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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갈대의 순정’의 작곡가 오민우의 삶과 노래
흔들리지 않는 ‘갈대의 순정’, 그 ‘중도(中道)의 미학’
2018년 04월 02일 (월) 22:53:49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작곡은 물론 연주, 음반사 문예부장, 음악학원 강사 그리고 각 친목단체 활동까지, 가요인물이 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에 참여해온 작곡가 오민우(본명 차상용, 83세)씨, 가장 최근 한국가요예술작가동지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특히 부지런한 인물로 기억된다.
어려운 시대를 겪어오면서도 지나치게 강하지 않게, 동시에 너무 옅지도 않게 지켜온 그의 ‘중용(中庸)’은 어느 자리에서나 잘 어울린다.
‘갈대의 순정’, ‘미워하지 않으리’의 작곡가 오민우의 삶과 노래 이야기.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멈추지 않은 창작열, 마음은 늘 ‘초심’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말아라/아-- 아--- 갈대의 순정.

말없이 보낸 여인이 눈물을 아랴/가슴을 파고드는 갈대의 순정/못 잊어 우는 것은 사나이 마음/울지를 말아라/아-- 아--- 갈대의 순정. -갈대의 순정(전세일 작사, 오민우 작곡, 박일남 노래)

‘갈대의 순정’의 작곡가 오민우 선생의 활동 기록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인이 하고자하는 의지대로 원하는 음악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50년대 중반부터 음악을 꿈꿔온 오민우 선생.

그의 음악활동에는 출발 지점부터 단짝인 가수 신해성씨가 등장한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둘은 말 그대로 죽이 맞는 아삼륙(亞三六)이다. 가수와 작곡가로, 혹은 작사가와 작곡가로 콤비를 이루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저 기타 치는 게 좋아 한 사람은 콩쿠르 무대에 반주자로, 또 한 사람은 가수 지망생으로 나섰고 대학시절 방학 기간 동안 경험을 쌓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악극단을 따라나섰다가 결국 세 차례 시도 끝에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고 동시에 예기치 못한 좌절을 겪기도 했다. 가까스로 취입까지 마친 첫 작업은 대중성이 없다는 이유로 음반화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최근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외출을 삼가기 전인 10여 년까지도 그는 작곡활동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신해성씨와 콤비를 이뤄 만든 ‘서울에서 진주, 서귀포까지(남광호, 2006년)’, 반야월 작사의 ‘통일열차(배남수, 1993년)’를 비롯, ‘날개 젖은 사랑(리화, 2002년)’, ‘찜해서 찜했지(정일)’ 등이 그 것. 이미 70대 중반의 원로작곡가였지만 옆에서 본 그에게선 늘 ‘초심’이 느껴졌다.

낭랑악극단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 시작

본명 차상용(車相龍), 1935년 10월 16일, 부친 차종채(車鍾彩)씨와  모친 오후덕(吳厚德)씨 사이의 1남 6녀 중 외아들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여섯 여동생 중 넷째가 미8군쇼에서 하니비시스터즈 멤버로 활동을 시작, 일본에서 활동했던 차유나(본명 차은숙)씨다.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에 가족 모두 월남, 광주를 거쳐 화순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곡창지대, 김제로 이사해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한다. 현재 ‘남인수기념사업회장’이기도 한 신해성씨가 바로 이때 만난 동창친구다.

이후 이리 동중(中), 이리공고를 거친 그는 홍익대 법대 1학년 때 6인조 그룹사운드를 결성, 피아니스트로 김포 미8군 비행기부대 내 ‘미군사병구락부’에서 재즈와 팝을 연주했다.

1955년 여름방학 때, 김제에서 만난 친구 신해성은 방학 기간 동안 공짜로 전국여행을 하며 음악 경험을 쌓자고 제안, 마침 공연 차 김제에 온 낭랑악극단(단장 김성택)을 찾아간다. 해방 후 ‘문공부 등록 1호 악극단’이기도 했던 ‘낭랑’은 ‘서라벌악극단(단장 김봉명)’과 더불어 지방공연에서 가장 인기 있던 단체였다. 둘은 단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가 단장의 동생인 김정택 악단장에게 테스트를 받고 곧바로 순회공연에 합류해 기타리스트로, 가수로 각각 무대에 올랐다.

아르바이트 신인이라 먹고 재워주는 것이 대우의 전부였지만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공연 전 동네를 돌며 쇼를 선전하는, 일명 ‘마찌 마와리(町回, 거리돌기)’를 하고 돌아오면 극장 측에서 수고비로 약 250환 정도의 돈을 주었다.

본래 음악에 뜻을 두고 있었던 그는 기타리스트로써 뿐 아니라 편곡은 물론 새롭게 무대에 올리는 악극의 주제가 작곡에까지 손을 댔다. 정현 작의 ‘고향은 구만리’, 그리고 뮤지컬 ‘아빠는 우편배달부’가 바로 그가 주제가를 직접 쓴 악극들이다.

이때 문제가 발생한다. 어느 덧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악극단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를 막았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악극에 사용할 노래를 작곡, 편곡까지 다 해주니 당당 쓸 만 했다고 판단했던 것.

