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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01월 08일 (월) 17:54:07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지청천과 대전자령 전투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1957년 서거)의 외손자 이준식(61)씨가 제11대 독립기념관장에 취임했다. 이 관장은 연세대 대학원(문학 박사)을 졸업하고 근현대사기념관장,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조선일보 2017년 12월 20일)

지청천(1888~1957)은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거쳐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육군무관학교는 1907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할 때 폐교를 면하고 축소된 형태로 운영되다가 1909년 8월 문을 닫았다. 다만 대한제국과 일본의 양국 정부가 1~2학년 재학생 전원을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의 군사교육 기관에 위탁하기로 해 지청천 등 40여 명은 1909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중앙유년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2년 12월 육군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입교했다. 지청천은 1914년 여름 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홍사익(일본군 중장), 신태영(국방부 장관), 이응준(대한민국 초대 육군 참모총장), 조철호(한국 보이스카우트 창설자) 등 동기 13명도 함께 임관했다.
지청천은 일본 본토에서 중위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로 돌아왔다가 그해 6월 중국 만주로 건너갔다. 지청천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본명인 지대형을 이청천으로 바꾸었다. 이후 일제하 언론에서는 이청천으로 소개되었지만 본고에서는 해방 후 이청천이 자신의 이름을 지청천으로 공식 개칭했기 때문에 지청천으로 통일한다.
지청천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1월 서간도의 한족회가 결성한 서로군정서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1920년 가을 일제가 간도 독립군 토벌 작전을 전개할 때는 서로군정서 대원들을 이끌고 길림성 안도현 삼림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뒀다. 전투 후 세 부대를 주축으로 결성한 대한독립군단에서는 여단장 겸 부사령관을 맡았다.
1924년 11월에는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한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산하 의용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12월에는 정의부의 김동삼 계열, 신민부 군정파의 김좌진, 참의부의 김승학 등과 함께 ‘혁신의회(군민의회)’를 조직해 군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11월 한국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군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중국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이 산하조직으로 결성한 군사 조직이다.

대전자령 전투는 청산리 전투와 함께 ‘2대 대첩’

한국독립군은 무기와 군량 부족으로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측 항일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했다. 한국독립군은 1932년 만주 내 중국인들이 조직한 길림자위군, 길림구국군, 중국구국군 등과 함께 한·중 연합전선을 구축, 만주 내 일본군과 만주국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쌍성보 전투다.
▲ 지청천 장군
쌍성보는 신경(장춘)∼하얼빈 간 철도에 위치한 곳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물산이 모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주국의 초비단 부대 3,000여 명과 소수의 일본군이 지키고 있어 수비가 견고했지만 한중 연합군은 1932년 9월 20일(음력 8월 15일)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길림자위군은 동문과 남문, 길림자위군 산하의 고봉림 부대와 한국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했다. 한중 연합군은 밤 8시부터 2시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다수의 적을 살상하고 쌍성보를 점령했다. 수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와 식량 등 상당량의 군수물자도 노획했다.
그러나 며칠 뒤 일본·만주 연합부대의 반격으로 쌍성보는 다시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한중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11월 17일 오후 6시 2차 공세를 펼쳐 일본군 1개 중대를 거의 궤멸시키고 만주군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11월 21일 쌍성보를 다시 일본군에 내주었다.
결국 쌍성보를 확보하진 못했지만 쌍성보 전투는 한국독립군 전체의 사기를 높이고 재만 한인들의 항일 의식을 크게 고취했다. 한국독립군은 1933년에도 경박호 전투(2월), 사도하자 전투(4월), 동경성 전투(6월) 등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으나 점령지를 계속 방어하지 못해 삼림지대로 후퇴했다.
한국독립군이 길림성 왕청현의 노송령을 넘어 1933년 6월 동서검자에 이르렀을 때 왕청현 대전자(나자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조선주둔군)의 간도파견군이 조선으로 철수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한중 연합군은 신속하게 대전자령 서쪽 화개산을 우회해 일본군의 통과 예상 지점인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했다.
대전자령은 40리나 되는 길다란 협곡이 ‘을(乙)자’ 모양으로 굽고 양쪽에는 높이가 수백m나 되는 험준한 절벽과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어 매복에 유리했다. 500여 명의 한국독립군과 2,000여 명의 길림구국군이 투입된 한중 연합작전에서 한국독립군은 전위부대로 나섰다. 일본군 역시 보병부대, 기관총대, 기병대 등으로 구성된 1,600여 명의 대부대였다.
6월 30일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넘어 후미가 거의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한중 연합군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 나왔다. 4~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1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박격포, 소총 등 막대한 군수물자를 버린 채 도주했다. 이 노획물은 우리나라 독립 전투 사상 최대 전과였다. 일본군은 대전자령 계곡에서 겨우 빠져나왔으나 화피전자 동쪽에서 또다시 400여 명의 한중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보고 7월 5일 가까스로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한국 독립운동사가 ‘대전자령 전투’를 김좌진·홍범도의 ‘청산리 전투’와 더불어 일제하 ‘2대 대첩’으로 기록하고 있어 지청천은 2대 대첩에서 모두 활약한 유일한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올렸다. 한중 연합군은 1933년 9월에도 군사적 요충지인 흑룡강성 동녕현성을 공격했으나 그때는 성공하지 못해 수십 명이 전사하고 지청천은 부상했다.

