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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의 세상을 뚫고 나온 바깥쪽으로의 가시
2018년 07월 09일 (월) 11:04:05 신선영 전문기자 ssy@newsmaker.or.kr
유리 조각 같은 시선들이 날카롭게 날아 박힌 나뭇가지, 철조망 같은 가시들이 첨예하게 촉을 세운 선인장, 병리적인 심리상태가 엑스레이처럼 드러난 결핍된 자아... 모두 주혜인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린 상징적인 이미지들이다. 마치 길을 찾기 위해 길을 잃듯이,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안과 슬픔으로 점철된 과거의 모습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신선영 기자 ssy@
 
시선 충돌
   
▲ 주혜인 작가.
주혜인 작가의 작품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인간관계에서 겪은 갈등과 대립이 빚어낸 심리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여성 인권을 유린하는 직장 내의 성희롱과 성추행에서 비롯된 거라면 얘기가 심각해진다. 수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공기업이었지만 더 이상 회사 내의 상대적 강자로부터 자신의 주체성이 흔들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작년 여름 사표를 제출하고 미술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퇴사에 이르기까지 이십칠 년 동안 그는 그 집단으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돼 있었다.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집단주의에 대한 분노와 그 집단주의에 매몰된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직장 생활이 순조롭지 않았다”고 회고하는 그는 “손상된 자의식이 가지게 된 수치심으로부터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도리어 열등감을 가지고 성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이런 완벽주의적인 모습이 더 많은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키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분노사회』에 나와 있듯이, 집단의 위계 관념이 개인의 고유성을 박탈한 것이다. 그는 “집단 내의 절대 다수가 집단에서 공유하는 잣대로 개인을 평가하는 ‘폭력’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을 향한 각종 뒷담화와 멸시와 차별과 시기가 난무하게 됐고, 결국에는 집단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조직 문화에서 고립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 (좌) 시선2, 53x45cm, 장지에 분채, 2018. (우) 시선1, 32x41cm, 장지에 분채, 장지에 분채, 2018.
 
이런 상황을 대변하는 <시선> 시리즈는 시선 강간을 당하는 자신의 상황과 시선 강간을 묵인하는 2차 피해의 상황이 혼재된 작품이다. 우울로 상징되는 푸른색의 감정과 그것을 떨쳐버리려는 붉은색의 감정이 극명하게 대립해 있고, 유리 조각처럼 파편화된 시선들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나무)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런 불편한 시선 속에서 자란 나무는 자기를 갱신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얽히고설키는 나뭇가지가 되어 더 큰 논란만 야기할 뿐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시선 강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 상사에게 수개월 동안 당했지만 성추행이나 성폭행처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 속앓이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퇴사 후까지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때마침 확산된 미투 운동이 연일 보도됨에 따라 애써 추스르고 있던 감정선마저 무너지게 됐고, 결국 사회적인 연대 움직임에 동참하는 미투 운동에 그도 용기를 내게 됐다. 사내 게시판에 그간의 일련을 폭로한 것이다.
 
   
▲ (좌) 타인의 그늘-가면시리즈5, 91x102cm, 장지에 분채, 2018. (우) 타인의 그늘-가면시리9, 91x102cm, 장지에 분채, 2018.
 
가시와 나
공기업이 보수적인 만큼 그의 글은 화제가 됐다.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예상외의 반향을 일으켰고 그의 사건 외에 또 다른 사건까지 밝혀지며 가해자 한명이 응당한 수순을 밟게 됐다. 비록 낮은 수위의 처벌이긴 했지만, 자신으로부터 불거진 미투 운동이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 피해자에게 일말의 보호막이 될 것을 생각하며 위안 아닌 위안을 삼았다. 가해자의 사과 한마디로 끝날 일이 협박과 2차 피해로 이어져 또 다른 퇴사자가 발생하는 일은 당분간 없으리라 확신했다.
 
이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개인전이 주목을 받으면서 국민적인 관심이 사그라지고 있던 미투 운동을 다시 한 번 회자시키는 역할을 하게 됐다. 사실 개인전을 열기에 앞서, 관람객들에게 미투 운동에 편승하려는 뉘앙스로 비칠 것이 우려돼서 작가 노트에도 이에 대한 언급을 일절 피했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과 의식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첫 전시이기 때문에 특정 사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타자와 욕망-가면시리즈1, 165x53cm, 장지에 분채, 2018.
 
하지만 작품 속 가시에 대한 질문들이 미투와 연계돼서 쏟아지면서 적잖은 이들과 가시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풀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가시는 ‘두렵고 불쾌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취하는 적응행위적인 방어기제’다. 뾰족하게 촉을 세우고 있지만 이것은 방어하기 위한 것이지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미투 운동과 일치해 있었다.
 
가시의 방어기제는 색채로 나타냈다. 색채는 시신경으로 자극되는 것이기 때문에 형태로 전달할 수 없는 본능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협이 느껴질 정도의 섬찍한 감정을 나타낼 때는 보색 대비를, 불쾌한 상황에 대한 수세적인 감정을 나타낼 때는 군청색을 사용했다. 인물 작품에서도 군청색을 주조로 사용했는데, X선이 투과된 엑스레이 사진처럼 망막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 타인의 그늘-가면시리즈2, 145x111cm, 장지에 분채, 2018.
 
“완벽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독립적이고 유능하게 비춰졌을지 모르지만 나의 내면은 늘 불안함과 열등감에 싸여 있었다”고 자조하는 그는 점점 더 피폐해지는 자신을 다잡기 위해 입사 초기부터 미술 학원에 등록해 그림에 몰두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에 입학해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이 시간은 “부정적인 자기애가 독자적인 심리 공간을 만든 과정”으로써 지금의 주체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그만큼 미술은 주말과 퇴근도 반납할 정도로 강박적으로 일에 매달렸던 그가 잠 잘 시간까지 줄여가며 붙잡은 유일한 끄나풀이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가시라는 가면을 써야 했지만 미술과의 관계에서는 가시라는 치료를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가시는 존재의 불안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던 그는 이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첫발을 내디뎠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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