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진과 뮤지컬 ‘명성황후’
뮤지컬 제작·연출자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는 “머릿속에 작품이 줄을 서 있다”는 사람이다. ‘명성황후’와 ‘영웅’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새 장을 열었던 그가 이번엔 ‘글로벌’ 색채 강한 작품을 들고 나왔다.

▲ 윤호진

10월 9일부터 한 달 동안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창작뮤지컬 ‘보이첵’이다. 서울 오금동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2003년 ‘명성황후’ 북미 공연을 하면서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만든 한국어 뮤지컬로는 해외시장 공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보이첵’은 출발부터 세계 시장을 염두에 뒀다. 해외 제작진을 뽑아 대본과 가사를 영어로 먼저 썼다. 이번 공연은 한국어로 번역·각색해 펼친다. 뮤지컬 넘버 작곡은 영국의 언더그라운드 밴드 ‘싱잉 로인즈’가 맡았다. 작품 선정 후 무대에 올리기까지 꼬박 8년이 걸렸다. <중앙일보 2014년 9월 18일>

한국의 광복절이던 1997년 8월 15일 저녁. 유엔 외교사절과 교포 2,500명이 뉴욕 브로드웨이 64번가 링컨센터 뉴욕 스테이트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을 맞은 것은 뮤지컬 ‘명성황후’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영상으로 시작된 공연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재판이 열린 히로시마 법정으로 이어지는 순간 객석이 조용해졌다. 일본의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장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명성황후 역의 김원정은 시종 당당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시해당한 명성황후가 흰 비단 옷차림으로 앞서고, 쓰러졌던 조선 백성들이 일어서 걸어나오는 대합창의 피날레 ‘백성이여 일어나라’가 끝나고 막이 내렸을 때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8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마침내 우리가 만든 우리말 뮤지컬이 사상 처음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 것이다.
8월 15일부터 24일까지 계속된 12회 공연에서 객석을 채운 관객은 2만 5,000명이었다. 그 가운데 40%는 교포가 아닌 미국인이었다. 공연 성공의 분수령은 까다롭기로 유명한 8월 21일자 뉴욕타임스 리뷰였다. “정말 볼 만한 뮤지컬”,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 같은 조명과 무대 세트, 화려한 의상으로 관객들 매료”라는 찬사가 실린 그날부터 2,800석 전석이 매진되어 공연팀을 흥분시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하늘이 놀랄 일이고 용감한 도전”이었다며 “내 박수 소리가 제일 작았다”고 했다.
이처럼 호평을 받으며 68만 달러(5억 4,000만 원)의 티켓 매출을 기록했으나 170만 달러의 제작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해 수지는 적자였다. 공연 기간이 9일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예상한 결과였다. 그러나 뉴욕 공연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우리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명성황후'를 연출한 윤호진(1948~ )이 브로드웨이 입성을 꿈꾼 것은 30대 후반에 시작한 미국 유학 때였다. 그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84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뉴욕 브루클린 슬럼가에 좌판을 차려놓고 시계 행상으로 돈을 벌어 학비에 보탠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1987년 윤호진은 4년간의 뉴욕대 대학원 생활을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며 “내 손으로 만든 뮤지컬을 들고 브로드웨이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1991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을 창단하고 1994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을 무대에 올려 한국 뮤지컬의 가능성을 선보였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뮤지컬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우리나라 뮤지컬 시대의 신호탄이었으며 윤호진에게는 ‘명성황후’를 제작할 수 있는 종잣돈(5억 원) 역할을 했다.

