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첫 번째는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이고, 두 번째는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이다. 즉, 순수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이자 물욕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추구하며 순수의 가치를 나타내는 동시에 순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작가 전영미를 소개한다.

신선영 기자 ssy@

<그 시절 그 소녀>: 순수로의 회귀

▲ 전영미 작가.

많은 작가들이 순수에 대한 열망을 작품으로 나타내 왔다. 최소한의 색채로 단색의 미를 나타내는가 하면 유무형의 형태로 형상의 틀을 넘어서며 순수의 차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영미 작가에게는 그것이 소녀였다. 들꽃의 옅은 내음도 맡을 수 있고 꽃잎의 앳된 표정도 읽을 수 있는 소녀, 강아지의 말없는 눈빛도 읽을 수 있고 나비의 소리 없는 기척도 알아차릴 수 있는 소녀의 모습을 통해 순수로의 귀의를 대신하고자 했다.

“언제부터인가 제 마음속을 맴돌고 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어린 소녀. 저는 그 아이에게 언젠가는 너를 꼭 그려주마 약속했습니다. 때가 되어 그 아이를 화폭으로 불러내니 또 다른 아이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쉴 새 없이 그리는 사이 열 두 달이 지나 열 두 명의 소녀가 담긴 연작이 완성되었습니다.” (작업노트 中)

세파의 흔들림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던, 혹은 잃어버릴 수 없었던 마음속 소녀들을 모아 인사아트스페이스에서 <그 시절 그 소녀> 전을 열었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처럼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열두 소녀를 통해 순수성이야말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는 것을 알려준 전시였다. 그래서 한 점 한 점 소녀들을 마주칠 때마다 관객들은 세속에서의 상념들을 사그라뜨릴 수 있었다고 평했다.

“제 전시의 성공 기준은 판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 전문가의 의견에 있는 것도 아닌 관객들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관객들이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림 앞에서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을 때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해외 초대전과 아트페어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우리 고유의 감성으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기회였습니다.”

▲ 봉숭아연정, 비단에 채색, 53x46cm, 2015.

전영미 작가가 우리 고유의 감성, 즉 한국적인 미를 힘주어 말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랜 외국 생활에서 느낀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승화하면서 한국적인 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차차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자 가장 경쟁력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국 후 문인화, 수묵풍경화, 채색화, 공필화를 차례로 배우며 작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지금 그리는 기법이 공필화입니다. 채색화의 일종으로 얇은 비단에 가느다란 세필로 그리는 기법이기 때문에 묘사가 깔끔하고 채색이 정교한 것이 특징입니다. 물감을 묽게 타서 칠하고 말리기를 수십 번 반복하기 때문에 녹록치 않은 작업이지만 맑고 고운 색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서두르면 안 되는 작업입니다. 차차 우리 민족의 정서와 미감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고전을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하게 됐고, 그 시작이 심청전이 됐습니다.”

▲ 책 읽는 소녀, 비단에 채색, 53x46cm, 2015.

<청의 마음>: 효를 넘어선 사랑
지난 시월 경인미술관에서 열린 <청의 마음> 전은 우리 고전인 심청전을 한국의 채색화로 재해석한 새롭고 감동적인 전시였다. 이 전시를 위해 심청전 원전을 정독한 전영미 작가는 심청을 효녀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한 인간이자 순수한 소녀로 보고 심청의 다양한 감정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그 이유는 심청이 아버지를 모시면서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역경들이 단순히 효심이 깊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의 행위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청의 마음>을 작업하면서 내내 던졌던 질문이 ‘나는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였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할지라도 가까운 타인일 뿐 나 자신이 아닌데,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을 실천했다는 게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도록 큰 사랑을 가졌던 한 소녀의 믿음과 용기, 그것이 가져온 놀라운 기적이 이기주의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 도전과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 인당수로 가는 길 4, 비단에 수묵, 28x24cm, 2017.

소녀 심청은 가장 낮고 비천한 처지였지만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고귀하고 빛나는 존재가 됐다. 심청의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자신을 성장시켰고,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치유하며 행복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그것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또 우리가 지켜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인당수에 몸을 던졌던 심청이 다시 연꽃 속에서 살아나는 장면을 그릴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고 목숨까지 희생한 소녀가 부활하는 모습이 성모마리아 또는 관음보살처럼 한없이 자애로운 모습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들이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위로와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온화한 얼굴이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고심해서 그렸습니다. 심청의 마음 길을 따라 함께 울고 웃으며 정성껏 준비한 전시였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분들이 위로와 감동을 받으셨다는 말씀에 저 또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고전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작품으로 아름다운 감동을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청의 부활, 비단에 채색, 장지 콜라쥬, 134x134cm, 2017.

전영미 작가는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 미시간주립대학교 디지털미디어아트 대학원을 거쳐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교단에서 활동했다. 지금까지 네 번의 개인전과 여섯 번의 국내외 초대 개인전, 다수의 단체전과 국제아트페어에 참가했다.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주관 대한민국 미술제에서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또한 삼성생명, 삼성증권, 중국 상진케미컬주식회사의 홍보 달력 제작 등 기업과 여러 기관과 협업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NM

▲ 황후 심청, 비단에 채색, 73x51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