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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4월 02일 (월) 23:06:16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북한의 핵개발史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1950년대에 소련과 원자력 관련 협정을 체결하고 북한의 물리학자들이 소련의 원자력 연구소에 파견되면서 시작된다. 1962년 평북 영변에 설립한 원자력연구소와 1965년 소련에서 도입한 연구용 원자로는 핵연구의 기반이 되었다. 핵개발의 물꼬를 튼 것은 남한에서 월북한 1세대 과학자들이었으나 점차 소련 유학파 출신 2세대 과학자들이 참여하면서 핵개발의 성과가 나타났다. 

김일성의 종국적인 목표는 핵무기 개발이었으나 핵무장 의지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미” “반핵”을 외쳤다. 그 무렵 주한미군 부대에 다량의 전술핵이 배치되어 있어 북한의 반핵 주장이 마냥 연막전술만은 아니었다. 더구나 1970년대에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도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해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준비했기 때문에 1970년대 국제사회에서 핵무장 의혹을 받은 곳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한 것은 평북 영변에 지은 연구용 원자로가 1984년 가동을 시작하면서였다. 북한은 원자로에서 쓰고 난 핵연료를 재처리해 핵폭탄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공장도 지었다. 그러면서도 속셈을 감추기 위해 19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NPT 가입국은 18개월 이내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 협정을 체결하고 IAEA의 핵사찰을 받아야 하는데도 김일성은 IAEA와 핵안전 협정을 체결하지 않고 버텼다. 미국은 이런 북한이 의심스러워 1989년 1월부터 평북 영변의 의심 지역을 군사위성으로 정찰했다. 그러다가 영변에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재처리 시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1989년 7월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공표했다.
이후 북한은 밖으로는 미국과 핵 관련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안으로는 핵무장 능력을 조금씩 높여나갔다. 그런데도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1991년 9월 핵무기 감축을 선언, 주한미군에 배치된 전술핵을 남한에서 빼낼 준비를 했다. 노태우 대통령까지 1991년 11월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함에 따라 남북은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핵무기 시험·제조·접수·사용금지, 핵에너지 평화목적 이용, 핵재처리·농축시설 보유 금지, 핵통제 공동위 구성 등 6개항으로 구성된 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은 1992년 1월 IAEA와의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IAEA가 수차례 사찰을 실시해보니 핵무기 제조용 플루토늄이 수kg 정도 추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IAEA가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서 또다시 갈등이 불거졌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 제1차 북핵 위기를 촉발시켰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끌면서 핵개발을 하다가 불리할 것 같으면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가는 북한식 막가파 행동의 전형이었다.

▲ 북한의 핵실험장이 있는 함북 길주군 풍계리 지도
북한과 미국은 관련 회담을 1993년부터 1년 가까이 지속했으나 문제해결엔 실패했다. 1994년 6월에는 미국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는 계획까지 검토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1994년 6월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미국이 대북 핵공격을 하지 않고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IAEA의 영변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1994년 7월 돌연 사망하면서 협상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래도 미국과 북한 대표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 협상을 다시 시작해 10월 21일 합의를 도출했다.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면 그 대가로 미국과 한국이 북한에 100만㎾급 경수로 2기를 지어주고 중유를 제공하는 등 경제 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의 ‘제네바 합의’였다.
합의에 따라 북한은 1994년 11월 1일 핵 활동 동결을 선언하고 한·미·일은 경수로 건설을 담당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1995년 컨소시엄으로 설립했다. 북한은 1997년 10월 영변 원자로의 폐연료봉 8000여개를 봉인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의심 지역으로 지목된 양강도 금창리 지하시설을 1999년 사찰해 ‘이상 없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경수로 본공사가 2000년 2월 함경남도 신포에서 본격 시작되었다.
그러나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자 북한이 제네바 합의에서 규정한 중유 50만t 외에 추가 전력 보상을 요구했다. 미국이 추가 보상을 수용하지 않자 북한은 핵 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을 거부했다. 이로써 미·북관계는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더구나 북한이 2002년 10월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비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실토함으로써 제2차 북핵 위기가 촉발되었다.