좋은 작품에는 문화 장벽 없이 관객이 몰린다는 평범한 진리가 확인된 것
윤호진은 명성황후 시해 100주년이 되는 1995년에 맞춰 뮤지컬을 준비했다. 대본은 이미 소설 ‘사람의 아들’의 연극화로 신뢰를 쌓은 원작자 이문열에게 의뢰했다. 작곡은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의 작곡가 클로드미셸 쇤베르에게, 의상은 한국계 윌라 김에게 의뢰하는 등 국제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하지만 출연할 배우도 12억 원의 총제작비도 부족했다. 결국 쇤베르와 윌라 김은 포기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이문열이 쓴 ‘여우사냥’을 원작으로 연출가 김광림이 각색하고 김희갑?양인자 부부가 작곡?작사를 맡는 등 순 우리 손으로 제작했으니 순수 국산품이 된 것이다. 다만 세계적인 음악의 흐름을 타야 했기에 편곡만은 호주의 피터 케이시에게 맡겼다.
출연진과 스태프 역시 당대 연극계와 뮤지컬계의 1인자들이었다. 명성황후 역은 최고 연극배우 윤석화가 맡았다. 서병구(안무), 김현숙(의상), 박동우(무대), 최형오(조명)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무대 뒤에서 최고 수준을 뽐냈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결국 오프닝으로 잡은 1995년 10월 8일을 넘겨 12월 30일에야 막을 올렸다. ‘명성황후’는 첫 공연부터 관객을 매료시켰다. 4년간의 기획과 2년간의 준비 과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윤석화는 역시 최고였다. 정확한 가사 전달과 노래 솜씨가 일품이었다. 1996년 1월 9일까지 열흘간 3만 5,000여 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1월 11일부터 14일까지 10회 연장 공연을 하고 4월 16일~24일 재공연을 했다. 관객의 호응 덕에 윤호진은 제작비 12억 원을 모두 뽑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10년 이상 꿈꿔온 브로드웨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국 창작 뮤지컬 사상 첫 시도였다.
제작비가 여전히 부족했으나 윤호진은 “뗏목을 타고라도 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공연 한 달 전까지도 계약금을 지불하지 못했으나 김영환 에이콤 후원회장이 윤호진만을 믿고 집을 담보로 잡혀 제작비를 지원해주었다.
돈 문제 말고도 어려움은 또 있었다. 뉴욕 공연에 맞춰 새 명성황후 역을 물색하면서 윤석화와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윤석화는 “캐스팅 변경은 서로 합의해 결정하고 브로드웨이 공연도 함께 사전 협의해 추진한다”고 1996년 1월에 작성한 ‘합의 각서’를 내밀었다. 1997년 5월엔 “나와 상의하지 않은 캐스팅 변경과 브로드웨이 공연은 계약위반”이라며 윤호진을 고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과거 ‘신의 아그네스’ 때 주연과 연출가로 만난 이래 ‘아가씨와 건달들’, ‘명성황후’까지 화제작을 엮어낸 환상의 콤비였다. 결국 윤호진이 “상처를 줘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윤석화가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사태는 봉합되었다.

우리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
뉴욕 공연에는 줄리아드 음악학교 출신의 김원정과 이태원이 더블 캐스팅되었다. 이후에도 국내 공연에 출연한 3명의 배우까지 포함하면 총 6명이 명성황후 역을 맡았지만 지존은 단연 재미교포 이태원이었다. 이태원은 1996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왕과 나’로 데뷔해 왕비 역을 2년 동안 맡았던 실력파 배우였다. 어느 날 ‘명성황후’ 제작사인 에이콤이 미국 현지에서 ‘먹힐’ 배우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에이콤에 전화를 걸어 “나를 한번 써보라”고 저돌적인 제의를 하면서 명성황후와 인연이 맺어졌다. 이태원은 이후 14년 동안 ‘명성황후’에 출연, ‘명성황후의 대명사이자 아이콘’으로 불리다가 2010년 9월 19일 무대를 마지막으로 명성황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명성황후’는 2002년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도전할 때 영어 버전을 시도했다. 한국 뮤지컬이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것도 처음이었고 영어로 공연한 것도 처음이었다. 런던 외곽의 해머스미스 아폴로 극장에서 개막된 2월 1일의 첫날 공연에 3,000여 객석의 절반 정도가 비고, 영국인들의 편견이 섞인 평론으로 스태프들의 힘이 빠지긴 했으나 현지 주요 언론과 공연 전문가들은 한국 뮤지컬의 연출력과 장대한 무대, 그리고 이태원을 비롯한 전 배우들의 가창력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공연은 2월 16일 성황리에 마쳤다. 런던의 19회 공연에서 얻은 7억 원의 판매 수익 대부분이 1만 5,000여 명의 영국인이라는 점에서는 성공적이긴 했으나 역시 적자는 면치 못했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단련된 ‘명성황후’는 자신감을 갖고 세계 무대 공략에 나섰다. 2004년 캐나다 공연에서는 “이태원은 생명과 바꿀 만한 목소리와 강렬한 연기로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는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3억 5,00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남겼다.
‘명성황후’는 2007년 3월 1일 국내 뮤지컬 사상 첫 100만 명 돌파를 기록했다. 그동안 전 세계 28개 도시의 공연까지 합쳐 6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좋은 작품에는 문화 장벽 없이 관객이 몰린다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진리가 확인된 것이다. ‘명성황후’는 또한 2009년 10월 8일 일본 구마모토현 가쿠엔대 공연장에서 역사적인 특별공연을 펼쳤다. 이날은 114년 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날로, 구마모토현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48명 중 21명의 고향이었다.

