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란 작가의 작품은 무수한 선으로 이뤄져 있다. 나무, 집, 달, 부엉이와 같은 소재들을 나이프와 손톱으로 긁어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크래치로 이루어진 소재들은 작가의 심리적 상태를 촉각적으로 발현한 또 하나의 자신, 페르소나가 된다.

신선영 기자 ssy@

새로움에 대한 모색

▲ 윤혜란 작가.

윤혜란 작가의 작품에는 어떤 시도들이 엿보인다. 정확하게 말해서 기존 회화와는 다른 ‘예외적인’ 시도들이다. 그 시작은 수채화였다. 불현 듯이 수채화만의 담백한 느낌을 상쇄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낮은 채도만을 골라 사용하게 됐고, 차차 다른 재료도 섞어 가며 자신만의 기조를 찾아가게 됐다.

“남들과 달라야 한다거나 기존의 방식을 뛰어 넘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저만의 기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으로 향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삼사 년간 작품을 못하고 헤매던 시절도 있었지만 저만의 회화를 탐색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작가가 자신만의 기조를 찾는다는 건 자신의 언어에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재료, 그 재료에 기틀이 되어줄 수 있는 기법, 그 기법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색채를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미술을 굴려가는 것이지 미술이 자신을 굴려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의 미술 사조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새로운 종이를 꺼내든 것이다. 

“작업에 앞서 기존의 작법과 기존의 개념을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규제되거나 제약되어 온 프레임과 상관없이 손이 가는대로 취합해 나갔습니다. 결국 광택이 있어서 색을 잘 먹지 못하는 아트지 위에 서로 융화되기 어려운 수채물감, 아크릴, 색연필, 파라핀, 젯소 등을 섞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 피아노 맨, 37x32cm, 혼합재료, 2017.

말로만 들어선 생소한 기법이다. 색과 물이 잘 먹지 않는 광택지에 서로 섞이길 거부하는 재료들을 공존시켰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낯선 기법이 나무, 집, 달, 부엉이 같은 투박한 이미지들을 도리어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이 됐다. 매재의 특수한 성격 덕분에 자칫 심심해 보일 수 있는 이미지까지 특수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제 그림이 투박한 이유는 왼손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왼손으로 그려서 선이 똑바르지 않고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비정형이 됐습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나눠서 긋다 보니 내곽선과 외곽선의 구분도 없어지고, 시작과 끝의 구분도 없어지는 그림이 된 것입니다.”

▲ 가을 꽃, 37x32cm, 혼합재료, 2017.

왼손으로 그린 그림
윤혜란 작가가 왼손을 고집하는 이유는 왼손이 성장이 덜 된 아이의 손 같기 때문이다. 교육의 때가 묻지 않고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년기적 감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정교하게 그릴 수 없고 기교를 부릴 수 없지만, 이 어눌함 속에 나오는 눅눅한 감성으로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작가는 확신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온 세대에겐 일러스트 같은 그림이 더 친구 같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미술 사조를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되어 나온 건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린 이국적인 풍경과 문화들도 저 혼자만의 공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페니 레인(Penny Lane), 37x32cm, 혼합재료, 2017.

작가는 평소에 즐겨 듣는 비틀즈의 <페니 레인>과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을 그리는가 하면, 유럽의 서구적인 도시와 그 속에 살고 있는 부엉이를 그리기도 했다. 부엉이는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동물로서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이나 작가의 손때가 가장 많이 묻은 대상이다.

“처음에는 유화 붓과 나이프만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손톱도 사용하게 됐습니다. 손톱을 썼더니 촉각적인 감각이 살아나면서 결과적으로 작품과 나, 대상과 나의 관계도 더 밀접해졌습니다. 특히 부엉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재로써, 부엉이가 보는 눈과 제가 보는 눈이 점점 일치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봄의 농부, 37x32cm, 혼합재료, 2017.

작품과 작가와의 일치감은 색채로도 나타났다. 레몬 빛 가스등을 켠 것 같은 특유의 색채 감각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배가하는 것이다. 특히 작가가 좋아하는 색, 오렌지색과 레몬 옐로우색이다.

“미술은 감각의 예술입니다. 특히 색채는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뇌에서 수용을 해버리기 때문에 발색을 조정하는 것은 언어를 조정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세상을 그림으로만 소통하다 보니까 모든 언어가 그림을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언어 자체가 상징으로 남아서 작품만이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표현하는 언어적 색채를 유치하게 보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언어가 도태되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새롭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진심을 담은 작품으로 소통의 창구를 넓히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NM

▲ Owl in Paris, 38x78cm, 혼합재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