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8.23 금 17:16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7년 10월 07일 (토) 23:36:32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김광석, 노찾사, 동물원
가수 김광석씨는 1996년 1월 6일 새벽,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경찰은 “우울증에 시달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가족과 팬들 사이에선 타살 주장이 나왔다.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때였고,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2017년 9월, 21년이 지나 김씨의 죽음이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미국에 있다던 그의 딸이 10년 전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인터넷에는 김씨와 딸의 사인(死因)과 관련해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지난달 30일 김씨의 타살 의혹을 다룬 다큐 영화 ‘김광석’이 개봉하면서 김씨 죽음에 다시 관심이 쏠렸다. 지난 20일에는 한 인터넷 매체가 “발달장애를 가진 김씨의 외동딸이 2007년 열여섯의 나이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일부에선 딸도 타살됐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한다.… <조선일보 2017년 9월 23일>

김광석(1964~1996)의 노래는 유행이나 시대를 초월해 누구나 공감하는 감성을 담고 있다. 삶의 특정한 순간에 떠올라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김광석의 노래다. 20대 초반 입대를 앞두고 스산한 마음일 때면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 위로를 삼는다. 서른이 가까워져 20대의 청춘을 떠나보내야 할 때면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서툰 사랑이 속상할 때면 ‘외사랑’으로 울음을 삼킨다. 아내를 떠나보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역시 세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집 음반(1993.3)
김광석의 삶은 특별하지도 빼어나지도 않았다. 노래를 좋아하고 잘해 어쩌다 보니 가수가 되었다. 누군가 성공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회사원처럼 기타를 들고 매일 공연장으로 출근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에게 가수는 직업이고 공연장은 직장이었다.
대구에서 태어난 김광석이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한 것은 5살 때였다. 경희중과 대광고에서 현악반과 합창단 활동을 하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을 뿐 그의 말대로 잘난 것 하나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명지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1982년 어느 날 김광석은 친구에게서 2권의 노래집을 받았다. 서울대 노래패인 ‘메아리’와 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펴낸 이른바 운동권 노래집이었다. 김광석은 노래책에 실린 악보를 기타로 퉁기며 한 소절씩 부르다가 대학연합 노래패인 ‘연합메아리’에 가입했다. 취미에 불과했던 기타 연주와 노래는 어느덧 특기가 되었다.
1984년 김민기가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을 기획하면서 연합메아리 멤버들을 소집했다. 김광석도 참여했다. 그러나 ‘개똥벌레 이야기’는 녹음까지 다 해놓고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동요극인데도 심의에서 탈락한 것이다. 김민기는 연합메아리에 새로운 음반 기획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온 음반이 1984년 12월에 발매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1집이다. 김광석의 역할은 합창곡 ‘그루터기’에 남자 코러스로 참여하는 데 그쳤다. 1집은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노찾사 노래가 꽃을 피운 것은 1987년 6월 항쟁 후였다. 민주주의를 만끽하던 그 시절 노찾사는 어디든 달려갔다. 1987년 10월 13일에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첫 정기 공연을 열었다.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불리던 저항의 노래가 마침내 공개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삶의 특정한 순간에 떠올라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공연은 6월 항쟁 이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를 수 없었던 노래들로 채워졌다. 4·19 때 죽어간 넋들을 위한 ‘진달래’, 김민기의 ‘친구’,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에 곡을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가락을 붙인 ‘녹두꽃’ 등이 무대를 장식했다. 김광석은 ‘녹두꽃’을 유려한 미성으로 불러 관객을 사로잡았다. 공연 후 집회가 있는 곳이면 김광석도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핍박받는 약자의 슬픔을 진중한 노랫말에 담아낸 노찾사의 노래 역시 노동자와 대학생에게 사랑을 받았다.
노찾사는 1989년 10월 2집을 발표했다. 2집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불후의 명곡들이 즐비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에 힘입어 1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노찾사는 1990년대 이후 시들해진 민중운동과 더불어 쇠퇴했다. 좀 더 상업성을 갖춘 노래로 전환하지도, 굳이 전환하려 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멤버들의 각기 다른 지향점도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노찾사에는 현장 활동을 중시하는 그룹, 전문 역량으로 음악운동을 지향하는 그룹, 아마추어적인 활동 영역을 추구하는 그룹 등 다양한 그룹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래도 3집(1991), 4집(1994) 등 6집까지 꾸준히 내다가 1997년 해체되었다. 그동안 노찾사를 거쳐간 단원들은 150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가수로 활동하게 될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신지아 등을 빼고는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늘날 노찾사는 민중가요나 운동권 가요로 불리던 한국의 저항적 노래운동사에서 공식적인 첫 전문 창작집단으로 기록되고 있다.
김광석은 노찾사 활동을 하고 있던 1987년 여름,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30곡의 노래를 녹음해 테이프에 담았다. 김광석을 비롯해 김창기, 박경찬, 박기영, 유준열, 이성우, 최형규 등 7명이 녹음에 참여했다. 어느 날 산울림의 김창완이 노래를 듣고 그들을 소집했다. 그래서 1988년 1월 발표된 음반이 동물원 1집(거리에서/변해가네)이다.
소박하고 기교가 없는 동물원의 노래는 신선했다. 뛰어난 작사 작곡 능력을 갖춘 멤버들의 재능에 김광석이라는 보컬의 역할이 어우러져 1집은 빅히트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수록곡 중 특히 상실감이 짙게 배어 있는 ‘거리에서’는 사실상 무명에 가깝던 김광석을 대중에게 새롭게 인식시켰다. 1집 음반은 100만 장 이상 팔리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동물원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김광석은 동물원 2집(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에도 참여해 타이틀곡의 보컬로 음반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김광석은 멤버들과는 음악적인 지향점이 달랐다. 멤버들 대부분은 음악을 업으로 삼으려는 의지가 약했다. 김광석은 가수가 되려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아마추어이기를 원했다. 김광석은 1989년 5월 공연을 끝으로 동물원과 결별했다.

