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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아빠의 청춘’의 가수 오기택,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2] 그후 20년, 재기의 나날들
노래가 삶이 되고 삶이 노래가 되다
2018년 01월 08일 (월) 16:51:3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목소리 자체에 이미 다양하고 중후한 감정이 배어있어 ‘저음의 마법사’라고도 불리는 가수 오기택씨.
1962년 활동을 시작해 ‘영등포의 밤’, ‘고향무정’, ‘아빠의 청춘’, ‘충청도 아줌마’, ‘우중의 여인’, ‘마도로스 박’ 등 60년대를 대표하는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던 가수다.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한 그의 이력서는 두 개다. 가수이력서와 골프이력서가 그것.
전국체전에서 전남 대표로 출전해 단체 금메달과 개인 1위를 하는 등 각종 아마추어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프로 골퍼로 데뷔하라는 권유도 수없이 받았다. 가수이자 골프선수로 두 가지 삶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그.

현재 그의 고향인 땅 끝 마을, 해남에서는 해마다 그의 이름을 딴 ‘오기택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올해로 벌써 열한 번째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당사자 오기택씨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본인 이름의 가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20년 전 바다낚시를 갔다가 당한 불의의 사고 후유증 때문이다. 한때 반신불수의 몸이었던 그는 혹독한 재활 훈련 끝에 재기에 성공, 한동안 무대에 다시 서기도 했다. 그러다 또다시 건강이 좋지 않게 돼 현재는 활동을 중단한 상태.

이 사고로부터 20여년, 여전히 독신인 그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가수 오기택씨가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그 삶과 사랑’을 총 3회에 걸쳐 만나본다. 그 두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우리 시대의 힘겨운 아빠들에게 보내는 응원가 ‘아빠의 청춘’

오기택씨의 휴대폰 컬러링은 ‘아빠의 청춘’이다. 본인의 대표곡인 동시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특히 지치고 힘들 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전화 거는 이에게도 ‘힘내라’는 일종의 응원의 메시지인 셈이다.

1. 이 세상의 부모마음 다 같은 마음/아들 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마음으로 빌어주는 박영감인데/노랭이라 비웃으며 욕하지 마라/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인생.

2. 세상구경 서울구경 참 좋다마는/돈 있어야 제일이지 없으면 산통/마음 착한 며느리를 내 몰라보고/황소고집 부리다가 큰 코 다쳤네/나에게도 아직까지 꿈이야 있다/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브라보 브라보 아빠의 인생. -아빠의 청춘(반야월 작사, 손목인 작곡, 오기택 노래).

지난 2008년, 우리나라 치매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가 바로 ‘아빠의 청춘’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동시에 재활치료의 한 방법으로 노래 부르기가 채택되기도 했다. 함께 합창하면서 우울함을 극복하고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어준 이 노래가 이제는 오히려 오기택씨 자신에게 더욱 큰 힘이 되고 있다. 누구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직접 찾아가보았다.

처음 입주한 아파트에서 40년 째 생활, 그자체가 ‘개인기념관’

오기택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 입구 계단에는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불편해지면서 직접 관리실에 건의해 설치한 것이다. 지난 2010년경이다.

그는 이 아파트에 입주한 이래 줄곧 이곳에서만 생활해 왔다. 1979년 8월 30일부터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매달 낸 관리비 영수증 40여년 치가 모두 보관되어 있었지만 몇 달 전 집안 정리를 하면서 버렸다.

40년 만에 아파트 내부 구조도 달라졌다. 화장실 문과 턱을 없애고 대신 커튼을 달았다. 집안에서도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위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어려운 그는 일주일에 세 차례 병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늘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으로 지내야 하는 것이 그러하듯 그는 지금, 혼자다. 6년 째 그를 도와주고 있는 요양보호사 권남희씨(57)는 하루 세 시간만 근무하면 되지만 거동이 불편한 오기택씨를 외면할 수 없어 근무시간을 초과하기 일쑤다.

필자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각, 그는 인터넷 바둑에 몰두하고 있었다. 3년 반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동료들과 심심풀이로 두던 바둑이 어느덧 8급 실력이다.

지난 2017년 3월에 퇴원한 그의 유일한 낙은 TV시청이다. 가요프로와 스포츠경기를 주로 시청한다. 최근에는 바둑도 즐겨 본다. 그가 바둑을 두는 동안 실내를 잠시 돌아보았다.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활동기록이 ‘에너지의 원천’이자 ‘존재의 이유’

현관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역삼각형 몸매의 수영복 사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건장한 체격이 그러했듯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1972년 월남공연 갔을 때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전성기 시절에는 월남공연도 두 차례나 다녀왔다. 골프는 물론 축구, 볼링 등 연예인 대표로 뛰던 그다.