결국 악극단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도망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빠져나갈 곳이 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 밖에 없는지라 매번 꼼짝없이 붙잡혔다.

이렇게 2~3달이 지나면서부터 악극단 측에서 매달 18K 금반지 2돈 짜리를 손에 쥐어 주었다. 도망하지 않도록 현금 대신 준, 일종의 월급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모은 것이 총 4돈. 결국 이것을 팔아 도망비용으로 사용했다.

미리 표를 사놓고 대구역으로 향했던 그는 잠복하고 있던 멤버에게 발각되었지만 차표가 없는 그들을 제치고 재빨리 기차에 올라 도망에 성공했다. 학교는 이미 세 학기가 지나가고 있었고 3학년 때 들어 고등고시에도 두 차례나 응시했지만 모두 고배를 맛보았다.

미군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 편곡작업 시작

결국 가을학기에 졸업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다시 음악 활동을 결심, 미8군쇼의 베니김, 김영순(당시 그는 ‘쬬비김’이라고 불렀다)단장에게 발탁된 뒤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무렵 엘비스 프레슬리가 등장, ‘록 앤 롤’이 대세를 이루자 기타리스트로 전향한다. 이어 60년, 4.19가 나던 해 서울로 올라와 8인조 ‘김형광 악단’에 들어가면서 캬바레 음악을 시작했다.

이 무렵 연주자로써 편곡실력을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도미도레코드 한복남씨로부터 편곡이 맡겨졌다. 이때 편곡한 작품들이 '포에 프리마(송민도)‘를 비롯해 ‘양산도 맘보(황금심)’, ‘아리랑 맘보(김정구)’, ‘맘보타령(한복남)’ 등 40~50여 편.

무명신인에게 편곡 일이 맡겨지는 것이 거의 처음이었던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교분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다보면 언젠가는 창작곡 음반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고 한 작품, 한 작품 최선을 다했다. 당시는 실력과 재력이 어느 정도 있다 해도 음반을 내기란 결코 쉽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1958년, 이때 만든 곡이 고향의 폐허가 된 것을 노래한 ‘귀향’. 이미 데뷔곡 ‘여인우정’으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신해성의 목소리로 어렵게 취입까지 마쳤으나 정작 음반은 나오지 못했다. 느린 왈츠 풍이라 음반사 측에서는 대중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예명 오민우 사용, ‘처녀별’로 작곡 데뷔

이후 첫 음반은 59년에 발표했다. 처녀작은 은방울 자매의 ‘큰 방울’ 박애경씨가 취입한 ‘처녀별’. 이때 지은 예명이 ‘오민우(吳民雨)’다. 앞으로 판, 검사가 될 거라며 동생들이 예명을 권유, 어머니 성씨를 따라 지은 이름이다. 아울러 문소운(文昭雲)이라는 예명도 잠깐 사용했다.

그는 다양한 음악을 시도한다. 음반사의 권유와 대중들의 취향,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음악들이 제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만든 음악은 특정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이태리 영화 ‘형사’의 주제가인 ‘시노 메 모로(sinno me moro)’의 번안곡 ‘죽도록 사랑하여(1959년)’를 송민도의 목소리로 발표했고 이어 ‘뉴욕의 아가씨(박재란, 1963년)’, ‘버들피리 풀피리(최숙자, 1963년)’, ‘무너진 여인탑(신해성, 1963년)’, ‘연락선 부르스(안정애, 1963년)’, ‘돌아오라 카츄샤(남일해, 1964년)’, ‘초립동(최숙자, 1964년)’, ‘뒷골목 청춘(남미랑 1965년)’, ‘항구의 사나이(최갑석, 1965년)’, ‘움켜진 십년탑(일명 구두닦이 이십년, 김광남 1965년)’ 등을 발표하며 작곡가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할 즈음 신인가수 정원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본인이 꼭 부르고 싶은 노래라며 어떤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다. 이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기 위해 작사가 전우씨를 찾아가 술까지 사주며 어렵게 노랫말을 받았다. 이 노래가 ‘허무한 마음’이다.

마른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지난 가을날/사무치는 그리움만 남겨놓고 가버린 사람/다시 또 쓸쓸히 낙엽은 지고/찬서리 기러기 울며 나는데/돌아온단 그 사람은 소식 없어 허무한 마음. -허무한 마음 (전우 작사, 오민우 편곡, 정원 노래)

‘허무한 마음’의 정원과 함께 찾아온 전성기

65년 발표된 이 노래로 정원은 스타덤에 오른다. 반주는 미8군에서 활동하던 4인조 그룹 샤우터스가 맡았다. ‘Hound Dog’를 번안한 ‘사냥개’, ‘홧 아이 세이’ 등을 수록한 번안곡 위주로 구성된 이 음반은 ‘록과 트위스트 템포의 경쾌하고 새로운 리듬’으로 소개되며 대히트했다. 이후 정원은 극장쇼에서 빠지면 안 되는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어진 후속타가 ‘미워하지 않으리’다.