KEDO는 이에 대한 항의로 2002년 11월 북핵의 즉각 포기를 요구하고 대북 중유 공급 중단을 결정했다.. 그러자 북한은 2002년 12월 “핵 동결 조치를 해제하고 전력 생산에 필요한 핵시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하겠다”고 선언한 뒤 8000여개의 폐연료봉,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 핵연료봉 제조공장 등에 설치되었던 봉인을 제거했다. 2003년 1월 10일에는 NPT 탈퇴를 재선언하고 10월 영변의 5㎿ 원자로를 재가동했다. 진짜 북핵 위기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자 북한의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자는 차원에서 한국·북한·미국·중국·러시아·일본이 참여하는 6자 회담이 마련되었다. 북한은 2003년 8월 시작된 6자 회담에 참여했으나 1년 반 쯤 지나 국제사회로부터 더 이상 얻을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2005년 2월 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6자 회담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 결과 2005년 9월 19일 6자 회담에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이른바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북한은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관계 정상화에 나선다는 게 골자였다. 그런데도 북한은 2006년 7월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지하에서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1차 핵실험을 강행해 한·미·일 3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래도 미국과 북한의 회담은 계속 이어져 2008년 5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면 북한이 24시간 내에 영변 5㎿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영변 5㎿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했다. 북한은 이미 불능화 조치가 완료되어 ‘콘크리트 껍데기’ 상태인 냉각탑을 끌어안고 있는 대신 화끈한 폭파 이벤트를 택함으로써, 비핵화와 미·북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선전하는 효과를 거뒀다. 미국은 약속에 따라 2008년 10월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그러나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함북 풍계리 지하 실험장에서 플루토늄을 원료로 한 3~4kt 이하의 2차 핵실험을 또다시 감행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2012년 4월 28살의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되면서 핵을 둘러싼 새 국면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취임 후 1년도 안되어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3차 핵실험에서는 플루토늄을 사용한 1, 2차 때와 달리 고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라늄은 플루토늄보다 핵물질 확보와 핵무기 개발이 쉬워 한·미·일 3국을 더욱 긴장시켰다. 북한은 2016년 1월 6일 풍계리에서 또다시 4차 핵실험을 감행한 뒤 수소탄 실험을 했다고 주장했다. 4차 핵실험 이후 8개월 만인 9월 9일 재개된 5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그때까지의 핵실험 중 가장 폭발력이 큰 10kt이었다. 5차 핵실험 후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했다면서 언제든지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2017년 9월 3일 6차 핵실험을 강행한 뒤에는 “대륙간탄도로켓(ICBM) 장착용 수소탄 시험을 성공적으로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폭발력은 기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이런 핵폭탄을 단거리용인 스커드와 중거리용인 노동미사일에 언제든 실어서 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핵 인질’ 상태로 전락했다. 북한이 ICBM까지 개발했으니 불안하기는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운보 김기창 그림, 국방부 청사에서 떼어져
국방부 청사 현관에 있던 운보 김기창 화백의 베트남 파병 전쟁 관련 그림이 서주석 국방 차관의 지시로 3월 16일 떼어졌다. 김 화백의 친일 전력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적영(敵影·적의 그림자)’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1972년 작으로 가로 2m·세로 3m 크기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 맹호부대가 치열하게 싸운 베트남 638고지 전투를 소재로 했다.… 김 화백이 일제강점기 때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강제징집을 부추기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논란이 일면서 10여 년 전부터 국방부에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조선일보 2018년 3월 17일)

▲ 김기창·박래현 부부
김기창(1913~2001)은 청각 장애를 딛고 피나는 노력으로 전통 회화를 현대 감각으로 계승·발전시켜 독보적 경지를 이룩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구상과 추상,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롭고 해학적인 화풍을 보여준 한국화의 거장이었다.
김기창은 서울에서 태어나 7세 때까지는 여느 집 아이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1920년 보통학교 입학 며칠후 장티푸스에 걸려 1년 동안 병마와 싸우다가 1921년 여름 청각 장애를 얻으면서 무거운 침묵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10세에 보통학교 1학년에 다시 입학했으나 선생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자 교과서 여백에 새, 꽃, 사람, 개 등을 그리며 정신적 혼란기를 버텨냈다. 당시 그의 유일한 구원자는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경기 개성에서 교사 경험이 있는 어머니였다. 한글, 한자, 산수를 가르친 것도 어머니였고 보통학교를 졸업한 1930년 겨울 김기창을 마지막 어진(御眞)화가이자 한국화의 대가 김은호의 휘하로 밀어넣은 것도 어머니였다.