해방 조국에서도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는 데 관심 쏟아

당시 한중 연합군 안에는 한국인·중국인 공산주의자도 다수 있었다. 이들은 부대 안에서 공산화 공작을 진행하면서 지청천더러 한국독립군을 해체하고 길림구국군에 합류하라고 요구했다. 지청천은 거절했다. 여기에 대전자령 전투 후 군수물자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한·중 간의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결국 중국인 부대는 1933년 10월 한국독립군 사령부를 기습적으로 포위해 지청천 총사령관 등 330여 명을 구금하고 전원 무장해제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현장에서 도망을 쳐 한국독립군에서 이탈했다. 다행히 10월 초 구금된 대원들이 풀려나고 무기도 되찾았지만 다수 부대원이 흩어진 데다 중국군에 대한 배신감이 깊어져 더 이상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한국독립군이 이처럼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김구의 밀사가 지청천을 찾아왔다. 밀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본토에 위치한 하남성 낙양에 군관학교를 세울 계획이니 한국독립군 대원들이 중국 본토로 이동해 달라는 김구의 요청을 전달했다. 지청천은 한국독립당 위원장 홍진을 비롯해 40여 명의 동지와 함께 1933년 11월 중국 낙양으로 이동해 1934년 2월 개교한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주의자 그룹은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선)를 1937년 8월 결성하고 임시정부 재건에 착수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8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해 지청천을 총사령,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지청천은 해방 조국에서도 청년 단체들을 통합하는 데 관심을 쏟았다. 그 결과물이 1947년 9월 결성한 대동청년단이다. 대한민국 창군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남한 내 주요 지역에 훈련소도 개설했으나 미 군정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지청천은 1948년 5월 제헌 의원을 뽑는 초대 총선에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1948년 12월 이청천에서 지대형으로 복명한다고 발표하고도 국회에서는 지대형과 이청천을 병용했다. 그러다가 제2대 국회에서 지청천으로 다시 개명, 우리 국회에서 3개 이름을 사용한 유일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195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우드로 윌슨 ‘14개조’ 발표  100주년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은 국내 문제엔 진보적이었고 외교 정책에선 이상주의자였다. 국내에서는 소득세 개정, 아동의 노동 금지, 독과점 행위 규제 등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고 외교에서는 이상주의자답게 도덕 정치를 역설했다. 1917년 1차대전 참전을 결정할 때도 자국의 이익보다는 세계 평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의 이상주의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1918년 1월 발표한 ‘14개조 평화 원칙’이었다. 14개조는 “오직 힘이 말한다”는 기존 국제 질서의 상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문제는 현실 정치의 벽을 고려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으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드로 윌슨은 버지니아주 스탠턴에서 목사 아들로 태어나 프린스턴대와 버지니아대 로스쿨을 거쳐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런저런 대학교수로 활동하다가 1902년 프린스턴대 총장으로 부임해 다양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학내 세력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가 프린스턴대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프린스턴대에서 학위를 딴 2명의 한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김규식과 이승만이었다. 김규식은 1903년 석사학위를, 이승만은 191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슨은 자신의 이상을 책과 강의실이 아닌 현실에서 실현하기를 꿈꿨다. 그 결과 뉴저지 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1910년 10월 당선되었고 여세를 몰아 1913년 3월 백악관에까지 입성했다.
윌슨은 취임 후 ‘진보적 대통령’이라는 기대에 맞게 자유와 평등을 중요시하고 어린이 노동 금지, 노동시간 단축 등 진보적 조치를 많이 취했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남부 출신의 백인 우월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취임 후 인종차별론자들을 요직에 앉히고 다수의 흑인 공무원을 해고했다. 남북전쟁 종전 때 철폐했던 인종 분리 사무실과 화장실 제도도 다시 도입했다. 백인 극우단체 KKK단을 찬양하기도 했다.
윌슨을 역사적 인물로 부각시킨 두 가지 승부수는 1차대전 참전 결정과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였다. 1차대전 참전의 경우, 처음에는 소극적이었다. 본래 고립주의를 선호했던 자신의 대외 정책관도 이유였지만, 미국에 다수 존재하는 독일계와 영국·프랑스계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들기 곤란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이 비무장 상선을 공격하는 등 적대 행위를 그치지 않고 독일의 치머만 전보 사건의 전모를 알고 나서는 참전을 결심했다.

