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에서 정체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정밀하게 그렸다고 할지라도 도제식으로 전수받은 기술이기 때문에 원숙할수록 고루하다는 인상이 심어지기 일쑤이며, 소재나 기법에 대한 차용을 전방위적으로 이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뒤섞이면 뒤섞일수록 자연으로부터 이탈되는 느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의적인 생각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던 차에 오로지 자연만으로, 오로지 물감과 캔버스만으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윤인자였다.
신선영 기자 ssy@
화면 뒤에서 나오는 풍경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본질은 본디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로서, 정리해서 말하면 존재의 본바탕을 찾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윤인자 작가가 찾은 자신의 본바탕이 무엇이며 회화의 본바탕이 무엇이기에 미술 평론가들과 관람객들이 그의 작품을 격찬하는 것일까.
윤인자 작가는 어려서 산에서 자랐다. 집이 산자락에 자리한 탓에 산에서 눈을 뜨고 산에서 잠이 들고 산에서 꿈을 꿨다. 낮에는 산에서 놀거리를 찾으며 오만 산길을 휘젓고 다녔기 때문에 산이 어릴 적 유일한 친구이자 유일한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화두 역시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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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인자 작가. |
산에서 체화한 감성은 그의 전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그가 “어릴 때 기억만은 안 잊어버린다”고 한만큼 보는 사람에게도 박제된 기억을 떠올려주는 뒷맛이랄 게 있다. 특히 가을 산과 겨울 산은 심안으로 그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관조적이다. 산의 미묘한 움직임과 나무의 야트막한 호흡마저 감지되는 그림이어서 보고 있으면 그 분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 분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배경이다. 수많은 회화 작가들이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참혹으로 여기는 캔버스의 뒷면을 용인한 것이다. 뒷면을 용인한다는 것은 바탕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으로써, 그 본디의 성질로 자신의 정체성을 극복하겠다는 표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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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삼월 갤러리 이즈에서 열린 <봄> 전시 전경. |
캔버스는 앞면이 흰색으로 처리돼서 균질이 고른 데 반해, 뒷면은 마직 특유의 노르스름한 색감과 거친 질감이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인공처리가 된 인위적인 공간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자연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가 상기하는 자연을 그려 넣은 것이 퍽 운치 있게 도드라졌다.
회화적으로도 마직은 유용하게 작용했다. 올이 굵고 거친 마직이 갈색 주조를 이뤄주었기 때문에 흙에 대한 묘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는 표현의 과잉을 막을 수 있었고 두 번째로는 주요 대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삼월에 열린 개인전 <봄> 전에서 진달래가 더욱 주목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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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산, 72.7x60.6cm, Oil on canvas, 2017. |
봄, 봄
윤인자 작가가 그린 진달래는 특수하다. 으레 꽃잎을 앞세워서 단 몇 송이만 단출하게 그리는 게 일반적인데 윤인자 작가는 먼 거리에서 나무채로 뭉뚱그려 놓았다. 기둥이나 가지에 대한 표현도 최소화 했으며, 분홍색도 복잡하게 쓰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는 그의 작품을 색면 추상이라고 분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건 마직의 성질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마직은 올이 굵고 거칠어서 물감이 균질하게 묻지 않는다. 물감이 대략적으로 얹히기 때문에 함축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터치에서 진달래가 연상되는 것이 윤인자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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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달래,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8. |
윤인자의 힘은 결국 본질의 힘이다. 진달래를 수없이 되새긴 끝에 올려놓은 감각의 결정(結晶)이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기억 속에서 진달래가 호명된 것이다. 만약 순수성이 발휘되지 못했다면, 혹이라도 진달래를 과시하려 했거나 상업적인 계산을 했다면 더 두터워진 마티에르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본질을 바라보려는 노력, 이것이 그가 제시하는 회화의 방향이다.
“나는 진달래꽃이 주는 전체적인 뉘앙스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시각적으로 멋을 부린다든지 잘 그려 보이려고 하거나 정교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색채의 파동을 더 고려한다. (중략) 꽃 사이사이에 보이는 줄기도 일부러 그렸다기보다는 물감의 흔적에 더 가깝다. 꽃을 지탱하기 위한 줄기의 역할을 굳이 극명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그림은 부분보다는 전체가 더 중요하다.” (작가노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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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나리, 90.6x60.6cm, Oil on canvas, 2018. |
윤인자 작가는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과 서양화를 졸업했다. 여덟 번의 개인전과 한국, 싱가포르, 홍콩, 자카르타 등에서 백오십 여회의 단체전 및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제전 심사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상형전, 광화문아트포럼, 한국수채화협회 회원이며 윤아뜨리에를 운영하고 있다. N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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