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의 외로움부터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충신의 모습까지, 배우 이병헌이 그린 인물들은 늘 변화무쌍한 간극을 자랑한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이병헌, 충무로를 빛낸 그의 활약은 지난해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장정미 기자 haiyap@

이병헌은 지난해 <싱글라이더>(감독 이주영), <남한산성>(감독 황동혁)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극장가에 돌아왔다. “모히또에 가서 몰디브나 마시지”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장발 조폭으로 변신한 <내부자들>, 서부극 속 멋쟁이 칼잡이 빌리 락스를 연기한 할리우드 영화 <매그니피센트7>,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기꾼 진 회장을 연기한 <마스터>까지, 여러 작품을 통해 선보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노선이 전혀 다른 정적인 연기가 그의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절로 입증했다.

명연기 펼치며 영화 지탱하는 기둥되다

▲ 배우 이병헌

지난해 2월 극장가를 감성으로 물들인 <싱글라이더>는 이병헌이 자아내는 침묵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싱글라이더>는 증권회사 지점장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던 한 기러기 아빠, 강재훈이 회사에서 부실 채권 사건이 터지며 위기에 놓이고, 이를 계기로 가족을 찾아 호주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병헌은 강재훈을 연기했다. 영화는 부실 채권 사건 이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을 앓던 강재훈이 무작정 가족들이 있는 호주로 떠나며 시작된다. 아내 이수진(공효진)과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강재훈은 자신이 없는 2년 동안 낯설게 변한 아내와 마주하고, 그의 모습을 관찰하며, 침묵한다. 이색적인 호주의 풍광 속, 사람들의 일상 속에 느린 호흡이 녹아들어 간다. 이병헌은 영화 속에서 혼자 여행하는 이, ‘싱글라이더’(Single Rider)의 외로움을 섬세한 표정 연기를 통해 그려냈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단 한 신, 감정을 터트리며 오열하는 이병헌의 모습이 담긴 장면은 관객의 전율을 이끌어 내는 명장면이 되기도 했다.

이후 이병헌은 10월 개봉한 <남한산성>을 통해 다시 한 번 변화를 꾀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피란 도중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와 백성을 위한 길을 찾고자 대립을 반복하는 조정의 대신들, 위태로운 조선의 운명 앞에 놓인 민초들의 삶을 다룬 영화다. <협녀, 칼의 기억> 후 3년 만에 사극에 출연한 이병헌은 고립된 성 안에서 생존을 고민하는 인조에게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대신 최명길을 연기했다.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원작 속 정제된 인물들의 대사 대부분을 옛말 그대로 살려 시나리오에 녹여냈다. 때문에 배우들은 옛말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특히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은 또 다른 대신 김상헌(김윤석)과 양극단에 서서 각자의 철학과 신념으로 설전을 벌이는 인물이다. 때문에 이들의 ‘말’ 속에는 ‘백성을 위하는 진짜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이를 통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고스란히 담겨있어야 했다. 이에 이병헌은 그야말로 명연기를 펼치며 영화 전체를 든든히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 자신의 대사 속에 최명길이라는 캐릭터의 진심을 녹여내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것. 그가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채 공손한 어투로 벌이는 ‘말’의 전쟁은 ‘남한산성’의 명장면이 됐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통해 연기 변신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며 2017년 극장가를 사로잡았던 이병헌은 올 1월 후배 박정민과 호흡을 맞춘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을 통해 또 한 번의 변신을 예고하고 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은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와 엄마만 믿고 살아온 서번트증후군 동생 ‘진태’, 살아온 곳도, 잘하는 일도, 좋아하는 것도 다른 두 형제가 난생처음 만나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병헌은 “이 영화는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결핍에 대한 이야기”라며 “결핍과 아픔이 있는 주인공들이 이를 이겨내려 하고, 또 이겨내도록 서로를 돕는다. 기분좋게 끝나는 스토리”라고 설명했다. 이병헌은 주먹만 믿고 살아온 한물간 전직 복서 조하 역을 맡아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동생 진태와의 감동적인 가족 드라마를 쓸 예정이다. 끊임없이 변신하는 이병헌이 그려낼 흔한 ‘동네 형’의 모습은 어떨지, 벌써부터 사뭇 기대된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