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8.22 목 13:34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평론] ‘덕수궁 돌담길’ ‘바보처럼 울었다’의 가수 진송남, 노래인생 55년 이야기[3]
부창부수의 Love Story, ‘나란히 걸읍시다’
2017년 11월 08일 (수) 02:34:4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오 님아’, ‘시오리 솔밭 길’, ‘잘 있거라 공항이여’, ‘옛 동산’ 등 많은 히트곡과 더불어 시대를 함께 노래한 미남, 미성의 스타 진송남.
1962년, 부산MBC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최근에도 신곡 ‘부산항 제3부두’를 발표했을 만큼 여전히 현역이다.

‘부산항 제3부두’는 그의 삶, 한 부분이 소중히 담겨져 있는 노래다.
전성기 시절, 청춘스타였던 그가 남진, 태원 등과 함께 베트남 전에 파병될 때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으며 떠났던 곳.
베트남 전에서 누구보다 늠름했던 모습의 진송남,
손에는 마이크 대신 M16 총이, 어깨엔 4개의 수류탄, 허리엔 탄띠를 두르고 방탄조끼에 철모를 쓴 늠름한 모습에 장병들의 사기는 물론 파월장병가족들까지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란히 걸읍시다’의 잉꼬 부부듀엣 ‘진송남 부부’의 음악적 끼와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2세 진민기 또한 최근 ‘그런 거야’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뮤지션.
노래가 삶의 전부였던 가수 진송남의 노래인생 55년, 총 3회에 걸쳐 그의 삶과 사랑을 함께 돌아본다. 그 세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베트남 1년 연장복무를 신청한 진송남, 남진, 태원은 파병 14개월만인 70년 9월, 20여 일간의 특별휴가를 받아 일시 귀국한다.
인기 절정일 무렵 파병되었던 만큼 이들에 대한 가요계와 팬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 기대만큼 잠깐의 휴가 일정이었지만 소속사인 지구레코드사는 이 틈을 이용해 신곡 취입을 강행했다. 

이때 취입한 곡들이 ‘종점의 밤(정두수 작사, 고봉산 작곡)’과 ‘꽃 한 송이(이용일, 고봉산)’, 그리고 ‘잊어야지(김중순 작사, 작곡) 등이었다. ‘꽃 한 송이’는 이후 이미자씨가 재취입하기도 했다.

짧은 휴가 중에도 방송 출연, 인터뷰 등 또 다른 스케줄 전쟁을 치러야했던 진송남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 1년간의 복무를 계속 이어간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의 감회는 남달랐다. 처음 베트남 전에 파병될 때는 ‘왜 낯선 나라 전쟁터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착잡한 심정이었지만 다시 베트남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의 각오는 남달랐다. 어차피 군 복무 기간이 남아 있으니 기왕이면 베트남 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이 그것. 생각해보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느껴졌고 그만큼 보람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정글의 나라, 베트남 전에서 또다시 젊음을 불사르다

▲ 정글의 나라 베트남에서 동료들과 함께. 좌로부터 남진, 진송남, 태원, 이명진
이들은 경비중대원으로써의 근무는 물론 틈틈이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휴양소의 장병들 위문공연을 계속했고 또한 호이안방송국에서 음악프로그램 ‘병사의 음악편지’ 진행을 맡는 등 1인3역의 임무를 충실히 해나갔다. 물론 이들의 월급이나 근무조건은 일반 사병과 다르지 않았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쟁터, 베트남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작전을 나갈 때면 반드시 탱크 바퀴자국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곳곳에 지뢰가 묻혀있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밀림의 수풀을 제거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에서 무차별로 살포되는 제초제는 또 어떠한가.

그러한 베트남에서 남진, 태원과 2년간 함께 생활하다 보니 동료애도 각별했고 에피소드 또한 많았다. ‘물 반, 고기 반’인 해안에서 수류탄으로 물고기 잡던 일, 또는 가끔 셋이 의기투합해 야간을 틈타 인근 장군식당으로 김치를 훔치러 다니기도 했다.

