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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7년 07월 10일 (월) 15:10:59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효순·미선의 죽음과 반미 촛불 집회
지난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서 치러진 ‘효순·미선양 15주기 추모제’는 특별했다. 2002년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의해 도로에서 사망한 신효순(당시 14세·중2)양의 아버지 신현수(62)씨가 14년 만에 참석했다. 신씨는 1주기 때만 행사에 나오고 이후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묻자 “행사가 반미 등 정치적으로 흐를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집에서 가족과 조용히 추모했다”고 말했다. 또 “딸이 세상을 떠난 건 너무나 가슴 아프고 많은 분이 기억에 주는 것도 고맙다”면서도 “반미운동에는 반대한다”고 말을 이었다. 특히 신씨는 “국가 안보를 위해 한·미 공조는 중요하다. 앞으로 추모행사가 반미 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 2017년 6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에서 갓길을 걷고 있던 14살의 신효순·심미선 두 여중생이 가교 운반용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은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쯤이었다. 사고는 온 나라가 한일 월드컵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전국적으로 지방선거가 실시된 날에 일어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 서울 종로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효순·미선양을 추모하며 촛불로 거리를 밝히고 있다(2002.12.31)
못했다. 그러다 보니 미군의 조사 결과 발표도 의례적이었다. 미군은 6월 19일 “관제병이 여중생들을 30m 전방에서 발견해 운전병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소음이 심해 제때에 경고하지 못해 발생한 고의성 없는 사고”라고 발표했다.

문제는 당시 한국 정서에서는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죄’가 앞서야 한다는 것을 미군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미 2사단 캠프 앞에서 ‘살인 만행 주한 미군 규탄대회’를 열고, 사망대책위원회는 미군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고소했다. 파문이 확산할 조짐을 보이자 7월 4일 주한 미군 사령관이 “미군이 사고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며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취했다.
두 미군은 미 군사법에 의거해 7월 5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우리 정부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장갑차 탑승 미군에 대한 1차 재판권을 미군이 포기하도록 요청했다. 이는 공무수행(훈련) 중에 일어난 미군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우리 측에 넘겨달라고 한 것으로, 1966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후 요청한 최초의 사례였다. 그러나 미군이 SOFA 규정에 의거해 자신들이 재판권을 행사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통고함으로써 재판은 미군 영내에서 진행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 장갑차가 고의로 여중생들을 치어 여러 차례 밟고 지나갔다는 등의 온갖 거짓 루머가 숨진 여중생의 끔찍한 현장 사진과 함께 인터넷과 거리 전시회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면서 사태는 예측 불허로 치달았다. 11월 말, 미 군사재판이 이 사건을 과실로 인정해 두 미군에게 무죄 평결을 내린 것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무죄 평결을 내리면 우리 검찰이 더 이상 항소할 수 없는 SOFA 규정에 따라 사법적 판단은 마무리되었고 두 병사는 서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효순양의 아버지 “반미운동에는 반대한다”

미군은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항변했지만 정서상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감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상황은 미군의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결국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럼즈펠드 국방장관, 허버드 주한 미 대사,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 등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하거나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SOFA 개정이 목표였던 시위대에게 부시 대통령의 사과는 성이 차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효순·미선 양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면서 전국은 반미 열기로 넘쳐났다.
조직적인 반미 촛불집회는 2002년 11월 26일 서울 종로 YMCA회관 앞에서 100여 명의 SOFA 개정론자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불평등한 한미 관계 개선’, ‘미군 사과’ 등을 요구하면서 점화되었다. 한 네티즌의 제안에 따라 11월 30일 집회 장소가 미 대사관 옆 광화문 사거리로 옮겨지면서 그곳은 연일 주한 미군의 성토장이 되었다.

열기는 뜨거웠다. 그해 6월 월드컵 4강 신화가 달성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에너지가 다시 분출하는 듯했다. 오후 6시가 되면 촛불을 든 학생·회사원들이 매일 광장을 메웠고 주말이면 수만 명의 촛불이 광장을 수놓았다. 1년 동안 계속된 촛불집회에는 연인원 500만 명이 참가했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삭발 투쟁을 벌였고 윤도현 밴드, 안치환, 권진원, 이적, 이은미, 싸이 등 유명 가수들은 거리 공연을 주도했다. 가수 신해철은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을 통해 두 여중생의 죽음을 널리 알렸다. 심지어 북한의 7세 작곡가 신동은 여중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고 평양의 한 중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진보 세력이 효순·미선 양을 그해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선거에 적극 활용하면서 대선 판세도 요동을 쳤다.


■영국·프랑스 연합군 됭케르크 철수   
극장가 여름대전이 시작된다. 각각 약 300억 원, 15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군함도’, ‘택시운전사’를 비롯해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할리우드 감독으로 손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가 본격적인 여름휴가철이 시작되는 7월 말∼8월 초 격돌한다.… 가장 먼저 포석을 깐 영화는 ‘덩케르크’다. 워너브러더스코리아가 직접 배급을 맡아 일찌감치 7월 20일로 개봉일을 못박은 이 영화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대작이다. 놀런 감독은 2010년과 2012년 각각 7월에 ‘인셉션’과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국내 관객 582만 명, 640만 명을 모은 ‘여름 사나이’다. <문화일보 2017년 6월 20일>

▲ 됭케르크 주변 지도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은 1940년 4월까지 전투다운 전투가 없어 한때는 ‘가짜 전쟁’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던 중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밀고 들어가면서 대살육전이 전개되었다. 독일군이 서부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총리로 취임한 5월 10일 새벽이었다. 독일군은 3개 방면군으로 나뉘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를 공격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쪽을 공략하는 북쪽 루트, 아르덴 삼림지대를 뚫는 중앙 루트, 마지노선을 지나는 남쪽 루트 이렇게 세 갈래였다.

