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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8월 04일 (토) 02:52:3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장준하 탄생 100주년
장준하(1918~1975)의 57년 삶은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불의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참지식인의 전범이었다. 장준하는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8년 8월 27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평양의 숭실중학과 선천의 신성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1941년 일본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1944년 1월 중국 서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장준하는 1944년 7월 7일 부대를 탈출해 7월 9일 중국 유격대 부대에 도착, 4개월 전 먼저 탈출해 그곳에 와 있던 김준엽을 만났다.

▲ 장준하
장준하와 김준엽 등 5명의 일행은 7월 28일 장정 길에 올라 그해 9월 10일 안휘성 임천에 도착, 그곳에 있는 중국군관학교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장준하와 김준엽 등 수십명은 7개월 동안 장장 6000리(2400km)나 되는 먼 거리를 횡단하고,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험난한 파촉령을 넘어 1945년 1월 31일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에 도착했다. 이 모든 고통이 못난 조상 때문이라고 생각한 장준하는 이후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그의 결심은 훗날 잡지 ‘사상계’를 창간할 때도 모토가 되었고, 사후에는 묘비명의 문구가 되었다.
1945년 1월 31일 중경에 도착한 장준하는 4월 29일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3개월간 중국 내 미국 전략첩보대(OSS)에서 국내 침투를 목적으로 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 잠입을 기다렸다. 하지만 8월 20일로 예정된 국내 진공작전은 8월 15일 일본의 갑작스런 패망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준하는 김준엽, 이범석 등과 함께 미군기를 타고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으나 아직 무장을 풀지 않은 일본군의 귀국 불허에 가로막혀 중국으로 돌아갔다. 11월 23일 김구 주석 등 임정요인들을 따라 미군기 편으로 다시 귀국한 뒤에는 한동안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이 조직한 민족청년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당시 민족청년단은 확실한 극우 단체였고 장준하 역시 극우적 사고로 무장했다.
장준하는 한때 김구를 수행했지만, 이승만과 김구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협상으로 갈라질 때는 명백하게 이승만 편에 섰다. 6·25전쟁 때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미국의 후원을 받으며 공산주의와의 사상전을 전개했고, 1952년 9월 국민사상연구원이 피난지 부산에서 창간한 월간지 ‘사상’의 발간에 참여했다. ‘사상’이 4호(12월)를 끝으로 종간하자 장준하는 ‘사상’을 인수해 이름을 바꾼 뒤 1953년 4월 월간종합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 자부심 잊지 않아

그는 ‘사상계’를 반독재 투쟁의 이론적 기지로 삼았다. 1958년 8월호에는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실었다가 필화사건을 겪었고, 19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실었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반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1960년 4·19 후 학생과 혁신계에 여러 통일단체가 만들어지고 중립화통일 등 다양한 통일 방안이 제시될 때에는 1960년 12월호 권두언에서 “국가 형태야 어찌되든지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일부의 환상적 논리”를 비판하면서 “여하한 형태의 중립주의도 용납될 수 없다”며 강력한 반공 입장을 드러냈다.
1961년 5·16 쿠데타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61년 6월호의 무기명 권두언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에서는 5·16을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으로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박정희에 대한 장준하의 태도는 서서히 경멸과 멸시로 바뀌었다. 박정희가 일본군 중위였을 때 자신은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잊지 않았고, 박정희가 갖은 폭력으로 자신을 괴롭힐 때는 박정희의 인격을 업신여겼다.
1966년 10월 대구의 한 연설에서는 박 대통령이 사카린밀수 사건의 주범이라며 ‘밀수 왕초’라고 공격하고, 1967년 4월의 선거 유세에서는 베트남전 파병을 문제 삼아 박 대통령을 가리켜 ‘매혈자’라고 깎아내렸다. 이로 인해 그해 5월 국가원수모독죄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6월 총선에서 옥중 당선에 성공, 3개월만에 풀려났다.
구속되기 전인 1967년 초 장준하는 야당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위해 막후에서 윤보선, 백낙준, 이범석, 유진오 4자회담을 주선해 통합야당인 ‘신민당’을 태동시켰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는 의정단상에서, 1971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에는 재야인사로 박 대통령의 독재정치에 맞섰다.
1973년 12월 24일에는 함석헌, 백낙준, 김수환, 백기완, 유진오 등과 함께 ‘민주 회복을 위한 100만 인 서명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결국 1974년 1월 백기완과 함께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첫 구속자가 되었다. 장준하는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74년 12월 건강 악화에 따른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의문투성이 죽음이었지만 뚜렷한 증거 발견되지 않아

