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0.19 화 15:54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국제·통일
     
한국전쟁 애환과 통곡의 3년 1개월
아직도 그들은 고향에 가고 싶다!
2009년 06월 15일 (월) 15:49:00 김희준 전문기자 juderow9@newsmaker.or.kr

1945년 8월 15일, 그 순간부터 분단된 대한민국,
분단된 순간부터 휴전 협정, 그리고 현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이남으로 북한의 대대적인 침략이 시작됐다. 민족이 민족을 겨눈 이 전쟁은 장장 3년 1개월 뒤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순간까지 많은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낸 채 끝났다. 평화통일로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뒤로 한 채 1953년 7월 27일부터 지금까지 휴전선은 그 자리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남북한 민족에게 말없이 훈계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한이 총구를 겨눈 채 3년 1개월 동안 싸우게 된 원인은 다름 아닌 열강의 이념 차이였다.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를 위해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하필 이들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강대국이었고, 이들에 의해 한국은 원하지 않는 분단국가가 되고 말았다. 1945년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으며, 치욕의 역사로 기록될만한 이 분단의 나비효과는 세계 어디에도 현재 보상받을 길이 없다. 현재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 분단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호국보훈의 달인 6월, 다시 한 번 조명해 보도록 한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카이로회담을 통해 이미 나라의 독립은 약속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전후처리를 위해 미국과 소련 등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처리하기로 돼 있었다. 소련은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해 허울뿐이었던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했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했다. 미군 제 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해 이튿날 서울에 입성했다. 자유주의를 대표하던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던 소련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 입성한 것은 바로 국토 분단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특히 북한에 진주한 소련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켰고, 경원선 하행 열차를 전곡역까지만 운행하게 하는 등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한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힘으로써 한반도를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국가로 전락시키는 데 힘을 실었다.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소련의 목적과 공산주의 정부가 출현한다는 것에 대해 미국의 타협은 있을 수 없었고, 한국의 통일 문제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도 출범했지만 극도의 의견 차이만 확인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미국은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정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분단’이라는 기정사실을 받아들인 채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UN의 힘을 빌려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했으며 선거감시를 위한 UN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했다. 하지만 UN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UN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1948년 2월 26일, UN 소총회는 ‘UN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고 5월 10일,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UN 감시 하에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됐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9월 9일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의 보호 아래 흑백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들의 승인을 얻어냈지만, 12월 12일 제3차 UN 총회에서는 대한민국 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포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했다.
   

북한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도운 소련
이후 소련은 적극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돕기 시작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은 자유중국과 맺은 우호조약을 무시하고 자유중국군의 만주진입을 적극 통제했으며 만주를 중공군의 성역으로 보호하는 한편, 중공군이 만주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중공군의 전력 증강에 힘썼다. 중공의 대륙제패가 기정사실화되자 소련은 북한군의 강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소련 및 중공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각종 무기를 들여오고 남한 내의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고 이에 소련은 북한군에 3천여 명의 군사고문관을 배치해 직접 남침 준비를 시켰으며 소련 출신 한인들을 중심으로 제105전차여단을 창설했다. 또한 해군과 공군의 창설을 돕고 내무성 산하에 보안대, 경비대 등의 이름으로 막강한 군사예비군을 확보했다. 김일성은 남한에 끊임없이 게릴라를 남파하거나 남한 내에 있는 불순세력을 조종해 사회, 정치적 불안을 조성시키고, 한국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방해했다. 1950년까지 북한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남한 전역의 지형의 연구와 이를 토대로 지속적은 훈련을 강행하면서 남침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했고 소련 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이전에 북한에서 철수함으로써 남침기도를 철저히 은폐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은 남한이 먼저 공격했고 이에 방어 차원에서 진군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김일성의 무력 적화통일 야욕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1949년의 조소군사비밀협정, 중공과의 상호방위 조약 및 중국대륙의 공산화, 주한미군철수, 1950년의 애치슨 성명(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 그리고 무력침공에 대한 스탈린의 승인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
미국을 비롯 16개국의 군사지원 및 UN군 창설

