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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여백을 넘어 기억의 공간에 다가가다
2018년 01월 05일 (금) 15:10:16 신선영 전문기자 ssy@newsmaker.or.kr

서광종 작가가 그린 안개는 ‘백색의 미학’이다.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내려앉은 백색 절경에 나무와 말을 중재시켜서 이승과 저승, 그 언저리에 있을 법한 휴지(休止)의 공간을 만들었다. 서광종 작가에게 안개는 죽음의 길을 열어주다가도 다시 삶의 길을 열어주는 경이로운 자연이자, 영원할 것처럼 머물러 있다가도 이내 머물지 못하고 떠나가는 찬란한 시간이다.

신선영 기자 ssy@

안개의 기억
서광종 작가의 여섯 번째 개인전이 열린 인사동 갤러리 이즈에는 유독 많은 관객들이 몰려 있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이십 여점의 안개 속에서 관객들은 느리게 움직이는 대기처럼 천천히 이동할 뿐, 쉽사리 빠져 나가지 못한 채 그림 앞에 머물러 있었다. 마치 안개 속에 시간을 내려놓듯 걸음걸이마다 쉼표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관객의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 이것이 서광종 작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설 때만 해도 걸음걸이가 빨랐던 관객들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간의 짐을 내려놓았다. 그 짐은 작품 속 나무처럼 윤곽만 남아 있는 ‘기억의 짐’이다. 어쩌면 작가도 짐을 부릴 수 있는 자리를 위해 여백을 많이 남겨뒀는지도 모른다.

   
▲ 서광종 작가.

서광종 작가가 전시 제목을 <기억여행>이라고 정한 이유는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과 자연, 그 기억에 대한 회고를 작품에 담았기 때문”이다. 서광종 작가는 순천만에서 태어나 순천만 습지대의 안개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가평 북한강 언저리에 살며 매일 같이 안개를 보고 있다. 안개가 심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치 앞도 모를 안개 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다.

그만큼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공간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주는 두려움을 작가는 잘 알고 있다. 안개 속에 완전히 격리된 것이기 때문에 격리에 대한 위험과 위험에 따른 불안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안의 지점 위에 그려 넣은 단상이 있었으니 바로 나무, 집, 자전거, 사람이다.

   
▲ 기억여행, 135x407.6cm,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2017.

서광종 작가는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 위에 과거에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대상들을 하나둘 그려 넣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기억이라서 형태가 정확하게 잡혀있지는 않지만 나무, 집, 자전거, 사람과 같은 소중한 대상들이 여전히 그의 작품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대상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말(馬)이다.

“안개 속에 살면서 현실과 이상을 넘나드는 존재”인 말은 주로 나무와 함께 포치됐는데 안개의 추상적인 이미지, 말의 관념적인 이미지, 나무의 물질적인 이미지가 합을 이뤄 미학적인 완결성을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안개가 자아내는 초현실적인 풍경이 말의 이미지로 완성됐는데, 그래서인지 현실로부터 이탈(離脫)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으로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 기억여행, 135x203.8cm,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2017.

표현으로서의 안개
여백은 수묵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이 여백을 안개로 채운 서광종 작가는 서양의 스푸마토 기법(물체의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리는 명암법에 의한 공기원근법)과 동양의 몰골법(윤곽선 없이 색채나 수묵을 사용하여 형태를 그리는 화법)을 접목해서 안개의 몸체를 잡아냈다.

하지만 서광종 작가는 “사실성보다는 그 내면에 담긴 정신을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안개가 기(氣)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만큼 관념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밀도 있게 풀어낼 수 있는 미학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광종 작가도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시적 이미지를 사용해서 안개의 사유를 끌어낸 것이다.

   
▲ 기억여행, 59.7x92cm,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2016.

어쩌면 안개는 살풀이의 ‘풀어지는’ 세계와 맥이 같은지도 모른다. 풀어진 것을 잡아낸다는 점에서, 몸으로 익힌 것을 푼다는 점에서, 승천의 이미지가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살풀이가 삶의 한기를 풀어주듯이 서광종 작가는 삶의 우수를 달래주는 것이다. 이미 안개가 왜 예술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증명한 셈이다.

“새벽안개가 낙엽 태운 연기처럼 하늘로 피어오른다. 어느 순간 열릴 듯 닫히고 보일 듯 감추며 그 속으로 나를 유인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힌 나는 그 속으로 기억여행을 떠난다. (중약) 시시각각 변하는 몽환적인 풍경들이 우리들 삶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다. 어느 순간 내 작업에 옮겨 보았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자연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쓰는 일기 한 장 바람에 열려 부끄러울 뿐이다.” (작업노트 中)

   
▲ 어느 날 아침, 72.7x90.9cm,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2015.

서광종 작가는 한성대학교 회화과 및 동 예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과 국제전에 참가했다. 1992년 동아미술제 특선 외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했다. 한성대학교 외래교수, 한국미술협회·한국전업작가회 한국화분과 이사,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김주영 장편소선 <멸치>, 이종묵 <돌아 앉으면 생각이 바뀐다> 등의 표지화를 그렸다. NM

   
▲ 기억여행, 135x203.8cm, Ink and Color on Korean Pap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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