윌슨의 승부수는 1차대전 참전과 ‘14개조 평화 원칙’

▲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미국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8년 1월 8일이었다. 14개조에서 이상주의에 입각한 획기적인 제안은 ▲공개적인 평화협정과 비밀외교·협정 폐지(1조) ▲주권 회복을 포함한 식민지의 모든 요구에 대한 공정한 조정과 처리(5조) ▲강대국이나 약소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연맹 창설(14조) 등이었다. 14개조에 벨기에의 주권 회복, 알자스·로렌의 프랑스 반환, 폴란드의 독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 내 민족 문제까지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 세계 수많은 피식민지 민족은 흥분하고 열광했다. 특히 그들을 고무시킨 조항은 ‘식민지의 모든 요구에 대한 공정한 조정과 처리’를 강조한 5조였다. 피식민지 국민들은 윌슨을 세계평화론자나 약소민족의 수호자로 인식하고 메시아처럼 받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독일의 종전 협정에 따라 막을 내렸다. 뒤이어 승전국과 패전국 간에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해 주요 전승국을 필두로 관련 국가의 대표들이 전후의 파리로 속속 몰려들었다. 그중 가장 환영받은 인물은 당연히 윌슨이었다. 윌슨은 1918년 12월 13일 프랑스에 도착했다. 미국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는 사상 최초였다. 윌슨은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유럽의 구원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평화회의가 시작되자 각국의 대표들은 윌슨이 주장해온 세계 평화나 자유처럼 막연하고 고귀한 제안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혈안이었다. 윌슨의 이상주의적 원칙은 유럽의 실리주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관습과 인습의 성벽을 허물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14개조는 승전국의 의지가 반영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변질되었고 승전국들이 보유한 식민지에 대해서는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약소 민족의 염원도 아랑곳없이 승전국들은 기존 식민지를 그대로 보유했고, 러시아에는 볼셰비키 정부를 쓰러뜨리려는 열강의 침략군이 속속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14개조는 1차대전 직후 당시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약화시키는 데만 쓰인 셈이 되었다.

14개조, “오직 힘이 말한다”는 기존 국제질서 상식 뒤집어

윌슨은 1919년 4월 파리회의에서 그나마 국제연맹 규약이 확정된 것을 위안으로 삼았으나 이 역시 미국 내 정치 현실에 부닥쳐 물거품이 되었다. 암운의 시작은 파리평화회의 전인 1918년 11월의 중간선거에서 윌슨의 민주당이 공화당에 대패한 일이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상하 양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자 국제연맹을 창설하고 미국을 가입시키려는 윌슨 외교에 반대했다.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에 가입하면 미국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공산이 크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한편으로는 윌슨이 주도한 베르사유 조약 협상단에 공화당 의원이 단 1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이른바 꾀심죄도 작용했다.
윌슨은 1919년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안을 갖고 7월 중순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다수당인 공화당은 여전히 국제연맹에 반대했다. 문제는 윌슨이 정적들을 구슬러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정치적 본능과 수완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윌슨은 고집불통의 이상주의자여서 자신이 구상한 당초 안에 수정이 가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결국 윌슨이 자신을 따르는 민주당 상원의원들에게 유보 조항들이 덧붙여진 비준안을 거부하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9월 24일 상원에서 43대 40으로 부결되었다. 그래도 노벨상위원회는 윌슨의 이상주의를 인정해 1919년 노벨 평화상을 안겨주었다.
윌슨의 판단 착오를 윌슨의 건강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윌슨은 재선 임기까지 다 채우긴 했지만 건강이 계속 악화해 파리평화회의 무렵에는 정상적인 집무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1919년 9월 25일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반신이 마비되고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1921년 3월 4일 휠체어를 타고 백악관을 나오긴 했으나 나날이 악화하는 건강 때문에 실의에 빠져 살다가 1924년 2월 3일에 숨을 거뒀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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