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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7년 09월 08일 (금) 02:10:03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미당 서정주 시집 전20권 완간
은행나무 출판사(대표 주연선)가 5년 작업 끝에 마무리 지은 ‘미당 서정주 전집’은 시 950편을 비롯해 시론(詩論)·수필·여행기·평전·소설·희곡 등 시인이 남긴 원고 대부분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은 것이다. 미당이 발표한 1000여 편의 시 중에서 시집에 실은 것들만 전집에 수록했다. 편집위원회(이남호·이경철·윤재웅·전옥란·최현식)는 “미당이 발표해 놓고 시집에 넣지 않은 시 중 빼어난 작품이 적지 않지만, 시인의 뜻을 존중해 전집에 넣지 않았다”며 “논란이 된 친일시 4편도 기존 시집에 없던 것이므로 빠졌다”고 설명했다. 편집위원회는 미당의 업적에 대해 “겨레의 말을 잘 구사한 시인이요, 겨레의 고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일보 2017년 8월 22일>

“시의 정부(政府)”, “큰 시인을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그가 만지거나 느끼는 것은 모두 시”, “단군 이래 최고 시인”, “그의 시에 이르러 한국 현대시가 독자적인 시어를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서정주(1915~2000)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노래한 서정시의 최고봉이자 문단의 큰 별이었다. 한때 교과서에 그의 시가 10편이나 실릴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 시인’이었다.
서정주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이던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학교를 떠나야 했다. 1931년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으나 그마저도 자퇴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1933년 가을 일본의 톨스토이주의자 하마다 다쓰오가 서울 도화동에 세운 빈민굴에서 잠시 넝마주이를 하는 등 방황기를 보내고 있을 때 박한영 대종사가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다. 박한영은 안암동 개운사 뒤 대원암에서 서정주에게 불교 경전을 가르치다가 시인이 될 재목임을 간파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시켰다. 이때도 서정주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서정주는 1935년 ‘시건설’지에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널리 알려진 시 ‘자화상’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고 그해 11월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함께 창립한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향토적이고 본능적인 생명력을 노래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 ‘화사’가 실린 것도 시인부락 2호였다. 그의 시 작업은 1930년대를 풍미한 김기림·이상 등의 모더니즘은 물론 1920년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한때 교과서에 그의 시가 10편이나 실릴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 시인’

▲ 미당 서정주
1941년 2월 10일 발간한 첫 시집 ‘화사집’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을 원색적 언어로 토해내고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그에게 선사하며 ‘한국의 보들레르’란 별칭을 안겨주었다. 문학청년 윤동주가 밤새워 베꼈다는 ‘화사집’에는 표제시 ‘화사’를 비롯해 ‘자화상’ 등 모두 2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지금도 전 국민이 애송하는 시의 하나인 ‘국화 옆에서’는 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해방 후 서정주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순수문학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의 시적 경향은 6·25 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서정주는 말년까지 숱한 명시를 남긴 영원한 현역 시인이었다.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시작해 ‘귀촉도’(1948), ‘서정주 시선’(1956), ‘신라초’(1961),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을 거쳐 1997년 마지막이자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시집으로는 15권, 편수로는 미발표작까지 합쳐 1,000여 편의 시를 쓰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다작은 국내에도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서정주는 이렇게 시로 일가를 이뤘으나 틈만 나면 끝없이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세계 문인 중에서 가장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임을 자처할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으며 70대 후반에는 러시아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세계의 산 이름 1,625개를 매일 아침마다 외우기도 했다. 서정주는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갖고 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추천되었다.
“소설에 김동리, 시에 서정주”라는 격찬을 들었지만 그에게는 일제와 독재 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비판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1943년 9월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 들어가 친일색이 농후한 문학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도우며 모두 11편의 시, 수필, 소설, 종군기 등을 발표하고 1981년 2월에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전두환을 지지하는 TV 연설을 했다.
서정주는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며 친일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회했으나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하고 서정주를 ‘시의 정부’라고 치켜세우던 고은 역시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실존적 자아의식이나 근대적 역사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다”며 스승의 삶과 시를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 정서로 쌓아올린 그의 시적 성취는 이러한 굴절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시를 남겼다”며 존경을 바치는 문인도 많다. 서정주는 2000년 12월 24일 사람들 가슴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놓고 눈을 감았다. 평생을 오누이처럼 해로하던 부인이 별세한 지 2달여 만이었다. 소설가 이문구는 이렇게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예컨대 오답을 유도하거나 위답을 기대하는 뒤틀린 심사와 무엇이 다르겠나. 어여튼 한 잔 따라 올리겠다.”