북한군의 공격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시작됐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 국회의원 선거,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 사건들로 인해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해 오다가 6월 23일 24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이 해제되면서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중인 상태였기에 기습공격의 강도는 더했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그리고 특수 독립연대들로 구성된 총 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투입했으며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했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 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 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 4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 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왔다. 남침이 시작되자 미국정부는 이를 남한에 대한 북괴의 파괴, 침략행위로 보고 즉각 UN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했다. 침략 당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을 채택, 북한의 남침을 ‘평화의 파괴’라 선언하고 적대행위의 중지와 북한군의 38선까지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이 결의안 집행에 있어 모든 회원국이 UN에 모든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에 원조를 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 회합에서 미국대표 W. R. 오스틴 대사는 6월 25일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무시한 북한군의 계속적인 남침은 “국제연합 자체에 대한 공격”이라 천명하고 국제평화 회복을 위해 강력한 제재를 취하는 것이 안전보장이사회의 임무라고 선언했으며 같은 날 정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발표문을 낭독한 후 “결의안과 본인의 성명요지 및 트루먼 대통령이 취한조치의 중점은 UN의 목적과 원칙, 즉 평화를 지지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재차 안전보장이사회는 찬성 7, 반대 1, 기권 2, 결석 1로 UN 회원국들이 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결의안을 채택하는 동안 소련은 줄곧 이 회의에 결석했고, 공산측은 결석을 “거부권의 행사”라고 주장하며 모든 결의안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UN의 관행상 결석은 거부권 행사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임이사국인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모든 결의가 무효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소련의 결석은 UN군의 창설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기도 했다. 한편 미국과 관계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이러한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맥아더 장군이 UN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고 그 밖의 많은 나라들도 각종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대한민국에 제공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 개입
이후 휴전협정이 맺어지기까지
맥아더 장군의 성공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국군과 UN군은 전세를 역전시켰다. 패주를 거듭한 북한군은 북으로 쫓겨 갔고 1950년 10월, 국군과 UN군은 평양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를 받으며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면서 꿈의 평화통일을 눈앞에 두게 된 국군과 UN군. 하지만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평화통일의 꿈은 접어야 했다. 1950년 12월 말, 국군과 UN군은 38선 이남으로 다시 철수를 해야 했고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을 내주고 천안 부근까지 후퇴했다. 1951년 2월 1일, UN 총회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의 보고에 따라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가맹국에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공은 이러한 총회의 정전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처음 휴전협정을 제의한 사람은 말리크 소련 UN대표였다. 이후 1951년 6월 30일 맥아더 사련관의 후임으로 한국에 날아온 리지웨이 장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원산항에 있는 네덜란드 병원선에서의 회담을 제안했고 1, 2차 춘계공세를 통해 많은 병력을 잃은 중공군도 한반도에서 무력으로 UN군을 격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회담개최 의사를 밝혔다. 1951년 7월 8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위한 쌍방의 연락장교회담이 개최돼 쌍방의 정부대표 명단이 교환됐고, 그 해 10월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다. 회담은 장기화됐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전쟁포로의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에 대해 성실하게 교섭하지 않으려는 공산측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에 UN군 사령부는 2회에 걸쳐 총 9개월 동안 회담을 중지시킨 적도 있었다. UN 총회는 1952년 12월 3일, 자유의사에 의한 송환원칙을 재확인하고 전쟁포로문제 해결을 위한 총괄적 계획을 제안했으나 공산측은 이를 거부했고 휴전 지연책을 쓴 것과 동시에 1953년 7월 13일과 14일에 전란 중 최대의 공세를 취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7월 27일 비로소 판문점에서 UN군 사령관과 공산군 사령관 간에 휴전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의 긴 전쟁이 비로소 끝을 맺게 되었다. 협정은 영문, 한글, 한문으로 작성됐고 내용은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언은 협정의 체결 목적, 성격, 적용, 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2조는 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3조는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4조는 쌍방관계 정부들에 대한 건의, 5조는 부칙, 부록은 중립국 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남북의 전쟁 포화는 멎었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었다. 또한 국제연합군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되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었으며, 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됐다. 이후 현재까지 60년이 다 되도록 이 협정 체제는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국제 관례상 정전협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경우는 한반도가 유일하다. 휴전 이후 휴전협정 제60항에 의거,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대한민국과 UN군 측의 16개 참전국 그리고 공산군 측의 북한, 중공 및 소련 등 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대한민국과 UN군 측 참전 16개국은 한국문제의 정치적 해결방안으로 ‘UN감시 하에 남북한 토착인구 비례에 의하여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자유총선거를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고, 그 결과에 의하여 통일 독립된 민주적 한국정부를 수립하자’는 안을 제시하고, 주한 UN군은 이러한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전을 지키게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공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를 강요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 위장평화통일 제안을 내놓았으며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함으로써 회담을 교착시켰다. 결국 회담은 같은 해 6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반도의 휴전선은 기정사실화 되었으며 남북이 허리가 잘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 초기 집중된 남한의 피해에 비해
   