진실을 밝혀줄 아무런 단서도 없는 황망한 죽음

김광석은 1989년 9월 ‘너에게’를 타이틀곡으로 하고 자신의 자작곡 6곡을 수록한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직업 가수로 데뷔했다. 10월 7일부터 3일간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열었다.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이후 공연 무대가 자신의 직장이라고 생각하며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가리지 않았다.
김광석은 1991년 3월 2집을 발표했다. 2집 역시 1집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2집에 수록된 ‘사랑했지만’이 가요 순위에서 1, 2위를 다툰 덕에 대중에게 제법 알려지고 방송에 출연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래도 그는 소극장 공연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다. 1991년 7월 1일부터 31일까지는 마당세실극장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루 2회 공연을 강행했다. 누가 봐도 무모한 시도였지만 연일 대만원을 이뤘다.
김광석이 뮤지션으로 정체성을 찾은 것은 ‘나의 노래’가 담긴 3집(1992.3)부터였다. 3집은 그의 음악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삶으로서의 노래’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해 그의 음악 세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음반이었다. 김광석이 새롭게 각광을 받은 것은 ‘다시 부르기’ 1집과 2집 발매 후였다. ‘다시 부르기 1’(1993.3)은 동물원과 자신의 앨범에서 뽑아낸 노래들과, 한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민중음악 진영에서 김현성·한동헌·문대현의 노래들로 구성된 자전적 베스트 앨범이었다. ‘다시 부르기 1’에는 ‘이등병의 편지’, ‘그루터기’, ‘광야에서’, ‘거리에서’ 등 애창곡이 수록되었다.
이후 ‘서른 즈음에’, ‘일어나’가 수록된 4집 앨범(1994.6)을 발매하고 ‘다시 부르기 2’(1995.4) 앨범을 냈다. ‘다시 부르기 2’는 1970년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오는 흐름과 계보를 하나의 음반으로 정리하기 위해 낸 ‘한국 모던포크의 대표곡 모음집’이었다. 김광석은 ‘다시 부르기’ 시리즈를 통해 묻히고 잊힌 노래들을 발굴하고 특정 계층에만 회자되던 노래들을 대중에게 선물했다.
1990년대의 소극장 공연은 퇴조기였다. 가수도 라이브 공연에 연연하지 않고 관객도 찾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광석은 라이브 공연을 고집했다. 김광석이 마침내 소극장 라이브 공연 1.000회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것은 1995년 8월 11일이었다.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던 김광석이 1996년 1월 6일 새벽 한마디 말도, 변명 거리 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팬들의 곁을 떠나갔다. 유언장이 없는 자살, 죽음의 진실을 밝혀줄 아무런 단서도 없는 황망한 죽음이었다. 무수한 의혹과 억측만을 남긴 채 그렇게 지상에서 모습을 지웠다.


■한강대교 개통 100년
한강철교는 1900년 7월 개통했다. 사람이나 자동차는 다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10년대 들어 자동차와 보행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인도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4월 한강 인도교 공사를 시작해 1917년 10월 7일 개통식을 열었다. 개통 당시의 이름은 한강 인도교였다. 중지도(노들섬)를 중심으로 노량진 쪽으로는 한껏 멋을 부린 아치교가, 용산 쪽으로는 목재로 만든 가교가 설치되고 중간에는 둑을 쌓아 다리를 연결했다. 폭은 중앙차도 4.5m, 좌우 보도 각각 1.6m를 합쳐 7.7m였다.