■김용환과 만화 ‘코주부 삼국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는 김용환 만화가의 ‘코주부 삼국지’가 문화재로 등재됐다고 9월 3일 밝혔다. 만화가 문화재로 등재된 것은 ‘토끼와 원숭이’(김용환), ‘엄마 찾아 삼만리’(김종래), ‘고바우 영감’(김성환)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등록문화재 605호로 지정된 ‘코주부 삼국지’는 한국 만화의 근대와 현대를 잇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작으로,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창간된 잡지 ‘학원’에 2년 반에 걸쳐 인기리에 연재됐다. 1953년부터 해마다 1권씩 총 3권이 출간됐다. <한겨레 2014년 9월 4일>

▲ 김용환

김용환(1912~1998)이 만화가로 한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1945년부터 1959년까지 14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는 초창기 한국 만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1세대 만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남 진해에서 태어나 동래고보를 졸업한 김용환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930년이었다.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1934년 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일본 소년' 잡지에 ‘기타고지’라는 필명으로 만화를 그렸다.

두툼하고 큼지막한 코에 둥그스름한 얼굴, 그리고 친근한 미소를 가진 ‘코주부’가 등장한 것은 1942년 순한글 주간신문 ‘동경조선민보’였다. 코주부는 이후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도 주어진 삶의 조건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1995년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와 함께 우리나라 첫 만화우표로 발매될 만큼 코주부는 우리 만화의 대표 브랜드로 인정을 받았다.

 1945년 해방을 수개월 앞둔 시점에 김용환은 일본 고단샤의 서울 편집실 촉탁사원으로 발령받아 ‘연성지우’라는 일본어 잡지의 한국판을 발행했다. 잡지는 강제 징병된 한국인 청년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활동은 김용환이 일제의 전쟁을 지원 독려했다는 친일의 굴레로 작용했다.
해방이 되자 김용환은 1945년 9월 창간한 영자신문 ‘서울 타임스’에 코주부와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1945년 11월 창간된 중앙신문에도 정치만화를 그렸는데, 당시 중앙신문은 좌익신문이었기 때문에 김용환의 만화 역시 좌익적 시각을 띠었다.

‘코주부’는 서민을 대표하는 캐릭터
김용환은 정밀한 펜 터치의 삽화는 물론 동양화풍의 붓 그림, 만화체 선화 등에 고루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우리나라 단행본 만화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32쪽짜리 ‘토끼와 원숭이’(1946), ‘똘똘이의 모험’(1947) 등도 늘 인기가 높았다. 1947년 한국 최초의 만화잡지인 ‘만화행진’을 만들고, 1949년 4쪽짜리 주간 만화잡지 ‘만화뉴스’를 창간했다. ‘만화뉴스’는 평소 1만~2만 부가 팔리는 것은 기본이고 잘 나갈 때는 4만 5,000부라는 경이적인 발행부수를 자랑했다.

▲ '코주부삼국지'표지

6.25가 일어나기 전 좌익 검거 선풍이 불었을 때, 김용환은 좌익 전력 때문에 한 차례 체포되었으나 이미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터라 극적으로 풀려났다. 보도연맹은 1949년 좌익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다. 6?25 때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남로당 경력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북한의 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 미술동맹에 소속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김일성에게 쫓겨 부산 앞바다에 빠지는 그림 등 선전만화를 그리는 부역활동을 했다.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는 또다시 대한민국 정부에 자수하며 살길을 도모했다. 광복 후 벌써 세 번째 자수였다.