이때 진송남과 태원이 양쪽 출입문을 감시하고 행동대장은 남진이 맡았다. 한번은 식당 안으로 잠입해 들어간 남진이 이상하게도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도 되고 또 만일 들키기라도 한다면... 등등 가슴 졸이고 있을 무렵, 결국 한참 뒤에 나타난 남진의 손에 들린 건 겨우 배추김치 두 줄기(월남 배추는 우리나라 배추에 비해 길다)... 그리고 입주위엔 빨간 김치 자국으로 범벅이 돼있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일화지만 그만큼 고국이, 고향의 맛이 그리웠다. 아찔한 일화도 있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사이공으로 3박4일 휴가를 갔을 때였어요. 동행했던 보안대 친구가 더워서 웃통을 벗는데 벨트에 차고 있던 호신용 권총이 나왔어요, 남진이 신기해하며 만지작거리니까 보안대원이 총알 6발을 빼고 건네주었지요. 남진은 장난삼아 그 권총을 내 머리에 대고 총구를 겨눴어요. 순간적으로 당황해 ‘그러지 밀라’고 뿌리치자 ‘장난인데 너무 심하다’며 창문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알이 발사됐어요. 순간 모두 얼어붙었지요. 정말 아찔했어요. 그날 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양주를 마셨는데 전혀 취하지 않더군요.” 진송남의 회고다.

그러니 정작 당사자인 남진은 또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날 밤 호텔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침대까지 밤새 덜덜 떨리고 이불이 땀에 흠뻑 젖었더라고. 오죽하면 이 50년 전 일에 대해 작년 남진씨가 진송남씨에게 보낸 문자가 있다. 그 내용을 공개하자면,

“형님(진송남씨가 두 살 위라 형님으로 호칭한다), 가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사이공 휴가 때 형님과 태원이, 그리고 보안대 친구와 택시 안에서 총으로 장난치다가 형님 머리에 대고 내가 방아쇠 당기려다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창밖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알이 발사됐던 일,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고를 막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하 생략)”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이렇듯 생사가 교차하는 순간들도 많았다. 그렇게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진송남씨가 내린 결론은 ‘결국 살 사람은 산다,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이다.
이들은 베트남에서 남은 7개월을 포함, 22개월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71년 4월 귀국했다.

가요계 컴백,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제2전성기 구가

▲ 진송남 부부
귀국 후 진송남씨가 처음으로 무대에 선 곳은 서울시민회관에서의 ‘남진 귀국리사이틀’ 특별찬조출연 무대였다. 태원과 함께 우정 출연했다. 각자 히트곡과 더불어 남진, 태원과 함께 셋이 부른 노래는 당시 우리나라 최대 히트 곡이었던 ‘사랑해’.

그렇듯 당시 가요계 판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트로트의 시대에서 청년문화의 시대, 즉 포크송과 고고의 시대로 변한 것.

진송남의 컴백 이후 발표한 첫 히트 곡은 ‘옛 동산(황우루 작사, 김준규 작곡)’이다. 1972년 발표된 이 노래 수록 음반 타이틀은 ‘국내 6대 포크싱어 대향연’. 그렇듯 그는 통기타음악으로 먼저 승부를 걸었다. 이때 기타반주는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인 김희갑 선생이 맡았는데 이 음반을 통해 처음으로 12줄 기타를 선보였다. 4인조 연주인과 함께 노래를 동시 녹음했는데 취입 후 김희갑 선생이 ‘노래가 아주 좋다’고 칭찬해주어 한층 자신감이 붙었다.

이어 히트한 노래가 ‘오 님아(김준규, 김준규)’, ‘비와 함께(고향, 남국인)’ 그리고 ‘잘 있거라 공항이여(김준규, 김준규)’다. 한 음반에서 세 곡이 동시에 히트했다.
 
당시 유행의 흐름이 그랬듯 귀국 후 첫 히트곡인 ‘옛 동산’은 포크송, ‘오 님아’는 고고 리듬의 곡이었다.

“통기타 노래와 고고 춤이 한창 유행했고 동시에 극장쇼가 성행할 때였어요. 이 무렵 특히 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심지어 한 달 공연으로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였죠.”

