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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5월 02일 (수) 04:14:44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뭐든지 다 만들겠어!’ 내 분명히 말하지만, 이렇게 외친다는 건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거요. 자유 말이오!”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대표작이자 자유 예찬의 상징적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지난달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가 원전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피터 빈의 2014년 영어 번역본을 한글로 옮겼고, 카잔차키스의 삶과 문학을 분석한 해설서 ‘조르바를 위하여’까지 펴냈다. 다음 달엔 유재원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국내 최초로 그리스어 원전 번역을 내놓는다. 교보문고가 지난 2월 발표한 세계문학 선호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50·60대가 꼽은 1위 작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20대(5위), 30대(2위), 40대(3위)에 비해 압도적인지지. 교보문고 구환회 MD는 “은퇴와 새 출발을 앞둔 50·60대가 조르바가 건네는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에 크게 반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딱 50세 되던 해 이 소설을 다시 읽고는 교수직을 버리고 그림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 <조선일보 2018년 4월 10일>

▲ 니코스 카잔차키스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는 ‘20세기 문학의 구도자’, ‘74년 생애를 바람처럼 세계를 떠돌아다닌 꿈과 여행의 작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삶은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사색과 행동 등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끌어내려는 내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지중해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크레타는 지금은 그리스 땅이지만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크레타는 삶에 대한 그의 비극적 인식의 출발점이었고 그는 어려서부터 죽음, 용기, 전쟁, 자유, 해방 같은 말들을 들으며 자랐다. 크레타는 1897~1898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치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카잔차키스는 1902년 그리스 아테네의 법과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리스 본토를 순례함으로써 평생에 걸친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말년의 자서전 ‘영혼의 고백’(1956)에서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고 고백했듯이 여행은 그에게 사색의 샘이자 사고의 실천이었다.
카잔차키스는 1907년 10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소르본대에서 ‘생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그에게 경도되었다. 인간이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예감을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인연을 끊고 삶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이 호전적인 청년에게 베르그송과의 만남은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에서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은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라고 소개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스키는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뜨내기 노동자인 조르바를 만나 함께 탄광 사업을 했다. 자서전에서는 조르바를 이렇게 회고했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카잔차키스는 아테네의 일간지 특파원 자격으로 1925년부터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다.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이집트 땅을 누비고 다닌 그의 생애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떠돌기를 연상시켰다. 그 여행과 방황의 여정은 3만 3,333행으로 된 방대한 분량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장엄하게 그려졌다. 1925년부터 쓰기 시작해 1938년 12월 출간한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9세기의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의 현대판 속편 격이다.
카잔차키스는 1940년대 초부터 자신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기 시작해 1943년 탈고하고 1946년 그리스어로 출간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제 인물 조르바를 등장시킨 1인칭 소설로, 카잔차키스는 과거 조르바와 함께 지내던 날들을 기억하며 자유에 관한 실존적 질문을 소설에 자세히 기록했다.

20세기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소설은 500쪽 가까운 장편이지만 플롯은 단순하다. 35살의 청년 작가가 크레타 섬의 갈탄 광산을 개발하러 떠나기 전날 밤 우연히 항구에서 65살의 조르바를 만나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 몇 개월간 광산업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조르바는 과거 게릴라와 광부 등 안 해본 게 없지만 세상 일은 몽땅 내려놓고 사는 호쾌하고 농탕한 기인이다. 여자만 보면 앞뒤 재지 않고 미쳐 날뛰는 남자, 도자기를 빚는 데 걸기적거린다고 도끼로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린 그런 사내다. 윤리, 도덕, 규범 같은 잣대는 훌쩍 뛰어넘은 채 자기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진솔한 삶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그야말로 ‘멸종 위기의 잡놈’이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성공 덕에 단번에 20세기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조르바는 자유로운 삶을 뜻하는 순수한 영혼의 상징이자 현대문학이 창조해낸 가장 분방하고 원기 왕성한 캐릭터로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살아 있는 심장, 거대한 게걸스러운 입, 아직 어머니 대지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위대한 야수의 영혼”으로 회자되었다.
소설은 1964년 앤서니 퀸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영화 역시 고전 반열에 올랐다. 카잔차키스는 1946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두 번 모두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를 두고 영국의 문예평론가 콜린 윌슨은 이렇게 말했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이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주요 소설에서는 예수의 삶이 극히 세속적으로 그려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가 1953년 ‘그리스인 조르바’, ‘미할리스 대장’, ‘최후의 유혹’ 등이 신성을 모독했다며 그를 파문했다. 교황청은 1954년 ‘최후의 유혹’을 가톨릭교회의 금서로 지정했다. 1957년 독일에서 눈을 감고 고향 크레타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상설, 안중근의 스승이자 배후로 알려지다
“가해자 안응칠(안중근 의사)은 3년 전(1906년) 당시 배일 목적의 교육에 종사하던 이상설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이상설은 안응칠이 가장 존숭(尊崇)하는 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와 헤이그 특사로 성명회 선언서를 주도했던 이상설 선생(1870∼1917)의 ‘사상적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나왔다. 일제강점 초기 독립지사 탄압의 주범인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1864∼1919)의 비밀보고서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는 4월 19일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와 함께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하바롭스크 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한국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를 찾았다”고 밝혔다. 이 기밀문서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체포된 뒤 ‘일제 스파이의 대부’로 불리던 아카시가 작성했다. 현대로 치면 중장급 참모장이던 그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밀정들을 진두지휘해 만든 보고서다. 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세력을 찾기 위한 사전 작업 성격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하면 현지에서 분사한 이준 열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정사로 활약한 이상설(1870~1917)이다. 무엇보다 그는 1906년 망명 후부터 1917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해외에서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였다. 
이상설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해 6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24세 때인 1894년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관장,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상설은 전통 학문인 유학은 물론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신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 1899년 집필을 끝낸 수학서 ‘수리’에 ‘정현(正弦·sin)’, ‘여현(餘弦·cos)’, ‘정절(正切·tan)’ 등 삼각함수 공식이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수학사에 남긴 발자취가 선명했다. ‘수리’에는 방정식과 연립방정식이 기호화되어 있고 제곱근을 포함한 2차방정식의 ‘근(根)의 공식’도 오늘날과 같은 기호로 정리되어 있다. 1900년 집필한 ‘산술신서’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재로 쓰였다.
이상설은 1905년 11월 초 의정부 참찬(정2품)에 발탁되었으나 며칠만에 을사조약이 체결(11.17)되자 적극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했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직설했다. 11월 22일 고종이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격시켰을 때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니, 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라고 항의했다.

