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9.17 화 17:27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평론] ‘웨딩드레스’ ‘애모의 노래’의 로맨티스트, 가수 한상일의 삶과 노래
2018년 06월 05일 (화) 01:40:50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공감하는 이들이 매우 많을 것이다. 살면서 종종 부딪히게 되는 ‘두 갈래 길’을 누구나 모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출신의 인텔리 가수 한상일씨는 ‘노래와 전공’이라는 두 길을 모두 걸어온 인물이다. ‘꿈과 현실’ 모두를 성취한 이모작(二毛作)의 주인공인 것이다.

‘웨딩드레스', '애모의 노래'가 그렇듯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 한상일씨, 그는 여전히 로맨티스트다. 음악에 대한 정열 또한 끝이 없다. 장르를 넘나드는 스펙트럼 역시 넓다.

지금도 그가 노래하는 모습은 옛가요 전문프로그램 ‘KBS 가요무대’를 통해 자주 볼 수 있지만 원로가수라는 용어가 여전히 생소하리만치 전성기 당시의 가창력 그대로다

‘노래와 전공’이라는 두 가지 길을 오간 탓에 오랫동안 가요계를 떠나 있었던 인물, 한상일씨의 노래, 그리고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가요계의 신사’, 아리따운 신부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다

▲ 가수 한상일
‘당신의 웨딩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소/춤추는 웨딩드레스는 더욱 아름다웠소/우리가 울었던 지난날은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우리가 미워한 지난날도 이제와 생각하니 사랑이었소/당신의 웨딩드레스는 눈빛 순결이었소/잠자는 웨딩드레스는 레몬 향기였다오’ -웨딩드레스(이희우 작사, 정풍송 작곡, 한상일 노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공 한상일씨가 1970년 2월에 발표한 노래 ‘웨딩드레스’다. 이 노래는 정인엽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먼데서 온 여자(이희우 극본, 정인엽 감독, 신성일 윤정희 김정훈 김창숙 주연)’의 주제가다. 당시 발표되자마자  ‘하와이안 웨딩 송’과 더불어 결혼축가의 대명사로 자리했다.

흔히들 ‘노래엔 임자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노래는 '신사의 멋'이 물씬 풍기는 한상일씨의 분위기에 제 격이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 ‘웨딩드레스’는 처음 작곡가 길옥윤씨와 정풍송씨에 의해 각각 만들어진 노래다. 말하자면 같은 노랫말에 멜로디가 서로 다른 두 가지 노래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 공교롭게도 두 작곡가의 각기 다른 노래는 모두 한상일씨에 의해 취입되었다.

“1주일 정도의 차이로 같은 가사의 노래를 각각 다른 멜로디로 연습해야 했어요. 그리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음반이 나왔지요. 때문에 방송국 측에서는 신청엽서를 받으면 어느 곡을 틀어야 할지 몰라 애먹었고 저 역시 무대에서 ‘웨딩드레스’를 요청받으면 무대에 따라 두 곡을 번갈아 부르기도 했지요.” 한상일씨의 회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풍송 곡의 ‘웨딩드레스’는 발표 당시 영화 제목을 따서 ‘먼데서 온 여자‘라는 별도의 부제를 달고 출시되었다.

가수 한상일씨는 명성에 비해 그리 많은 곡을 발표하지 않았다. 가수로서의 활동 기간도 길지 않다. 1965년 손석우 작곡의 ‘추억의 아카시아’, ‘나의 사랑 기타’를 발표하며 데뷔한 그는 70년대 말 가요계를 떠났다. 자신의 전공을 찾아 건설 분야의 직종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30 여 년 뒤인 2005년 '작곡가 손석우 노래 55주년 헌정음반'을 통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 ‘그 이름’ 등을 발표하며 돌아왔다. 오랜 동안 가요계를 떠나있었음에도 가창력은 여전했다.

유년시절,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우등생이자 재주꾼으로 통해

1941년 1월 18일, 이북 땅 개성에서 부친 한효경(韓孝慶)과 모친 진은주(陣銀珠) 사이의 5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난 그. 개성 만월초등학교 4학년 때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으로 피난 내려온다.