지금은 벽과 진열장이 말끔히 정리된 채 일부 바뀌어져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사방 벽에는 각종 사진액자와 10대가수상 트로피를 비롯한 각종 상패, 전국체전에서 받은 메달과 패넌트, 위문공연 기념패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탁본도 크게 자리하고 있어 그가 낚시광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마치 개인 기념관에 들어온 듯 책장에는 각종 음악 관련 책과 CD, 그리고 악보들도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작곡가 손목인, 김부해, 전오승, 엄토미. 김호길, 서영은, 홍현걸, 김영광, 김종유 등의 친필악보였다.

60~70년대 받은 팬레터 또한 지금까지도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심지어 별도의 노트를 만들어 지역별로 팬들의 이름과 주소를 빼곡히 적어두었다. 해외에서 온 편지와 군인들 주소까지 빼놓지 않고 정리돼있고 동봉해준 팬들 사진은 물론 심지어 답장을 보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별도로 표시해두고 있었다.

이 뿐 아니다. 1979년경부터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 시절의 공적사항과 각종 법정 기록, 가수와 방송사 간의 출연료 협상 서류, 해명서 등도 보관되어 있다. 자신의 이력서는 물론 1996년 12월 사고 당시 상황을 상세히 정리한 문서와 함께 사고 당일 비행기표와 승선권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렇듯 그는 자신의 활동기록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그리고 수시로 그것들을 보며 새삼 힘을 얻는 듯했다. 말하자면 그 기록들이 지금 그를 버티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자 ‘존재의 이유’인 셈이다.

잊고 지내던 기억을 되살려주는 ‘발표곡 리스트’

사진도 몇 권 분량의 앨범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발표한 음반들은 없었다. 찾아온 팬들에게 선물로 나눠주다 보니 정작 본인에게는 없게 된 것.

지난 2001년 경, 인터뷰 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필자는 그가 그동안 발표했던 음반 목록을 정리해갔었다. 작사, 작곡, 음반사, 발표연도까지, 그가 발표한 노래들을 거의 빠짐없이 정리한 리스트였다.

노래를 통해 당시 활동 상황이나 취입과 관련된 일화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듣기 위해서였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보조수단이기도 했다.

리스트를 훑어보던 그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던 것이 특히 기억난다. 자신이 그동안 취입했던 노래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매우 기뻐했다. 이젠 생소하게 느껴지는 노래 제목도 많다고 했다. 이후 그는 시간 날 때마다 리스트를 살펴보는 듯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필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얼마 뒤 그의 이력서도 새롭게 바뀌었다.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노래들, 즉 ‘영등포의 밤’, ‘우중의 여인’,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비 나리는 판문점’, ‘마도로스 박’, ‘아빠의 청춘’의 취입연도 외에 또 새로운 노래 제목들도 올려 지기 시작했다.

당시 새롭게 그의 이력서에 올려져있던 곡들을 소개하자면, ‘가버린 영아(강기섭, 유성민-이하 작사, 작곡 순)’, ‘검은 꽃의 블루스(전우, 엄토미)’, ‘그리워지면(조곡출, 김광)’, ‘그 처녀(배삼룡, 김용만)’, ‘꿈속의 고향 길(김영일, 김학송)', '나 여기 와 있건만(손석우, 손석우)’, ‘남산블루스(반야월, 박시춘)’, ‘눈물과 함께(이철수, 김영광)’, ‘두 사랑의 그리움(최치수, 김종유)’, ‘등대지기(강남풍, 김광)’, ‘말없는 마네킹(심일영, 김화영)’, ‘명동의 나이트클럽(김영일, 김영광)’, ‘무등산의 달(손석우, 손석우)’, ‘비겁하지 않다(배삼룡, 김용만)’, ‘석양나그네(강사랑, 배상태)’, ‘아침호수(장덕희, 김화영)’, ‘오솔길의 추억(석천, 한동훈)’, ‘우리 마을 순이(전우, 엄토미)’, ‘지하도에서 만난 여인(월견초, 김학송)’, ‘추억의 도봉산(김상우, 배상태)’, ‘충청도 사나이(최치수, 김종유)’, ‘키스 키스 키스(남상포, 김부해)’ 등이다.

물론 이 노래들은 히트 유무나 대중들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본인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노래들을 이력서에 적은 것일 게다.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대표곡 체감온도와는 다소 차이가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특히 이 무렵 기억나는 일화 중 하나가 ‘남산블루스(박시춘 작곡)’ 노래에 관해서다. 발표 당시 노래를 전혀 부르지 않아 좋은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히트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몇 차례 강조했다. 이 노래가 지금이라도 많이 불리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심지어 노래와 관련 자료를 남산관리소에 보내주면 어떻겠냐는 주문을 해 난감했던 기억도 난다. 결국 자료는 이후 음원과 함께 남산관리소 측에 보내졌다. ‘이 노래를 틀면 남산에 산책 나온 시민들 반응이 매우 좋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말이다.