김기창은 6개월 만인 1931년 5월 18세의 나이에 널뛰기를 소재로 한 ‘판상도무’를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출품해 입선함으로써 화단에 데뷔했다.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포(雲圃)’라는 아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1932년 10월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기창은 경제적·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으나 어려움 속에서도 1936년까지 선전에서 내리 입선을 하고 1937년의 선전에서는 ‘고담’으로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차지했다. 1938년에는 ‘여름날’로 총독상을 수상해 중진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김기창은 1939년(18회)과 1940년(19회) 선전에서도 연거푸 특선을 거머쥐어 이듬해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에게 여류 화가 박래현(1920~1976)이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1943년이었다. 그해 선전에서 ‘장(粧)’이란 작품으로 특선(총독상)한 박래현이 당시 선전의 추천작가이던 김기창이 나이 지긋한 노대가인 것으로 알고 인사차 김기창의 집을 불쑥 찾아온 것이다. 박래현은 생각지도 못한 미남 청년의 등장에 호감을 가졌고, 김기창은 박래현의 미모에 연정을 품었다. 당시 박래현은 경성여자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3년생이었다.
해방 후 미술계의 가장 절실한 과제는 일본색의 탈피와 민족미술의 건설이었다. 김기창에게도 해방은 화풍의 전환점이자 분기점이었다. 김기창이 자신의 그림에 원래의 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자에서 굴레를 벗는다는 의미로 ‘구(口)’자를 벗겨내고 그냥 ‘보(甫)’로 서명하기 시작한 것도 새로이 변신하겠다는 ‘탈각’의 상징적 의미였다. 구체적으로는 일체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고정관념에서 헤어나며 표현 양식 및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 의식에 철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김기창은 1946년 2월 17일 남산의 민속박물관에서 박래현과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결혼 전 약속대로 1947년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국내 최초로 첫 부부전시회를 열었다. 이후 두 사람의 부부 전시회는 1971년까지 17회나 계속되었다.
박래현은 남편과의 대화를 ‘구화(口話)’로 바꾸기 위해 김기창에게 말을 가르쳤다. 박래현은 일부러 부부 싸움을 걸기도 했다. 그 덕에 김기창은 아내의 입 모양을 보며 말을 배울 수 있었고 어눌하나마 말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김기창은 1947년 자유신문사의 문화부 촉탁기자로 활동했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마지막 귀머거리 기자 생활은 2년 동안 이어졌다. 김기창은 6·25가 한창이던 1951년부터 이듬해까지 피란지 전북 군산에서 30점의 연작으로 된 ‘예수의 생애’를 완성했다. 그런데 그림은 예수가 처한 시대와 환경을 2000년 전의 팔레스타인으로 설정하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화폭에 등장한 인물은 모두 한복을 입고 있었고 배경은 조선시대의 우리 땅이었다.
1952년에는 전통적인 동양화의 조형 개념에서 탈피해 한국화에 입체주의의 기법을 도입한 ‘구멍가게’, ‘노점’, ‘복덕방’ 등 일련의 작품을 선보였다. 1955년에는 대작 ‘군마도’를 비롯해 가면극을 소재로 한 ‘탈춤’ 시리즈와 문자도(文字圖)를 그리기 시작했다. 1955년 홍익대 미대 강사로 부임, 10년 동안 재직하다가 수도여사대 정교수로 자리를 옮겨 1974년 은퇴했다.
박래현은 김기창을 벗어나 1968년부터 홀로 미국에서 그림을 그렸다. 간암에 걸려 1975년 11월 귀국했다가 1976년 1월 2일 눈을 감았다. 박래현의 죽음은 김기창에게 청각 장애 못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 실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김기창은 ‘바보 산수’를 시도했다. 김기창은 민화를 자신의 방법으로 변형해내는 일련의 작화를 ‘바보 산수’라는 유머러스한 개념으로 명명했다.
‘바보 산수’는 호방한 필치와 조형 감각, 그리고 파격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김기창 특유의 힘의 미학이 명쾌하게 반영되고 있는 새로운 표현 기법이었다. 김기창은 초상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975년 1만 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김기창의 세종대왕 초상은 지금도 1만 원권 지폐에 그대로 살아 있으며 이 세종대왕을 비롯해 을지문덕, 태종 무열왕 등 6명의 초상은 문화관광부에 의해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김기창에게는 친일화가란 ‘업’이 따라다닌다. 반도총후미술전(1942-1944)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된 것을 비롯해 1943년 8월 7일자 매일신보의 컬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 실린 삽화, 1944년 4월 식산은행 사보 ‘회심’에 실린 ‘총후병사’, 1944년 3월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결전 미술전’에 출품했다가 어린이 잡지 ‘소국민’ 1944년 5월호에 실린 ‘적진육박’ 등이 친일 활동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창은 훗날 “사상적인 친일 활동은 하지 않았다.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며 용서를 구했다. NM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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