인천 서림초등학교, 인천중힉교를 거쳐 서울 경동고를 졸업했다. 중2 때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하는 바람에 혼자가 되어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인천의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신문배달 등으로 고학을 해야 했다. 이후 서울 경동고등학교 진학한 그의 꿈은 의사였지만 진로를 바꿔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에 진학한다.

남쪽과 북쪽에서 모두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자 노래 잘하는 재주꾼으로 통했던 그는 특히 대학시절, 친구들과 4중창단을 결성해 활동했을 정도로 음악광이었다. 특히 마리오 란자, 앤디 윌리암스, 후랭크 시나트라 등에 심취했다.

1965년 대학 졸업 후 은사가 설립한 ‘김희춘 설계사무소’에 입사, 설계기사로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노래를 부르기 위해 미8군 장교클럽인 ‘유썸클럽(Yusumclub)’에서 전속가수, 즉 하우스 싱어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 무렵 주위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먼저 ‘팝송악보’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스탠더드 팝을 무려 3백여 곡 정도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레파토리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작곡가 손석우 선생을 찾아가 신곡들을 받아 취입한다. 이중 ‘가거라 저 멀리(1966년)’가 히트하면서 손석우 선생의 권유로 KBS-TV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해 칸초네 ‘Carissimo Pinocchio(피노키오의 편지)’를 불러 1기생으로 발탁된다. 1966년도의 일이다.

본명은 한제상(韓濟祥). 그러나 손석우 선생은 그에게 한상일(韓常一)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글자 그대로 '늘 어디서든 일등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면테스트까지 거친 TV 전속가수였기 때문에 무대에서 노래는 물론 율동까지 소화해내야 했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 골수염으로 인해 오른쪽 발목을 잘라낼 위기까지 넘겼던 터라 다리가 불편해 무대에서의 율동을 소화해내기가 어려웠어요.”

때문에 방송국 측 입장에서는 한편 난감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생각된다는 그는 결국 무대 대신 라디오 진행자로 '밤으로의 초대'나 '장미의 화원' 같은 음악프로그램에 주력했다.

또 하나의 히트곡, 뮤지컬 주제가  ‘애모의 노래’

‘내 마음 나도 모르게 꿈같은 구름타고/천사가 미소를 짓는 지평선을 나르네/구만리 사랑 길을 찾아 헤매는/그대는 아는가 나의 넋을/나는 짝 잃은 원앙새 나는 슬픔에 잠긴다.’ -‘애모의 노래(황유철 작사, 안길웅 작곡, 한상일 노래)’

‘웨딩드레스’와 함께 가수 한상일씨의 또 다른 히트넘버 ‘애모의 노래’는 1969년 당시 뮤지컬 ‘카니발의 수첩’의 주제가다. 뮤지컬 공연 당시에는 남녀 듀엣에 의해 불려졌다. 이 세미 클래식조의 노래는 밝고 힘 있는 한상일씨 목소리가 최적이라고 판단, 작곡가 안길웅씨는 그에게 취입을 권유했다.

동갑내기인 작곡가 안길웅씨와는 이 무렵 술자리도 자주 가질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던 사이였다. 안길웅씨 또한 예그린 악단의 전속가수 출신으로 노래실력이 출중했다고 그는 기억한다. 함께 발표한 ‘오 천사여’도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계속해서 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삽입곡인 ‘에델바이스(1967년)’, 레이 피터슨의 ‘Tell Laura I Love Her’를 번안한 ‘영아는 내 사랑(1969년)’, 그리고 ‘지난여름의 왈츠(1971년)’ 등 번안곡을 발표한다.  또한 이 무렵 성바오로 여자수도회가 출반한 성가곡집 ‘세상에 외치고 싶어’ 등도 취입했다. 그의 발성법은 이미 ‘단전 호흡하듯 노래하는 탄탄한 가창력’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정평이 나있었다.

이 무렵 그는 문화공보부 제정 방송대상 남자가수상, 서울신문사 제정 서울문화대상 남자가수상, mbc 10가수상 등을 휩쓸었다.

