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인숙 작가를 만나기 위해 경남 밀양에 내려갔던 날은 유난히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한 낮의 열기에 오월의 붉은 장미가 양염(陽炎)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빽빽한 햇볕’이라는 뜻과 ‘은밀한 햇볕’이라는 뜻이 동시에 적용되는 밀양의 밀(密)자처럼, 열기에 대한 사유를 가득 내뿜고 있는 그의 스테인리스 작품들을 그가 속한 모든 자연이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신선영 기자 ssy@
자연을 품은 스테인리스
| |
 |
|
| ▲ 표인숙 작가. |
표인숙 작가가 작업 초기부터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소재는 스테인리스다. 그 중에서도 강종에 속하는 304와 316L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스테인리스에 비해 탄소 함량이 적고 니켈 함량이 많아서 부식에 대한 저항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테인리스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른 균질과 뛰어난 윤광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최적의 소재로 20여 년 간 사용된 것이다.
이처럼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덜 받는 재료를 쓴다는 것은, 자연성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의 조화와 자연과의 균형을 이루고자 한 그의 조형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특히 스테인리스의 반사광을 최대한 발휘시킨 작품 <Untitled 2000>은 국내외 조각가 100여 명이 참가한 2000년 PICAF 국제바다미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미술 전문가들과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수작이다.
<무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인간과 자연, 자연과 도시의 점이지대’다. 2000도가 넘는 산소 불꽃으로 절개한 길이 2600cm, 높이 122cm의 초대형 스테인리스를 바다 속에 밀어 넣어 밀물에 의해 들어오는 자연(바다)을 수용하고, 썰물에 의해 비춰지는 인간을 포용했다. 결과적으로 차가운 금속인 스테인리스가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주는 따뜻한 품성, 곧 자연성을 갖게 됐다.
이후 2002년에는 ‘수직운동’과 ‘수평운동’을 하는 스테인리스를 선보였다. 스테인리스 사면체 안에 또 다른 사면체가 위와 아래, 좌와 우로 천천히 움직이는 반복 운동을 통해 단순한 것의 절대적인 형태와 느린 것의 절대적인 구조에 도달하고자 했다. 넉넉하게 들이쉬고 유유하게 내쉬는 자연의 호흡을 닮은 이 작품은 모든 잡념이 비워진 상태인 공(空)으로 관객들을 진입시켰다.
이러한 구조와 구조성은 “작품 발상의 근간이 되어 준 이른바 선심(禪心)”에 가닿아 있다. 선심이란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다. 표인숙 작가는 그것을 빛(열)으로 도달했다. 앞서 언급한 반사광에 의해 드러나는 표면의 빛을 넘어, 부식에 의해 들어가는 내면의 빛으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본질의 저변에 가닿은 것이다. 바로 크랙(crack)을 이용해서다.
| |
 |
|
| ▲ Untitled 2000, 150×26000×1220mm, Stainless steel, 2000. |
<Timeless, Stainless>
표인숙 작가가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는 스테인리스로 작업하는 작가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스테인리스를 작품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스테인리스의 속성을 역으로 추적한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 균질한 반사면의 정돈된 겉살이 아닌, 거친 크랙의 갈라진 속살을 통해 스테인리스에 새로운 기의를 제공한 것이다.
사실 크랙은 열이 식으면서 발생하는 전도율의 차이가 표면을 갈라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 실수 혹은 허점에 속한다. 그래서 관련 학과, 업체, 공장, 연구소에 자문을 구했지만 크랙을 개발하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크랙을 자신의 창작 동력으로 삼은만큼, 지난 4월에 열린 11번째 개인전 <Timeless, Stainless>까지 매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20여 년 간 자신만의 크랙을 진척시켜 왔다.
| |
 |
|
| ▲ Untitled 2017-35, 400×70×540mm, Stainless steel, 2017. |
지금의 크랙은 스테인리스를 1600도에 육박하는 불 속에 7시간 정도 넣었다가 식히기를 5년에서 10년 정도 반복한 것이다. 일자 형태로 제작되기 때문에 지렛대 방식으로 모양을 만들었는데, 조금만 서둘러도 크랙이 손상되기 때문에 길이를 길게 잡아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움직였다고 한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크랙을 깎아서 광도 냈으니 이 시간의 가치는 산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대신 이 시간은 부친에 대한 연민과 비례한다. “갈라진 논바닥을 적시기 위해 늦은 밤까지 물을 퍼 날랐던 부친의 모습이 어린 시절에는 삶의 고통이었다”고 회고한 만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갈라진 논바닥 대신 갈라진 크랙을 경작해서 일군 수공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작이 <Timeless Stainless 2018-7>과 <Untitled 2017-35>다.
| |
 |
|
| ▲ (위) Timeless Stainless 2017-1, 90×90×2600mm, Stainless steel, 2017, (아래) 저멀리 그리고 가까이, 1000×75×120mm, Stainless steel, 2017. |
<Untitled 2017-35>는 혼탁함 정세 속에서도 옳은 것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현자의 눈이고, <Timeless Stainless 2018-7>은 윤회라는 무한함과 크랙이라는 유한함을 공존시킨 작품이다. 영원할 것 같은 스테인리스도 산화가 되듯이 우리의 삶도 대자연의 이치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이 이치를 깨닫는 자만이 물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자 했다. 결국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물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것을 물질(스테인리스)을 통해 역설한 것이다.
표인숙 작가는 11번의 개인전을 열고, 180여회의 국내외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PICAF국제바다미술제 대상, 신라미술대전 대상,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외 30여회 수상했다. 울산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사 역임하고, 충남미술대전,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경남미술대전 외 다수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맡았다. 김해국제공항, 부산정보대학, 경주시청 등에서 작품 소장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크랙 특허 출원했다. NM
| |
 |
|
| ▲ (좌) Timeless Stainless 2018-6, 170×270×50mm, Stainless steel, 2018, (우) Timeless Stainless 2018-7, 380×380×55mm, Stainless steel, 2018. |
|
ssy@newsmaker.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