곳곳에 균열이 생겼다. 그해 8월 YH무역의 신민당사 점거농성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이 대정부 강경투쟁으로 선회하고, 유신정권이 김영삼 의원의 총재직 직무정지와 더불어 의원직까지 제명하는 등 초강경책으로 맞받아치면서 유신 정권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국회와 사법부까지 정권 유지의 도구로 유린당한 반민주적 상황은 국민에게 분노와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시민의 좌절과 울분이 컸다. 전년도보다 32%나 늘어난 조세 부담도 울고 싶었던 부산시민의 뺨을 때리는 역할을 했다. 당시 부산 지역 계엄사 합동수사본부가 부산시민을 상대로 시위 원인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부산시민의 가장 큰 불만은 김영삼 의원의 제명(13%)이었다. 물가 폭등과 부가가치세에 대한 불만(12%)이 두 번째였고,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11%)은 세 번째였다. 경제 불만(11%), 정부 자체에 대한 불만(10%), 언론 탄압(9%)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1979년 10월 15일 오전, 부산대 공대 3년생 이진걸이 친구와 함께 강의실을 돌면서 “오전 10시 도서관 앞에서 집결하자”고 적힌 선언문을 나눠주었다. 10시 20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일을 그르쳤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학교를 빠져나와 대낮부터 소주를 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뒤늦게 도서관 앞에 모인 학생들이 리더의 등장을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비록 그날 시위는 무산되었지만 두 사람의 역할은 컸다. 오랜 침묵 속에 빠져 있던 부산대생들의 가슴에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는 공감대와 “곧 무엇이 터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인 10월 16일 오전 9시 30분, 부산대 상대 2년생 정광민이 상대 306호 강의실로 뛰어들어가 학생들에게 선언문을 나눠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밤새도록 등사한 선언문이었다. “유신 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투쟁하자!”라는 선언문을 손에 쥔 학생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밖으로 몰려나갔다.
이윽고 “독재타도!” 구호가 부산 캠퍼스 곳곳에 울려퍼졌다. 1974년 이후 5년 동안 단 한 차례의 데모도 일어나지 않아 ‘유신 대학’으로 조롱받던 부산대가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유신정권 타도”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500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는 ‘애국가’, ‘선구자’, ‘아침이슬’ 등을 불렀다. 스크럼을 짜고 “독재 타도!”, “유신 철폐!”, “학원 사찰 중단하라!”를 외치며 운동장 밖으로 뛰쳐나올 무렵 학생들의 숫자는 4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하고, 학생들의 교문 밖 진출도 경찰의 저지로 물거품이 되자 학생들은 흩어져 부산역으로 몰려갔다.

유신 정권의 몰락을 가속화 한 항쟁

▲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 모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학생들은 부산역 광장 주변에 이미 전투복 경찰관들이 깔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부산역 광장을 지나 시청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2시, 시위대는 200~300명씩 대오를 이뤄 시청 부근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오후 3시경 국제시장 주변에 모인 시위대만 2만~3만 명을 헤아렸다.
길거리 시민들도 학생들을 응원하고 고층건물의 사무실에서는 시민들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박수를 쳤다. 시민들의 가세는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바꿔놓았다. 밤 8시가 넘어서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운 시위대는 파출소를 파괴하고 순찰차와 작전차를 불태웠다.
10월 17일 부산대에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동아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분노의 불길은 시내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어느덧 학생보다 시민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시민들까지 대거 소요에 가담한 것은 1961년 박정희 정권 출범 후 처음이었다. 시위대는 경남도청과 세무서, 언론사에도 돌을 던졌다. 사진기자들의 촬영을 막을 정도로 언론에 대한 거부감이 커 부마 사태는 기자들이 찍은 시위장면이 거의 없는 흔치 않은 사건이 되었다.
시위가 확산되자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18일 저녁 8시경 남포동에 모여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 쪽으로 나아갔으나 M16 총에 대검을 꽂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밀려 해산되었다. 이후 부산은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사흘 동안 파출소 21곳과 경찰차량 18대를 불태우거나 파손시킨 부산 시위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항쟁의 불길은 이미 마산으로 번져 있었다.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산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10월 18일 밤, 공화당사와 파출소, 방송국을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19일 저녁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교생들의 합세로 시위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유신 정권은 10월 20일 마산·창원 지역에도 위수령을 선포해 시위를 봉쇄했다. 이로써 부마민주항쟁도 막을 내렸지만 서울에서는 부마민주항쟁의 대처 방법을 둘러싼 정권 내 갈등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결과는 박정희 정권의 몰락이었다. NM
 

김정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