■신돌석, 최신예 잠수함 ‘신돌석함’으로 부활
구한말 평민 의병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던 신돌석 장군이 해군의 1800톤급 최신예 잠수함으로 부활해 대한민국의 영해를 지키게 됐다. 해군은 8월 14일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제국 당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신돌석 장군의 애국심을 기리고 국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새로 건조 중인 214급 잠수함 9번함의 함명을 ‘신돌석함’으로 명명했다. 신돌석함은 대함전과 대잠수함전, 공격기뢰부설 임무 등을 수행할 수 있으며 특히 적의 핵심시설에 대한 장거리 정밀 타격이 가능한 국산 순항미사일을 탑재한다. <뉴스1 2017년 8월 14일>

▲ 신돌석 장군 기념관 안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신돌석(1878~1908)은 30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항일 무력투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후기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시대 다른 의병들과 달리 홍길동이나 전우치처럼 온갖 신화의 주인공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축지법을 쓰고 전신주를 뽑아 일본군을 쳐 죽였다는 등의 무용담도 신돌석에게서만 발견되는 특징이다. 더구나 그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보니 그저 바람결처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도호부 남면 복평리 정신곡, 지금의 주소로는 영덕군 축산면 도곡동에서 태어났다. 선조 중에는 양반에 해당하는 향리가 적지 않았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고 직책을 받지 못해 신돌석이 태어날 무렵에는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친이 적당한 재산을 갖고 있어 신돌석은 양반가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양반들과 교류했다.
신돌석은 18살이던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는 전기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펼쳐졌을 때 고향의 영덕 의진(義陣·의병부대)에 참가했다. 1897년 7월 관군을 상대로 벌인 남천쑤(남천숲) 전투에도 참전, 영덕 의진이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후에도 간헐적인 전투에 참가했으나 1897년 말 의병이 해산하자 이후 10년간 전국을 방랑하며 지사들과 교유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살폈다. 이 가운데는 1908년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의병대장 허위의 제자로 훗날 대한광복회를 조직한 박상진, 전기의병 당시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용맹을 떨친 이강년, 1907년 군대해산 후 원주 진위대 장병을 이끌고 의병항쟁을 수행한 민긍호 등이 있었다.

항일 무력투쟁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후기 의병운동의 대표적 인물

신돌석은 1906년 4월 경북 영덕에서 자신의 의병을 조직함으로써 후기 의병사에 길이 빛나는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신돌석은 의병 이름을 ‘영릉(영해·강릉)’이라고 짓고 영릉의병장을 자처했다. 신돌석의 의진에는 가족들도 참가했다. 비교적 살림이 넉넉했던 부친은 가산을 처분해 아들을 지원하고 매형은 의병 활동 중 체포되어 곤란을 겪었으며 처남은 신돌석 의진의 도영장으로 청송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 신돌석의 동생은 형의 순국 후 원수를 갚으러 나섰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영릉 의진은 평민 출신 의병장에 일부 양반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의진들과 달랐다. 구성원은 대부분 농민이었으나 보부상, 어민, 동몽(남자아이), 전직 주사, 참봉, 사족, 유생 출신도 있었다. 유교적 지배 질서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돌석은 먼저 영해 부근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일본의 전초기지로 육성되고 있던 울진을 목표로 삼아 모두 4차례 공격해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성공했다. 이후 영양과 울진 관아, 영해읍과 영덕읍을 공격하며 세를 과시했다. 1906년 11월에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여 영주와 순흥을 공략했다. 활동 무대는 남으로는 경상도 영덕, 포항, 경주 접경지, 북으로는 강원도 삼척 남부, 서로는 일월산에서 영양을 거쳐 청송에 이르기까지 경상북도 전역을 포괄했다.
신돌석 부대는 200~300명 단위로 작전을 펼쳤다. 잠자리는 주로 촌락의 민가를 사용했으며 물자가 풍부하고 활동 반경이 넓었다. 무기는 화승총이 주류를 이뤘으나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양총도 보유했다. 주요 공격 대상은 영양·진보·청송·울진·평해·영해·영덕 등지의 관아였으나 때로는 일본이 장악했거나 일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경무서와 우편소 등을 습격했다. 일본 어부나 수산업자들도 공격 목표의 하나였다. 백두대간의 일월산과 백암산을 따라 남북으로 이동하고 동해안의 울진, 평해, 영덕 등지를 오르내렸다.
이인영이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 연합부대인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했을 때는 교남(경상) 창의대장으로 발표되었으나 신돌석이 양주로 이동하지 않고 자신의 근거지에서 계속 전투를 벌여 한 달 뒤에는 다른 의병장으로 교체되었다.