장준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1975년 8월 17일 오후 1시 20분쯤 경기 포천군 이동면의 약사봉(489m)에서 하산하던 중 벼랑 아래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시신을 검시한 의사는 오른쪽 귀 뒷부분에 가로 세로 5cm의 상처를 근거로 소견서에 ‘우측 후두부 함몰 골절’을 사망 원인으로 기록했다. 수사당국은 “사인(死因)은 등반 중 추락에 의한 뇌진탕”이라고 발표했다. 시신은 부검 없이 서둘러 매장되었고, 검찰은 유일한 목격자의 진술에 따라 단순변사로 처리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사고지점에 접근조차 불가능하고 ▲경사가 70도에다 높이가 14m나 되는 벼랑에서 떨어졌는데도 주검에 외상이 거의 없고 ▲추락 당시 쓰고 있던 안경이나 등에 멘 배낭 속의 보온병이 멀쩡하고 ▲당시 수사당국이 현장검증을 생략한 점 등을 들어 단순 실족사가 아닌 정치적 암살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장준하의 죽음은 한동안 공론화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후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명백한 타살 사건”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야당(민주당)도 ‘사인규명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공론화했으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의혹에 그쳤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에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에 나섰으나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변사기록마저 폐기되었다”고 지적은 하면서도 역시 의문투성이의 죽음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진상규명 불능’이란 판정을 내렸다.
2012년 8월 유골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골에 대한 검시가 이뤄졌을 때는 6~7cm 크기의 원형으로 파인 상흔이 뚜렷하고 상처난 부위가 여러 조각으로 깨져 깊이 1㎝가량 안쪽으로 함몰된 상태인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추락사 당시 확인하지 못한 ‘오른쪽 골반 골절’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골 검사를 한 서울대 법의학연구소가 소견서에서 “머리뼈 골절은 둔체에 의한 손상이나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혀 생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해 사실상 영구 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장준하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해 타살로 단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준하가 협심증을 앓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추락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협심증 환자는 흉통과 함께 호흡곤란, 어지러움, 현기증 등을 호소할 수 있고, 무리한 운동을 하면 드물지만 갑자기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들의 의견을 근거로 삼는다.
또한 눈에 띄는 외상이 없다는 ‘타살 단정’ 측의 주장과 달리 당시 유족 측의 요구로 사체를 직접 검안한 의사의 소견서에는 “시신의 얼굴 전체에 좌상, 찰과상, 열창 등의 외상이 있고 우측 콧구멍에서 출혈이 확인되었으며 등, 허리, 엉덩이, 넓적다리 등에 찰과상이 존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추락사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김민기와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0년 만에 돌아온다. 1994∼2008년 총 4000회 공연을 마친 뒤 운행을 멈췄던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이 오는 9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4001회 공연부터 재가동된다. 이번 공연은 12월 30일까지 100회 한정으로 열릴 예정이다. ‘지하철 1호선’은 86년 독일 베를린 그립스 극장에서 초연한 극작가 폴커 루드비히의 ‘1호선(Linie 1)’을 극단 학전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김민기가 한국 실정에 맞게 번안ㆍ각색한 작품이다. <중앙일보 2018년 7월 23일>