을사조약 체결(1905년) 후부터 3·1 운동 발발(1919년) 전까지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 남겨 

▲ 이상설
민영환이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의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종로 네거리로 달려가 땅에 머리를 찧으며 자결을 시도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민영환의 집에 조문 갔다 나오면서 목격한 이상설의 자살 미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어떤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 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이상설은 1906년 4월 중국 길림성 용정으로 망명하고 그해 8월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항일 근대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서양 선진 문명의 수용과 관계있는 근대 교육과 더불어 철저한 반일 민족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독립군 양성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상설은 숙장을 맡아 산술을 가르쳤다. 안중근 의사가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용정으로 간 것도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상설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참석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을 만나 헤이그로 향했다. 1907년 7월 이준 열사의 분사 후에는 헤이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호소하고 독립 자금의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8월 8일 일본 정부 압력 하에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재판소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이상설은 9월 초 헤이그로 돌아가 이준의 장례식을 거행한 뒤 유럽 각국을 순회하다 1908년 2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남짓 머물렀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는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러시아령 내의 의병 세력이 ‘13도 의군’을 결성할 때 힘을 보탰다. 1910년 7월에는 유인석과 공동 명의로 고종에게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고 고종이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영도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1910년 8월에는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항일 단체 ‘성명회’를 조직했다.
일제는 이처럼 러시아에서 맹렬하게 항일을 주도하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8월 30일 이상설을 비롯해 성명회와 13도 의군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일부는 중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유배했다.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은 석방 후 니콜리스크(우스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그해 5월 최재형·홍범도 등 연해주 지역의 핵심 인물들과 뜻을 모아 ‘권업회’를 조직했다. 연해주는 물론 간도 지역의 인물들까지 참여시켜 급속히 세를 확대했다. 창립 당시 최재형을 회장, 홍범도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던 권업회는 1911년 12월 총회 때 조직을 개편해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 의장 이상설이 권업회를 대표하도록 했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상공업 등 실업 활동을 권장했지만 민족 교육과 한인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 4월 창간된 ‘권업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설과 애국 논설로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14년 초에는 연해주를 비롯해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규합,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아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을 기대하고, 그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이상설은 정도령(正道領)으로 추대되어 부도령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지휘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1차대전 발발 후 러시아가 동맹국인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든 항일 민족운동 단체를 탄압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권업회와 함께 1914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 상해로 이동한 이상설은 상해의 신규식·박은식, 북경의 유동열·성낙형 등과 함께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본부장에는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상해 지부장은 신규식, 감독은 박은식, 장춘지부장은 이동휘가 맡았다. 고종을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시켜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고 일본과 적대 관계에 있던 독일과 연대해 일본과 대항한다는 거대한 계획 하에 고종을 당수로 추대했다.
그러나 계획은 중도에 발각되었고 이상설은 비관 속에서 1916년 초 병을 얻어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17년 3월 2일 니콜리스크에서 48세로 순국했다. 그가 남긴 서릿발 같은 유언은 이랬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 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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