유교적 지배 질서 사회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

이렇게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신돌석 의진의 활동 범위가 현격히 축소된 것은 1907년 말 시작된 ‘신돌석 생포 작전’의 여파였다. 일본 경찰은 골짜기를 누비면서 의병 용의자들을 색출하고 의병과 주민 사이의 연결 고리를 잘라버려 신출귀몰하는 신돌석을 압박했다. 1907년 말 일제가 발급한 ‘면죄문빙(免罪文憑·귀순자의 죄를 면하는 증서)’과 1908년 6월 만들어진 헌병 보조원 제도는 결정타였다.
일제는 1908년 9월 무뢰한으로 구성된 4,000여 명의 보조원을 선발해 헌병·경찰과 함께 활동하게 했는데 이들은 특정 지역의 지리, 친인척 관계 및 활동 양상까지 훤하게 꿰고 있어 의병에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결국 신돌석 의진에서도 투항자가 나타나 신돌석은 기동력을 이용한 유격전 양상으로 전술을 바꿔야 했다. 부대 규모는 100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숙식은 거의 산중 요새에서 해결했으며 힘겨운 산악 행군도 잦아졌다.
그래도 신돌석은 여전히 일본군에겐 골치 아픈 존재였다. 일경은 수차례나 집중적인 토벌 작전을 펼쳐 의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고 보고하면서도, 보고서마다 ‘귀신같이 움직여서 토벌할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빼놓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신돌석 생포 작전에 실패하자 회유책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피신해 있던 신돌석의 아내와 3살 난 아들을 찾아내 한 달 동안 후하게 대접한 뒤 서신을 딸려 신돌석에게 보냈다. 신돌석은 “어찌 죽지 않고 왔느냐”고 일갈하고는 편지를 펴보지도 않고 불 속에 던져버렸다.

그저 바람결처럼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많다.

1908년 후반기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의병 투항자가 급증했다. 신돌석의 부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곧 닥칠 혹한도 큰 부담이었다. 1906년 겨울은 무기를 숨겨두고 일시적으로 해산해 견뎠고 1907년 겨울은 대규모 부대를 이끌면서 두 차례의 토벌 작전으로 극복했지만 1908년 겨울은 그 전과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보급도 갈수록 어려워져 더 이상 버틴다면 남은 부하들의 희생만 가져올 뿐이었다. 결국 신돌석은 1908년 10월 몇 명의 인원만 남기고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다. 자신은 만주로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신돌석은 12월 11일 밤 9시 무렵 영덕군 북면 눌곡(현 지품면 눌곡)으로 가 과거 자신의 부장이던 김도윤(김상렬로도 불림)과 그의 형 김도룡(김상근으로도 불림)을 만났다. 그런데 며칠 후 일본 경찰이 “신돌석이 12월 12일(음력 11월 19일) 새벽 1시 무렵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신돌석이 1908년 8월 귀순한 김도윤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형 김도룡과 언쟁이 벌어지자 김도윤이 돌로 신돌석의 뒤통수를 내리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 무렵 한국인이 작성한 기록물에는 김도윤 형제가 현상금을 타낼 목적으로 신돌석을 취하게 한 후 살해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현장을 조사한 일본 측 기록이 더 신뢰를 받고 있다. 김도룡은 체포되고 김도윤은 도주했다.
신돌석의 시신은 12일 오후 6시 30분 영덕으로 옮겨졌고 신돌석 부하들의 확인을 거쳐 신돌석인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시신은 신돌석의 집 뒷산에 매장되었다가 1971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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