2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갇혀 있던 김용환은 다행히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육군본부 작전과에서 반공만화를 그렸다. 이번에는 김일성이 이승만에게 쫓겨 압록강에 빠지는 그림을 그렸다. 운이 좋았는지 눈치가 빨랐는지 어쨌든 김용환은 이렇게 격랑 속을 헤쳐나갔다.
1952년 11월부터 1955년 3월까지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학원’지에 ‘코주부 삼국지’를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의 역사 소재 만화 대부분이 한 칸을 반으로 나누어 깨알 같은 고어체 지문과 설명으로 채워 넣은 '그림 소설'인데 비해 '코주부 삼국지'는 등장인물이 '말풍선' 속의 대화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근대적 만화 형태를 띠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당시 예술인 가운데 가장 돈 많이 벌어
당시 중고생의 대부분은 이처럼 글이 아니라 캐릭터의 표정, 동작, 말투가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한 ‘코주부 삼국지’를 보며 성장했다. 소설가 황석영이 처음 접한 ‘삼국지’도, 만화가 허영만이 처음 본 만화도 바로 ‘코주부 삼국지’였다. 김용환은 1953년 8월 창간된 ‘코리안 리퍼블릭’에도 코주부 만화와 시사만화를 연재했다.
김용환은 예술인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1955년 발간된 시사월간지 '청춘'지 10월호에 따르면 당시 현역 예술인 500명 중 김용환이 가장 수입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1959년, 김용환은 미 태평양사령부 심리전과의 전속화가가 되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1972년까지 유엔군 홍보잡지인 ‘자유의 벗’에 앞뒤 표지화, 내용물 삽화 등을 그리는 것을 비롯해 숱한 삽화와 포스터를 제작했다.
1973년에는 새로 창간된 민단 계열의 통일일보에서 만화와 삽화를 그리는 한편 한국의 역사와 풍속에 관련된 일러스트 작업을 병행했다. ‘이순신 장군의 귀갑선 해전기’(1973, 도쿄), ‘한국의 민화’(1980, 도쿄), ‘그림한국사’(1987, 계몽사), ‘한국의 풍속화’(1988, 민문고) 등의 저작물을 출판했다.
김용환은 만화가, 삽화가, 유화가 중 유화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가 그린 유화 ‘명량해전도’(1980)가 지금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걸려있고, 개인전을 두 차례나 연 중견화가인데도 만화가로만 불리는 게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1993년 제자 이원수에게 코주부의 창작권을 넘겨주고 1995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가 1998년 1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86세로 눈을 감았다.

■키프로스 분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9월 1일 취임 뒤 첫 해외 방문지로 북키프로스를 찾아 터키계 주민들의 권리 보호를 강조했다. 분단국가인 키프로스는 북쪽의 터키계, 남쪽의 그리스계가 각각 정부를 세워 대립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하면서 러시아계 주민 보호 명분을 내세웠던 것과 비슷하다. 서방의 주요 외신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을 ‘터키의 푸틴’이라 부르며 주목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북키프로스가 남키프로스와 동등한 국가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어떠한 통일 논의도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사실상 통일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이 때문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키프로스의 통일보다는 북키프로스의 합병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9월 3일>