목숨 걸고 쌓아올린 사나이의 첫사랑/그라스에 아롱진 그 님의 얼굴/피보다 진한 사랑 여자는 모르리라/눈물을 삼키며 미워하지 않으리.
피에 맺힌 애원도 몸부림을 쳐봐도/한번가신 그 님이 다시 올소냐/사나이 붉은 순정 그 님은 모르리라/입술을 깨물며 미워하지 않으리. -미워하지 않으리(오민우 작사, 작곡, 정원 노래)

스타덤에 오른 가수 정원을 위해 세 번 째로 준비한 노래가 ‘갈대의 순정’ 이었다. 이 노래를 듣고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은 오민우씨에게 ‘전세일(全世一)’이란 예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 이름은 ‘전 세계에서 노래를 제일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 그러나 이때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킹레코드사 전속이었던 정원이 지구레코드사로 스카우트된 것. 당시 지구는 오아시스와 함께 레코드계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정원이 거액을 받고 지구로 스카우트되면서 결국 킹박(킹레코드 박성배사장을 부르는 애칭)으로서는 달러박스 하나를 놓친 셈이었다.

“결국 ‘갈대의 순정’의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지요. 당시 신인발굴의 거장이라 불리던 킹박이 신인보는 안목을 살려 박일남을 발굴해냈죠. 박일남은 저음이었지만 힘 있는 기교는 물론 음역대, 즉 음폭이 넓어서 곡을 자유자재로 부르는 가수였어요. 이 특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4마디를 개작했죠.”

박일남의 ‘갈대의 순정’이 세상에 나오게 된 에피소드다. 박일남은 가수 김광남과 작곡가 김종한 씨를 통해서 소개받았다고 기억했다.

“가수 정원은 생전에 때때로 이런 말을 하곤 했어요. ‘그 때 제가 지구로 전속을 옮기지 않았더라면 ‘갈대의 순정’은 내 노래가 되었을 텐데 지구로 옮기는 바람에 평생의 레퍼토리 곡을 잃어버렸습니다...’라고.” 

그러면서 덧붙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운명이 있고 숙명이 있다고. 운명이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라 잘 하면 피할 수 있지만 숙명이란 뒤에서 날아오는 돌 같아서 피할 수가 없다고...

라이브 위주 가수들과 함께 서구음악으로 선회하다

이를 기해 오민우 음악은 새로운 분기점을 마련한다. 젊은 가수들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인 음악을 시도한 것.

‘바람아 불어다오(이태신, 1966년)’, ‘고고 춤을 춥시다(쟈니리, 1966년)’, ‘기다리는 마음(성태미, 1967년)’, ‘가버린 사람(이찬, 1967년)’, ‘그녀는 말괄량이(토니권, 1967년)’, ‘여보 김서방(이태신, 1968년)’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계속해서 ‘사랑의 그림자(박일남, 1965년)’, ‘골목길 그 처녀(위키리, 1967년)’, ‘고항 땅의 어머니(박일남, 1968년)’, ‘서울 가는 삼돌이(김상희, 1969년)’, ‘당신과 라면(리타김, 1970년), ‘여심(김상희, 1970년)’ 등 음반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오민우씨를 통해 데뷔한 가수들도 많다. 가수 송춘희는 그의 작품 ‘삼다도 편지’를, 이찬은 ‘가버린 사람’을, 아리랑브라더스는 ‘우리 애인 미스 얌체’를, 토니권은 ‘그녀는 말괄량이’를 첫 취입하며 데뷔했다. 그와 아삼륙인 친구 신해성씨 또한 그의 멜로디에 노랫말을 도왔다.


오민우 영화음악들과 금지곡 ‘용꿈’에 대한 기억

이 무렵 뉴킹스타레코드(사장 김철주) 문예부장으로 입사함과 동시에 영화음악도 맡았다. 영화 ‘영광의 블루스(남일해, 65년)’를 시작으로 1966년에 제작된 윤성환 감독의 영화 ‘섬색시(이지연, 66년)’는 김지미, 신성일, 김승호 등이 열연했다. ‘여비서(성태미, 67년)’, ‘용꿈(이금희, 67년)’, ‘내가 버린 여자(남일해)’ 그리고 나화랑씨의 곡인 ‘이정표’를 테마로 영화화되었을 때 주제가 ‘찾아가는 고향길(이정표, 남일해, 65년)‘ 또한 그가 맡았다.

갑자기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 ‘용꿈(이금희, 1967년)’에 대한 일화도 생생히 기억해냈다.
“정초 때 용꿈들 꾸라고 자주 틀어주던 노래 ‘용꿈’은 뒤늦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어요. 노랫말 중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한 고위층을 빗댄 빈정거림으로 과잉 해석되어 결국 방송금지와 함께 작사가 김문응씨가 수배되는 어이없는 일까지 발생했지요.”
작곡가 겸 연주가인 그는 ‘오민우 악단’을 설립, 활동하던 중 78년부터 약 1년 반 동안 동양TV의 전속, TBC-C악단을 맡아 활동했다. 당시 12인조 C악단은 주로 전방 위문공연이나 ‘노래하는 팔도강산’같은 공개방송 등을 주로 담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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