틈틈이 드라마주제가도 취입했다. 드라마 ‘후암동 찻집(차범석 작사, 김광수 작곡, 1967년)’, ‘광야의 사나이(곽일로 작사, 황문평 작곡, 1969년)’, 그리고 ‘머나먼 휴일(황문평 작곡, 1968년)’ 등이다.

특히 이 ‘머나먼 휴일’은 1954년 가수 현인이 ‘낙엽’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멜로디에 노랫말을 바꿔 드라마주제가로 사용된 노래다. 이 노래는 또한 ‘애상(1966년, 이미자)’이란 제목으로도 발표되었다.

지난 2005년 11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그동안 취입한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어보고자, 그가 발표한 노래 곡목을 뽑아 건네주었다. 리스트를 훑어보던 그의 표정이 순간 당황스런 빛으로 변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그렇게 많은 노래를 취입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의외로 많은 가수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도 자신의 취입 곡 중 상당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사는 물론 멜로디조차 대부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불과 몇 번의 연습 끝에 단 한 차례 취입한 곡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음반을 취입해놓고 제대로 들어볼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회고한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노래와 연기 선보여...

TV 전속가수로 출발했듯 엔터테이너 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내 ‘예그린악단’으로부터 뮤지컬 ‘대춘향전’의 출연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스스로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를 무대에서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김희조씨가 음악을 맡은 이 뮤지컬 공연에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가수 패티김과 함께 ‘이도령’역과 ‘춘향’역을 각각 맡아 음반만을 취입했다. ‘예그린 뮤지칼 3집-대춘향전’ 음반에 ‘내일을 기다려’는 패티김과, ‘꽃 찾는 나비’는 예그린의 나영수(전 국립합창단 단장 겸 지휘자)와, 그리고 ‘설레는 이 가슴’은 독창으로 각각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인기 TV 드라마 MBC ‘수사반장’ 등에도 출연했다. 탤런트 고은아씨와 사랑행각을 벌이며 위장 결혼해 파티장에서의 살인 협박을 하는 범인의 시골친구인 가수로 출연했다고 기억한다.

이 때 그는 건축과 출신답게 치밀한 성격을 드러내 담당자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가령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대사 수정 요구를 하는 것은 물론 드라마 상황에 비해 세트장이 너무 작다고 지적, 세트장을 모두 다시 제작하게 만든 당시 에피소드들이 그 것. 이어 에디뜨 삐아프의 삶과 사랑을 그린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에서 에디뜨 삐아프의 연인, 이브 몽땅 역을 맡아 가수 윤복희씨와 호흡을 맞췄다.

제2의 인생을 찾아 가수 생활 접고 건설 분야로 유턴

노래는 물론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오가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에게 주위에서는 그에게 다양한 활동을 요구했지만 정작 그는 연예인으로써 집안의 내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출신이라는 ‘최고학부’의 꼬리표는 늘 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해 수시로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집안의 반대로 연예활동을 접게 된 그는 1978년, 모든 연예 활동을 접고 전공을 찾아 건설 분야로 U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이때 그의 나이 어느덧 37세.

현대건설 입사 초기엔 그동안 연예인이기에 받아왔던 스포트라이트가 눈부셔 되레 짙은 그늘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미국 DMJM으로 연수를 떠난다. 이어 사우디 현대건설 현장에 외국인 감독관으로 파견, 2년 6개월 정도 근무한 뒤 현대종합목재에서 가구 판매 영업을 익혔으며 86년에는 아예 미주종합목재라는 가구공장까지 차린다.  ‘파라다이스 투자개발(건설회사)’에 근무할 당시 제주 서귀포 허니문하우스 호텔 건설에도 관여했다. 그는 가구회사, 투자개발회사 등을 거쳐  98년 퇴임할 때까지 20여 년 간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공식 가수활동은 접었지만 CF를 통해서는 대중들과 이따금씩 만났다. 포도주나 커피광고, 종합 비타민, 패션양복 모델 등이 그 것으로 귀족적 신사 이미지로 각인된 그의  캐릭터는 이 때문에 더욱 굳혀진 것이기도 하다.