전쟁의 초기 향방은 상식을 뛰어넘는 전격전으로 아르덴 삼림지대의 험한 지형을 돌파한 A방면군 소속의 기갑사단이 5월 20일 솜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일부 분견대가 영불해협에까지 도달함으로써 사실상 결정되었다. 문제는 후속 보병부대의 진격이 너무 느렸다는 데 있었다. 히틀러와 수뇌부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지나치게 빠른 진격 속도와 넓어진 전선 확장을 우려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아라스 전투’가 벌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라스 전투는 에르빈 롬멜의 제7기갑사단 등이 아라스로 전진하던 중 영국군 2개 보병대대, 2개 전차대대 규모와 접전을 벌인 전투로 규모는 크지 않았다. 총 74대의 마틸다 전차로 구성된 영국의 2개 전차대대는 5월 21일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독일군 기갑부대가 곧 마틸다 전차를 무력화하고 영국군을 아라스 방향으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다.

그런데 이날 하루 동안 벌어진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의 제7기갑사단은 89명 전사, 116명 부상, 173명 실종 등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전투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롬멜조차 영국군이 4개 대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단급 부대의 맹반격을 받았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A방면군 지도부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강력한 전차를 앞세워 사단급으로 반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전선이 길어져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독일군 수뇌부에 아라스 전투는 포위망 내의 연합군 전투력이 아직 상당한 수준이라는 판단 착오를 불러일으키고 히틀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독일은 히틀러가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린 1940년 5월 24일에 사실상 전쟁에 졌다.”

그 무렵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는 영국군은 전선에서 이탈해 해상으로 철수한다는 이른바 '다이너모 작전'을 준비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영불해협의 주요 항구인 됭케르크(※영화명은 ‘덩케르크’이나 외래어표기법으로는 ‘됭케르크’이므로 이하 됭케르크로 표기/편집자 주)를 해상 탈출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영국은 됭케르크를 표적으로 한 독일군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불로뉴와 칼레 등 다른 지역으로 병력을 증원했다.
한편 독일군의 A방면군 기갑사단을 총지휘하는 폰 클라이스트는 예하 기갑사단의 피해가 자꾸 늘어나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막무가내로 진격만 하다가는 포위망을 좁히더라도 전투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이런 우려를 A방면군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에게 보고했다. 폰 룬트슈테트는 5월 23일 밤 A방면군 예하 부대에 진격 중단 명령을 하달하고 24일 아침 히틀러를 만나 진격 중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그 무렵 히틀러의 머릿속에는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주장도 입력되어 있었다. 프랑스 전역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마당에 이런 식으로 전쟁이 끝나면 대부분의 전공이 육군의 몫이 될 것을 우려한 괴링이 “독일군 기갑부대가 피해를 볼지 모르니 마무리는 공군에 맡겨 달라”고 히틀러를 설득한 것이다.

이처럼 육군에서는 폰 룬트슈테트 A방면군 총사령관이 진격 중단을 요청하고, 공군에서는 괴링이 의욕적으로 나서자 5월 24일 오전 히틀러가 새로운 명령을 발령했다. A방면군 소속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다음 공격에 필요한 교두보 이외에는 더 이상 진격하지 말고 공군의 작전이 방해받지 않도록 작전 경계선을 준수하라는 명령이었다. 폰 룬트슈테트 사령관에게는 육군 총사령부(OKH)의 명령에 상관없이 스스로 판단해 공격을 재개하거나 정지할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 명령은 독일군 제1기갑사단이 됭케르크 서쪽 20km 밖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영국에 ‘됭케르크의 기적’을 선물한 최악의 결정이었다.
육군 총사령부가 히틀러의 명령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이때 육군 총사령부의 반발을 묵살한 것은 히틀러의 전쟁 지휘권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즉 당시까지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육군 총사령부를 통하지 않고 예하 부대인 A방면군 총사령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 재량권을 부여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지휘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군의 괴링에게 기회를 준 것도 육군 총사령부의 주장에 마냥 끌려다닐 수 없다는 히틀러의 복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전쟁 중에는 됭케르크 철수 중요성 깨닫지 못해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괴링이 호언장담한 공군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됭케르크에서 연합군의 조직적인 철수 움직임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됭케르크를 통한 철수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5월 26일 폰 클라이스트 기갑 사령관에게 제한적인 전진을 승인했다. 독일군은 5월 27일 공격을 재개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의 움켜쥐었다는 생각이었는지 필사적인 공격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승리를 주워 담는 듯 가볍게 공격했다.
연합군은 5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철수작전을 전개했다. 됭케르크에서 첫 날 배에 오른 병사는 7,669명이었다. 이후 영국의 공군 전투기들이 상공에서 독일의 공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는 동안 구축함, 여객선, 거룻배, 범선 등으로 이뤄진 1,200여 척의 잡동사니 함대가 수십만 명의 연합군을 영국 해안으로 실어날랐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6월 4일까지 영국 원정군 19만 명, 프랑스군 14만 명 등 모두 33만 8,226명, 그리고 8만 5,000대의 차량이 무사히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오늘날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연합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면 히틀러가 영국 본토를 공격할 때 영국이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고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됭케르크 철수 후에도 독일은 너 나 할 것 없이 프랑스를 상대로 한 대승의 전공 차지에 바빴기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나오고 히틀러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한 것은 전세가 연합군 측에 기울고 나서부터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 장군들 중에는 “독일은 히틀러가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린 5월 24일에 사실상 전쟁에 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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