직접 만든 ‘오기택 대표곡’ CD, 팬들을 만날 때마다 건네

그는 자신이 발표한 모든 노래들을 다시 찾고 싶다고 했다. 해서 그가 발표한 LP에 담긴 노래들을 디지털로 변환해 CD로 건넸다. 또한 그중 대표곡 40여곡을 추려 두 장짜리 CD로 만들어 별도로 만들었다.

그는 이 CD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눠주었다. 택시를 타면 기사들에게도 어김없이 CD를 건넸다. 감사 표시를 겸해서다. 때문에 필자는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CD를 구워야 했다. 이후엔 그가 방송에 출연해 노래 부르는 영상만을 별도로 편집해 두 장짜리 DVD도 만들었다.

얼마 뒤 그는 쌍꺼풀 수술을 했다. 눈에 힘이 없어 보인다며 예전과 비슷한 인상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그는 노래와 관련된 당시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팬들에 대한 일화들을 말할 때는 특히 생기가 돌았다.

팬들과의 일화는 무궁무진했다. 심지어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지방공연에 갈 때마다 동료가수들과 누가 사인을 더 많이 요청받나, 내기를 하곤 했다. 물론 본인이 항상 이겼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승부욕도 남달랐고 팬들에 대한 욕심 또한 유별났다.

이 무렵 비록 1억짜리 골프회원권을 처분해야 했지만 아파트만큼은 융자 없이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만능 스포츠맨인 만큼 주기적으로 집 근처 헬스클럽에 나가 재활운동을 했고 언어발음교정에도 열심이었다. 비록 일반 공연무대에는 서지 않았으나 KBS ‘가요무대’를 비롯한 방송 출연 제의가 오면 휠체어에 의지하고라도 적극적으로 나서 재기의 의지를 다졌다. 당시 그의 집 테이블에는 이러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나는 꼭 일어서야만 한다. 나를 아껴준 분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노력하여 일어서야만 한다. 그래서 멋진 노래를 그 분들에게 선사해야 한다...(이하 생략)” -이렇듯 팬들을 향한 다짐이 곧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물론 이것을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겨울엔 방콕으로 떠나 두 달 간 재활치료

그는 해마다 겨울이면 두 달 일정으로 재활치료 차 방콕으로 떠났다. 그때마다 CD를 50여 세트씩 들고 갔다. 기온이 따뜻한 태국에서 겨울을 보내며 마사지, 침 등 재활치료를 받고 방콕에 거주하고 있는 고향친구 7~8명과 만나 수시로 골프를 쳤다. 치료 차 중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러한 재기 노력을 인정받아 2006년, ‘반야월가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76년에 처음 제정된 이 반야월가요상은 가요계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부터 작곡, 작사상까지 부문별로 시상하는 제도였다.

‘우중의 여인’, ‘아빠의 청춘’의 작사가이기도 한 반야월 선생은 이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씨가 사고로 인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눈 감기 전에 은퇴는 없다’며 만년까지 노랫말을 썼던 반야월 선생은 이 무렵 ‘아빠의 청춘’의 후속곡 격인 ‘엄마의 청춘’의 가사를 새롭게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선생의 차남 박인호씨가 매니저를 맡고 있던 신인 가수 아미가 취입했다.

어려웠던 시대를 함께 했던 ‘영등포의 밤’, 노래비 세워지다

그에게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2010년 12월, 그의 대표곡 ‘영등포의 밤’ 노래비가 영등포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에 세워지게 된 것. 이 터는 경성방직, 즉 지금의 (주)경방이 있던 자리다.

삶이 고되고 힘들던 시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하던 무렵 서울에 도착한 이들의 발길이 가장 먼저 머무는 곳이 영등포였다. 특히 구로공단이 세워진 영등포는 꿈과 희망을 안고 상경한 이들이 가장 먼저 일자리, 잠자리를 찾아 머리를 누이던 곳이었다.

이들은 살기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된 하루일과를 마치면 삼삼오오 선술집 모여취기가 오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영등포의 밤’이었다.

'영등포의 밤' 노래비에는 이러한 글이 새겨져 있다. ‘너나할 것 없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던 시절, 산업사회의 주역들이 땀을 흘렸던 이곳에 추억과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이 노래비를 세운다’고.

기타를 형상화해 2.5m 높이로 세워진 이 '영등포의 밤' 노래비 제막식에는 오기택씨를 비롯해 작곡가 김부해 선생 유족들, 그리고 손인호, 남일해, 김상희, 송춘희, 장우, 태진아, 이동기, 김흥국, 이자연, 박상철, 한국연예협회 석현 이사장 등 그를 가까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가요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물론 필자도 함께 했다.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당시 서민들의 꿈과 애환이 담긴 노래 ‘영등포의 밤’ 노래비, 집 근처에 세워져 있음에도 정작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씨는 거동이 불편해 자주 찾지 못하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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