한강 인도교는 개통과 더불어 장안의 명물로 자리를 잡았으나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골칫거리였다. 실연을 비관한 처녀, 생계가 막막한 청년, 심지어 ‘조선독립’의 한을 품은 청년도 강물에 뛰어들었다. 일제는 파출소를 설치하고 다리 난간에 ‘잠깐만 참으세요’라는 뜻의 ‘일촌대기(一寸待機)’라는 큼지막한 팻말을 붙이면서까지 자살 방지에 부심했지만 떨어져 죽겠다는 사람들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1923년부터 1937년까지 한강 투신자는 832명이나 되었다(조선일보 1938.8.27). 여름철에는 한강다리 밑이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려 최고의 피서지로 꼽혔다.
1925년 을축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고 용산 쪽 가교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다리 운행이 한때 중단되었으나 용산 쪽에서 원래 둑이 있는 곳까지 다리를 다시 놓아 1929년 9월 18일 두 번째 도교식을 치렀다. 자동차가 계속 증가하고 노량진·영등포 일대가 급격하게 발전하자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다리를 허물고 새 다리를 세운 뒤 1936년 10월 23일 세 번째 도교식을 열었다. 다리 폭을 19.99m로 넓혀 좌우양측에 각각 차도와 인도를 설치하고 중앙에는 복선의 전차궤도를 신설해 노량진까지 전차 노선을 연장했다.
그러나 6·25는 한강 인도교에 또 한 번 상처를 안겼다. 우리 군의 폭파로 당시 정부 추산 약 500~800명에 달하는 인명이 다리와 함께 강물 속에 수장된 것이다. 7년간 방치되다가 1957년 1월 복구공사를 시작해 1958년 5월 15일 다시 준공식을 열어 한강대교라는 새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12월 24일 쌍둥이 다리를 개통한 것까지 포함하면 한강 인도교는 도교식을 5번 치렀다.

한강인도교, 개통과 더불어 장안의 명물로 자리 잡아

▲ 한강인도교 개통 초기 모습
한강철교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철교 완공 10개월 전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었다.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이 땅에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첫 기적소리를 냈다. 그것은 철도의 탄생을 알리는 문명의 소리였으나 곧 닥쳐올 식민지 시대의 어둠을 예고하는 신음이기도 했다. 서구 사회에서 철도는 개화와 근대 문명의 축복이었겠지만 식민지 조선의 백성에게는 수탈의 수단일 뿐이었다.
노량진과 제물포 간 33.2㎞를 잇는 경인선은 일제가 해외에 처음 부설한 철도라는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 팽창 전략의 첫걸음이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한 당시 독립신문은 경인선 개통 다음날 신문에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놀라움을 전했다.
일제가 철도에 욕심을 낸 것은 철도를 이용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중국 대륙과 러시아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1899년 4월 23일 인천에서 경인선 기공식을 연 뒤 공사에 급피치를 올려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을 개통했다. 경인선은 4대의 증기기관차가 객차 6량, 화차 28량을 달고 매일 두 번 제물포와 노량진을 왕복했다.

한강철교, 20세기 기술 문명을 예고하는 신호탄

노량진~제물포 구간만 운영되던 경인열차가 한강을 건너 서울역까지 달리기 시작한 것은 10개월이 지난 뒤였다. 노량진에서 한강 남안에 이르는 궤도 부설 공사는 1899년 9월 말 완료되었고, 한강 북안에서 남대문정거장(서울역)까지 공사는 한강의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1,110m 길이의 한강 철교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완료되어 한강 철교가 공식적으로 준공된 1900년 7월 5일 경인선 전구간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한강철교는 비록 일본 기술로 완성되긴 했지만 20세기 첫해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한강에 놓여진 첫 다리였다는 점에서 20세기 기술 문명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전장 39.3㎞에 이르는 경인선 전 구간 영업은 1900년 7월 8일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육로로 12시간, 수로로 몇 시간이 걸리던 인천과 남대문 사이는 불과 2시간 남짓 거리로 단축되었다.
경인철도의 완전 개통을 기념하는 개업식은 1900년 11월 12일 서울의 남대문정거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후 일제는 경부선(1905), 경의선(1906), 호남선(1914), 경원선(1914), 충북선(1928), 장항선(1931), 전라선(1936), 경춘선(1939), 중앙선(1942) 등 한반도 곳곳에 수탈의 그물을 촘촘히 쳐 나갔다.
한강에 두 번째 철교가 세워진 것은 1912년 9월이었다. 경부선 부설(1905)로 운송량이 급격하게 증대하자 첫 한강철교(A교) 상류 쪽에 제2한강철교(B교)를 세운 것이다. 1944년 8월에는 A교 하류에 복선인 제3한강철교(C교)를 세워 한강철교는 3개가 되었으나 6·25 때 모두 폭파되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가복구한 상태에서 임시로 사용되다가 1957년 7월 C교를, 1969년 6월 A·B교를 복구했다. 1994년 12월 경인선 재확장과 함께 또 하나의 복선 철교(D교)를 A교와 B교 사이에 부설해 현재 용산역과 노량진역 사이에는 4개의 철교가 있다. NM


 

김정형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