▲ 김민기
김민기(1951~ )는 시집 없는 시인, 그림 없는 화가, 노래하지 않는 가수다. 1970년대 내내 줄곧 소문과 전설로만 회자되던 그가 지상의 현실 세계에 안착한 것은 1983년이었다. 경기도 전곡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그해 겨울, 집 전체가 불에 타 사라지는데도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밤새 술을 마시던 그는 결국 농사를 포기하고 대학로 좁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연극과 뮤지컬에 매달렸다. 그것은 부활의 몸짓이었다.
김민기는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유복자 막내로 태어났다. 의사이던 부친이 6·25 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인민군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이다. 명민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명색이 미술학도였는데도 그림보다는 음악에 심취해 경기고 동기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 듀엣 ‘도비두’를 결성했다.
노래 무대는 주로 명동의 YWCA ‘청개구리홀’이었다. 노래 잘하는 재수생 양희은을 알게 된 것도 청개구리홀이었다. 1971년 서강대생이 된 양희은이 불쑥 찾아와 김민기가 작곡·작사한 ‘아침 이슬’을 음반으로 취입하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을 때 김민기는 기꺼이 기타 반주까지 해주었다. ‘아침 이슬’은 1971년 9월 발매된 양희은의 제1집에 수록되었다. 김민기도 한 달 뒤인 1971년 10월 ‘아침 이슬’을 비롯해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저 부는 바람’, ‘꽃피우는 아이’, ‘그날’ 등을 수록한 1집 앨범을 냈다.
1972년 봄, 김민기는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 세 곡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튿날 새벽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 있던 그의 1집 음반은 모두 압수·폐기되었다. 1970년대 내내 수도 없이 되풀이될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김민기는 노래 부르는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서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았다. 야학을 하고 가톨릭 문화운동과 국악 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여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작곡, 전국 순회공연에 참여하고 1974년 최초의 마당극으로 평가되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썼다.
그 무렵 어디를 가나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게 싫어 1974년 10월 사병으로 입대했다.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던 김민기는 1975년 12월 ‘아침 이슬’이 송창식의 ‘왜불러’, ‘고래 사냥’ 등과 함께 방송 금지곡으로 묶인 사실을 군에서 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김민기의 노래 중 ‘아침 이슬’ 한 곡만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는데도 김민기의 다른 노래들까지 방송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김민기는 군 복무 중에도 노래를 만들었다. 제대를 얼마 안 남겨 두었을 때는 부대 선임하사의 요청으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내

김민기는 1977년 5월 제대하자마자 경기도 부평의 봉제공장으로 갔다. 흔히 말하는 대학생들의 위장취업이 아니라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김민기는 말한다. 그때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노래가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하는 ‘상록수’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 앨범 역시 그때의 공장 경험을 토대로 1978년 만들었다. 이 앨범은, 사전 검열을 거부하고 처음부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독자적으로 배급했다는 점과 포크 스타일을 비롯해 구전가요, 찬송가, 국악, 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한 형식을 한데 실험한 혁신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공장의 불빛’으로 김민기는 또다시 경찰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김민기가 군대 시절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등은 1978년 양희은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김민기를 작곡자로 올렸다가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 뻔해 작곡자는 남의 이름을 빌려 썼다. 그런데도 그 음반마저 판매 금지되었다. 김민기는 이후에도 몇 차례 공연과 관련해 연행, 조사, 석방 등을 되풀이하다가 전북 익산으로 낙향했다. 경찰의 감시망은 그곳에도 뻗쳐 있었다. 이후 탄광에서 일하고 1981년부터는 경기 전곡과 연천에서 소작을 시작했다. 1983년 겨울, 화재로 전곡의 시골집을 몽땅 잃고 나서야 뮤지컬을 만들자는 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대학로행은 전설로만 존재하던 김민기의 세상 나들이였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1983년 말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를 연출하고 1987년 탄광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의 대본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으나 여전히 돈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그가 제2의 인생의 터전이 된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 것은 1991년 3월이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그토록 앨범을 내지 않던 김민기가 1993년 4장의 앨범을 한꺼번에 낸 것도 순전히 빚을 갚을 요량이었다. 학전이 언론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김민기가 번안하고 연출한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994년 5월 14일 처음 무대에 올려지고부터였다.
독일의 폴커 루트비히의 ‘Linie 1’을 원작으로 한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 올리면서 김민기는 다짐했다. “이번에 망하면 여길 뜨겠다”고. 그런데 2주일이 지나면서 관객이 미어터졌다. 공연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1986년 초연된 독일 베를린에서는 15년 만인 2001년에야 1,000회를 돌파했지만 서자인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은 6년 만인 2000년에 1,000회를 넘겼다.
연변 처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1980~1990년대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실직 가장, 가출 소녀, 자해 공갈범, 잡상인, 사이비 전도사 등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냈다. ‘지하철 1호선’은 초연 후 매년 수정·보완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는 배경을 ‘1998년 11월의 서울’로 고정해 공연했다. 2008년 12월 31일 4000회를 마지막으로 폐막했을 때, 지난 15년 동안 다녀간 관객은 71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한 작품이 전용극장에서 이렇게 장기간 공연된 것은 한국 연극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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