▲ 키프로스 분단 상황

지중해 동남쪽에 위치한 키프로스는, 거리상으로는 터키에 가까워도 주변의 섬 대부분을 그리스가 영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해상으로는 그리스에 가깝다. 역사적으로는 그리스,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오스만 투르크, 영국 등 지중해를 장악했던 여러 세력들로부터 번갈아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수 주민은 늘 그리스계 민족이었다.
그런데도 터키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1571년부터 시작된 오스만 투르크의 키프로스 지배 때문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는 동안 키프로스로 이주한 터키인들은 키프로스 전체 인구의 18%나 될 정도로 많았다. 이게 분쟁의 씨앗이었다.
쇠퇴하는 오스만 투르크를 대신해 키프로스를 지배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878년 오스만 제국과 임차협정을 체결해 키프로스의 지배권을 넘겨받았다. 1차대전 후에는 로잔조약(1923년)에 따라 패전국인 터키로부터 키프로스의 주권을 넘겨받아 보호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영국은 1930년대 들어 그리스계 주민들이 키프로스의 그리스 복귀를 노리는 ‘에노시스 운동’을 벌여 골머리를 앓았다.
2차대전 후에도 영국의 키프로스 지배에 변함이 없자 키프로스의 반영(反英) 운동이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터키계는 자칫 키프로스가 그리스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키프로스의 분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처럼 섬을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의 대립으로 양국 간의 감정이 점점 격화되자 영국과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과 영국이 가장 우려한 것은 그리스와 터키 모두 속해 있는 반공 군사동맹의 분열이었다. 그래서 1959년 2월 영국, 그리스, 터키, 키프로스 대표가 만나 권력 분점을 전제로 한 ‘키프로스 독립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대통령은 그리스계, 부통령은 터키계에서 선출하고 내각과 의회도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7대 3의 비율로 구성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터키계는 북부 지역의 분리와 자치 요구
헌법에 따라 1960년 8월 16일 그리스계 마카리오스 대주교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독립국가 ‘키프로스 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1963년 마카리오스 대통령이 터키계 주민의 권리 제한을 노린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터키계가 이에 강력 반발하면서 키프로스에는 또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국 키프로스에 살고 있는 그리스계와 터키계가 무력 충돌하고, 그리스와 터키의 본토 군대까지 키프로스로 투입되는 내전 양상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리스와 터키, 영국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1963년 12월 유혈 충돌을 중단하기로 합의하고 1964년 유엔 평화유지군의 키프로스 주둔을 허용했다. 그러나 한 지붕 두 가족의 근본적인 불화가 해결되지 않는 한 평화는 요원했다. 그리스계 주민은 계속 그리스와의 통합을 도모한 반면 터키계 주민은 키프로스 북부 지역의 분리와 자치를 요구했다.
잠복해 있던 갈등이 폭발한 것은 1974년이었다. 7월 15일 키프로스 내 그리스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카리오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친그리스 군사정권을 세우자 터키가 이슬람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4만 명의 군대를 파견해 북부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쿠데타는 유엔과 유럽 각국의 반대로 1주일 만에 실패로 끝이 났으나 터키군은 키프로스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았다. 그리스, 터키, 영국 3국이 터키군 철수를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터키가 터키계 주민의 자치를 전제로 한 ‘키프로스 연방국가’ 창설을 고집해 결렬되었다.
터키는 한술 더 떠 1975년 ‘그린 라인’(남북 분리선) 북부의 상당 지역을 장악한 뒤 ‘터키계 키프로스 연방’을 선포했다. 18%에 불과한 터키계 주민들이 키프로스 땅의 34%를 차지한 가운데 2만 명의 터키계 주민은 ‘그린 라인’ 북쪽으로, 20만 명의 그리스계 주민은 남쪽으로 쫓겨갔다. 이후에도 터키 본토로부터 이주한 16만 명이 북키프로스에 정착했다.

1974년부터 지금까지 분단 국가
1983년 유엔이 그리스계의 요청을 받아 터키군의 철수를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나 터키계는 오히려 1983년 11월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며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유엔은 이후에도 그리스계 주민의 귀향을 허용하고 터키 군대의 키프로스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75차례나 통과시켰다. 그래도 터키는 점령을 계속하고 있다.
터키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그리스계와 ‘키프로스 연방’을 주장하는 터키계가 좀처럼 화합점을 찾지 못하자 2002년 유엔 사무총장이 ‘유럽연합 동시 가입 허용’을 조건으로 스위스식 연방국가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정부는 국방과 외교를 관장하되 남북의 각 주정부가 자치권을 유지한다는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였다.
하지만 2004년 3월의 국민투표에서, 북부 터키계가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 통일 후 경제개발 효과 등을 기대하며 찬성표를 던진 것과 달리 그리스계 주민이 반대해 연방안은 무산되었다. 연방안을 부결시킨 남부 그리스계에 각종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래도 유럽연합은 당초 약속대로 남부 그리스계로 구성된 ‘키프로스 공화국’의 유럽연합 가입(2004.5)을 허용했다.
그러면서도 오매불망 유럽연합 가입만을 바라보고 있는 터키에는 “계속 북키프로스를 지지한다면 유럽연합 가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함으로써 터키의 키프로스 간섭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현재 남부 그리스계 주민으로 구성된 ‘키프로스 공화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독립국이고, 법적으로도 섬 전체 영토의 관할권을 지닌 반면 터키계 북키프로스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