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그림이 생명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보는 것 같을 때, 내가 그림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을 때, 내가 그림에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을 때 그렇다. 그런 그림은 내가 삶을 붙드는 힘보다 그림이 삶을 붙드는 힘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바로 이순자 작가가 그린 길고양이의 모습이다.

신선영 기자 ssy@

길고양이의 삶

▲ 이순자 작가.

지난 11월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이순자 작가의 개인전 <묘환(猫幻)-고양이> 전이 열렸다. 묘환(猫幻)이 고양이 묘(猫)에 헛보일 환(幻)을 조합한 단어인 걸로 봐서 묘환은 생명이 있으나 생명을 노출해서는 안 되고, 존재해 있으나 존재를 거부당하며 살아가는 길고양이의 삶을 은유적으로 빗댄 표현 같다. 갖은 학대와 살해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숨긴 채, 생존을 위해 미망인처럼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환영 같다고 해서 붙여진 제목이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하지만 이순자 작가가 그린 길고양이는 어쩐지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여느 집고양이처럼 다가가도 놀라지 않고 손을 내밀어도 달아나지 않을 것 같다. 이순자 작가가 아침저녁 사료를 주며 돌보는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더러는 영역 싸움에서 밀려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다가오는 고양이 마다 않고 오 년간 챙겨줬더니 이순자 작가에게만큼은 애교를 부리는 길고양이가 됐다. 그래서 묘할 묘(妙)가 붙은 묘한 고양이로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제가 처음 돌봤던 고양이는 쥐덫에 걸린 고양이었습니다. 어깨까지 걸려서 꼼짝 못하는 걸 잡아다 쥐덫을 제거하고 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에 대한 경계가 풀리면서 밥 때가 되면 나타나서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차차 상처도 아물고 살도 오르니 애교도 부리면서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고양이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네를 다 뒤져도 없는 걸 보고 죽었다는 걸 예감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곳으로 가라는 의미에서 그 고양이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 묘환-꽃과 고양이, 장지에 채색, 116x91cm, 2017.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억겁의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일 겁이 백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가 사방 사십 리짜리 돌산을 비단 깃으로 닳아 없어지게 하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억겁은 일 겁이 억 번이나 반복되는 시간이나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옷깃만 스친 억겁의 인연도 귀할 진데 정성과 애정을 쏟았던 고양이가 사라진 것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래서 고양이를 다시 살려내기라도 하려는 듯 화폭에 옮겨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양이가 흉조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학대하고 살해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고양이는 영리해서 은혜도 갚을 줄 알고 깨끗해서 스스로 몸 관리도 할 줄 알고 독립심도 강해서 인간의 영역을 크게 침범하지 않는 동물입니다.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기피의 대상이라는 게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에서만이라도 눈엣가시가 아닌 사랑스러운 동물로 되살아나길 바랐습니다.”

▲ 묘환-꽃과 고양이, 장지에 채색, 130x97cm, 2017.

도시와 길고양이
이순자 작가가 그린 고양이는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수묵화를 했던 필치를 살려 실재에 부응하도록 털 하나하나를 살려냈다. 그래서 아무리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외면할 수 없고 허투루 감상할 수 없게 만드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수공에 깃든 작가의 정성까지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두 작품 주의 깊게 보다 보면 고양이 특유의 초탈한 시선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고양이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기품이랄 게 고양이에게도 있습니다. 소외됨 속에서도 꼿꼿함을 유지한다거나, 유유하다가도 일순 몰입하려고 드는 태도가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동물이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이런 인간과 고양이와의 감성적인 교류가 고양이를 생명체로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고양이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게 제 믿음이었습니다. 동물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저와 같은 작품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묘환-꽃과 고양이, 장지에 채색, 53x41cm, 2017.

공생은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함께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길고양이는 사람을 피해 숨어 다니면서도 더 많은 희생을 요구 당하고 있으니 일방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집과 급식소를 제공하고 TNG(중성화 수술)을 시켜주는 재능기부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동물을 학대하고 유기하는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어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인 것은 여전하다. 그래서 이런 현재의 상황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다음은 도시 속의 길고양이를 그릴 참이다.

“이번 전시가 꽃 속의 길고양이로 예쁜 모습을 보여줬다면, 다음 전시는 도시 속 길고양이로 현실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 속에서 소외받는 길고양이의 모습과 소외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길고양이의 모습으로 시각적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값나가는 수묵화 안 그리고 돈 안 되는 고양이 그린다고 주변에서 만류하지만, 열 마디 말보다 값어치 있는 하나의 그림, 소외된 가치에 손을 내미는 작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NM

▲ 묘환-꽃과 고양이, 장지에 채색, 53x41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