북한의 피해는 훨씬 심각해
3년 1개월간에 걸친 동족상진의 비극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음은 물론, 막대한 인명피해를 야기시켰다. 전투 병력의 손실만 해도 UN군은 국군을 포함, 18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도 9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약 100만 명에 육박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는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해 이른바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경우였다.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천여 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 종교인, 공무원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 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치하에서 탈출해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가 1200만 명임을 감안했을 때, 약 1/4 정도가 북한을 떠난 것이다. 한편 남한은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 남한의 경우 전선이 교착되기 전인 1951년 6월 이전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전쟁 발발 15개월 만에 입은 재산 피해만도 2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1949년의 국민총생산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는 액수였다. 제조업에서는 섬유산업이 가장 피해가 컸고, 화학, 요업, 기계공업 등이 그 뒤를 따랐다. 국민 총생산은 1949년 9.7%, 1950년 -15.1%, 1951년 -6.1%를 기록했지만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미국의 원조에 힘입은 남한은 1952년 8.0%, 1953년 25.7%를 기록했다. 하지만 국민총생산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는 195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그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 남한은 전쟁 초기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은 데 비해 북한은 전 기간 내내 피해를 입었고,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에도 미국이 융단폭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그 피해는 훨씬 컸다. 전쟁 중 8700여 개의 공장, 기업체가 완전히 파괴된 것을 비롯, 공업생산은 전쟁 전의 64%로 줄어들었다. 한편 1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지금까지 이념 차이로 인해 부모와 형제의 생사조차 모르는 많은 이들이 있다. 지난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펼쳤을 때, 같은 남한 내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생사를 몰랐던 많은 이들이 다시 부모 형제를 찾음으로써 전국은 한동안 눈물바다로 들썩였다. 이후 남북한은 이산가족상봉을 통해 북쪽에 있는 부모와 형제의 생사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끔 해주었지만, 매일 봐도 또 보고 싶은 가족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곳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들의 아픔은 어느 누가 보상해줘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다.

현재 북한은 말도 안되는 갖가지 협상 카드를 들이밀며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발사한 광명성 2호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음은 물론, 김정일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함과 동시에 자신이 여전히 건재하며 곧 후계자 양성을 통해 현재 체제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바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도왔던 중국과 러시아까지 당황하게 하고 있으며, 전 세계는 그야말로 ‘유일한 분단국가’를 지켜보는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예전에 비해 북한에 대한 시선은 많이 고와진 것이 사실이다. 80년대만 해도 초등학교 조회시간에 외치된 “멸공통일”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오래이며, 쉽진 않아도 북한과의 왕래도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북한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현재의 모습은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매년 6월이면 ‘호국보훈의 달’이라며 갖가지 행사와 기념식을 갖지만, 정작 평화통일을 위해 진정으로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짚어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야 할 것인가? NM

김희준 전문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