그는 잇달아 ‘고향처녀(임석호, 임석호)’, ‘시오리 솔밭 길(정두수, 김준규)’ 등을 히트시키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많이 불렀어요. 트로트, 포크송, 고고 풍은 물론 스윙, 왈츠, 블루스까지, 이 모든 장르를 소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산MBC 전속가수 시절 트레이닝이 큰 도움을 주었지요.”

인기 가도를 질주했던 것만큼이나 공연 역시 줄을 이었다. 후유증도 뒤따랐다.

“혈기 왕성한 20~30대 때였지만 연속해서 하루 4회 공연이 계속 이어지다보니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쉬지 못해 목이 수시로 잠겼죠. 한 번은 ‘오 님아’의 부를 때 ‘님아...’ 하고 외치며 무대로 뛰어 나가야 하는데 목소리가 갈라져 공연을 망친 적도 있었고 대기시간에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어 순서를 놓친 일, 목이 쉬고 잠기어 공연을 그냥 포기한 적도 있었고...”

그래도 강행군은 계속되었다. 공백 기간이 길었던 만큼 팬들 앞에서 노래하고픈 열망이 컸던 탓이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공연 스케줄로 인해 취입한 노래 주인이 바뀐 경우도 있었다. 원희명 작곡의 ‘각시와 신랑(김주명 작사)’과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원희명 작사)’을 A, B면 타이틀로 12곡의 신곡 취입까지 마쳤는데 노래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음반을 보류해달라고 요청하고 지방공연을 떠났는데 돌아와 보니 이미 이 노래들이 남진, 이은하씨에게로 가서 히트곡이 되어 있었다.

현충일을 빼고는 쉬는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바빴던 진송남은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도 근처 삼남극장에서 ‘하춘화쇼’에 출연 중이었다. 밤 9시 경, 3회 공연을 마치고 4회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이리역 옆 여관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중 폭발사고가 터졌다.

“처음엔 전쟁이 난 줄 알았어요,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천정이 무너져 내렸죠, 순간 이불을 뒤집어썼는데도 머리 쪽에 유리 파편이 박힐 정도였어요. 정전이 되어 컴컴한 가운데 짐을 싸들고 맨발로 뛰쳐나와 무작정 반대방향으로 내달렸죠. 거리엔 온통 파편과 함께 놀라서 뛰쳐나온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지요. 그래도 큰 부상 없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베트남 참전의 노하우 덕분이었을까요?”

화전민의 감동실화 ‘시오리 솔밭 길’, 노래비 세워지다

‘솔바람 소리에 잠이 깨이면/어머님 손을 잡고 따라 나선 시오리길/학교 가는 솔밭 길은 멀고 험하여도/투정 없이 다니던 꿈같은 세월이여/어린 나의 졸업식 날 홀어머니는/내 손목을 부여잡고 슬피 우셨소/산새들 소리에 날이 밝으면/어머님 손을 잡고 따라 나선 시오리길.

(내레이션) 무슨 자랑 같습니다만 화전민의 무남독녀인 나는 일찍 아버님을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시오리 솔밭 길은 산새 우는 호젓한 길이었지만 어머니와 학교 가는 나에겐 신념에 찬 길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결석 한번 지각 한번 없었으니까요 꿈같은 세월은 흘러 난 모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에 어머니가 안 보이시는 까닭은 이젠 제가 혼자서도 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일까요?’ -시오리 솔밭 길(정두수 작사, 김준규 작곡. 진송남 노래)

1977년 발표한 ‘시오리 솔밭 길’은 노랫말에서 보듯 화전민 소녀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오리길 학교를 다녀야 했고, 훗날 그 학교의 교사로 부임했던 감동적인 실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애틋한 노래다.

이 노래의 노래비가 지난 2005년 11월, 작사가 정두수의 생가마을인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 세워졌다. 진송남씨의 유일한 노래비이기도 하다.

특히 이 노래의 작사가 정두수씨와는 초등학교 선후배, 그리고 작곡가 김준규씨와는 부산MBC 전속가수 선후배 사이다. 콤비였던 작곡가 김준규씨의 부인은 진송남 노래에 대해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목소리’라고 늘 강조해왔다.