황혼 이혼과 함께 시작된 전원생활

▲ 뒤늦게 시작된 전원생활 중 제주도에서의 한상일씨.

98년에 퇴직한 그는 뒤늦게 황혼이혼을 했다. 2007년 말의 일이다. 이혼과 함께 그는 제주도 조천의 전원주택을 사들여 전원생활을 시작한다. 필자가 이 제주의 전원주택을 찾았던 것은 지난 2010년이다.

대지 3백 평에 건평 120평.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집, 뒤뜰의 오리, 기러기, 토종닭과 리트리비 강아지 두 마리, 인기척만 나도 알아채고 몰려드는 잉어 40 여 마리가 헤엄치는 연못, 뒤뜰의 오리, 기러기, 토종닭과 리트리비 강아지 두 마리... 한마디로 그림 같은 집이었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10분 내로 포구에 가서 물고기를 고를 수 있는 바다와 산이 어울리는 이 제주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곳이죠. 실제로 이곳에 온 뒤 흰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당시 그의 말이었다.

3층 구조에 방이 자그마치 9개다. 혼자 사는 집치고는 너무 크다. 너무 넓어서 관리가 쉽지 않겠다고 말하자 ‘할 일이 많은 것이 오히려 전원생활의 매력’이라고 강조하던 말이 떠오른다. 1층에는 황토방, 3층에는 앞뒤에 같은 크기의 창문이 있어 그 창문을 통해 바람이 지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풍욕(風浴)방도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이 ‘바람골’이었다.

뒤뜰에는 직접 가꾼 텃밭도 있어 고추, 깻잎, 오이, 호박, 토마토들은 싱싱한 채로 식탁에 오른다. 동네사람들과 나눠먹는 것도 많아 정도 함께 가꿀 수 있다는 제주에서의 생활은 이전 육지에 비해 생활비가 3분의 1 수준이라 했다.

때문에 정작 외로워 할 틈조차 없다는 그는 이혼에 관해서도 담담하게 입장을 밝혔다. ‘가치관 차이였죠. 그래서 둘이 있어 괴로운 것보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택한 것이 결국 이혼’이라며 만남과 헤어짐 자체를 순리로 받아들인다는 심사를 담담히 토로한다.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뒤늦은 이혼을 선택할 때까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이 많았다고 토로한다. 노래와 전공 사이의 괴리도 그중 하나다. 물론 혼자 산다는 것에 따르는 어려움이 많지만 전원생활은 오랫동안 그가 꿈꿔온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제주에 온 뒤 많은 것을 되찾았어요. 무엇보다 음악과 자연이 늘 곁에서 내 편이 되어준다고 여기니 그렇게 평온해질 수 없더군요. 시간과 마음을 비워놓으니 비로소 잠재된 꿈이 눈을 뜨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꿈을 자각해 다시 무대를 찾은 그는 당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매일 두 차례씩의 라이브공연을 하고 있었다.

지성, 낭만, 건강함의 대명사, 가수 한상일의 요즘...

▲ 2006년 재즈가수 김준과 함께 조인트 공연을 하고 있는 한상일씨
2014년, 제주생활을 청산하고 현재 경기도 분당으로 돌아와 생활하고 있는 76세의 로맨티스트, 가수 한상일씨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필자 또한 로맨티스트가 되어가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의 건강관리는 철저하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복식호흡을 하고 발성연습을 한다. 집 근처에 위치한 성마리아 성당에서 매년 열리는 성당음악회에도 자주 선다.

마음공부를 위해 불교방송 많이 듣는다는 그의 철학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마음이 있는 곳에 인생이 있고 행복이 있다며 늘 마음을 가다듬는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 걱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고집부리지 않고 마음 비우면 건강은 절로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생활철학이다.

자연과 음악을 가까이 하다 보니 건강이 늘 곁에 있다. 현재 분당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틈틈이 음악에세이 등을 집필하고 있는 가수 한상일씨. 더불어 멋지게 펼쳐질 그의 ‘제3의 인생’을 기대해본다. NM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