부창부수, 진송남 부부 듀엣의 ‘나란히 걸읍시다’

▲ ‘나란히 걸읍시다(오아시스 OL-3212)’ 음반 재킷
91년부터 진송남씨는 부인 한인식씨와 듀엣 ‘진송남부부’로 활동을 전환한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한다’는 이 사자성어는 ‘서로 도와가며 행동이 일치하는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진송남 부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인 셈이다.

이들이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진송남씨가 신곡 ‘나란히 걸읍시다’를 받아 취입하게 되었는데 연습 중 부인이 노래를 도와 백 코러스해준 것을 음반사 측에서 듣고 곧바로 듀엣을 권유했다. 결국 이 노래를 시작으로 진송남씨는 부부 듀엣으로 전환, 지금까지 일곱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나란히 나란히 걸어갑시다/당신과 나 어느덧 머리엔 서리 내리고/눈가에 피어난 잔주름 깊어가는 구료/여보 우리 잔칫날 발맞추던 사뿐한 걸음새로/한자국도 앞서지 말고 뒤서지도 말고/나란히 나란히 걸음 맞추어/누구도 먼저 가지 말고 우리 함께 갑시다’ -나란히 걸읍시다(김창석 시, 김설강 보작, 이동훈 작곡, 진송남부부 노래)

중국 연변시인 김창석의 시를 작사가 김설강씨가 보작, 작곡가 이동훈씨가 곡을 붙였다. 김창석 시인이 학술대회 차 한국에 왔다가 건네준 시집에서 우연히 이 시를 보게 된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이 기획, 연석원 편곡으로 완성되었다. 대박을 예감한 손사장의 제의로 재킷도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사진작가 허종태(별명 허슬러)씨가 찍은 이 재킷사진은 낙엽 진 남산길과 덕수궁을 배경으로 촬영된 것이다.

이들 부부가 처음 만나던 당시 이야기를 부인 한인식씨에게 들어보았다.

“제가 어릴 때 처음 만났어요. 오빠 친구의 친구로 사실 저희 오빠와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친구들과 함께 저희 집에 놀러온 뒤 계속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주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아마 ‘제 눈에 안경’이라고 저를 예쁘게 본 것 같아요.”

‘나란히 걸읍시다’는 부부의 사랑을 담은 대표적인 노래다. 가정의 달이면 어김없이 불리어지는 부부노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우리 대중가요의 주 테마가 사랑이라는 점에서, 실제 부부가 함께 부르는 이러한 사랑노래는 그 의미가 한결 쉽고 가깝게 다가온다. 두 부부는 여섯 살 차이다.

“제 아내는 우연히 가수가 되었지만 사실은 유년시절부터 강화에서 노래를 잘 불러 동네에서 소문난 신동이었다고 해요. 저와 결혼하면서 가수의 꿈을 접었지만 뒤늦게 다시 저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으니 운명인 것 같기도 하고..,” 진송남씨의 말이다.

위기도 있었다. 부인 한인식씨가 1995년, 위암 판정을 받고 위의 80%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것.
“평범한 주부였던 아내에게 노래를 시킨 것이 괜히 병을 부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미안했어요. 이 무렵 ‘행운’이라는 노래를 취입할 땐 배에 힘을 줄 수가 없어 넥타이로 허리를 졸라맨 채 취입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 걸 보면 가수로써의 운명은 타고난 것 같아요.”

현재 이들 슬하에 가족은 1남2녀에 손주 5명. 특히 진송남 부부의 음악적 끼와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평가받는 아들 진민기씨 또한 작사, 작곡 실력이 뛰어나다. 최근 ‘그런 거야’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돈암초등학교 부근에서 기타와 드럼, 노래를 지도하는 학원 ‘예술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방송활동과 더불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인 진송남 부부,
“100세 시대에 건재함을 오래오래 보여주고 싶어요. 항상 풍부한 성량과 감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강관리에 특히 신경 써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노래로 감동과 위안을 전하는 게, 가수로써 남은 마지막 꿈이자 바람이죠.” NM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