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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방랑시인 김삿갓’의 가수 명국환의 삶과 노래
술 한 잔에 시 한 수, 노래 한 자락으로 시대를 함께 하다
2017년 07월 10일 (월) 14:57:40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백마야 울지 마라’를 시작으로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으로 우리나라 1950년대와 6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원로가수 명국환(84세).

1.4 후퇴 당시 열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월남, 8240 KLO 정훈국 공작대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전쟁 당시 서부전선을 지켰다. 이후 명국환은 다양한 장르의 노래로 가요사에 큰 획을 긋는다.

때로 서민의 삶을 진지하게, 때로는 이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50년대식 멋과 낭만을 구사해온 그. ‘주유천하’, ‘거지왕자’, ‘한석봉’ 등 그가 발표했던 많은 드라마주제가와 영화주제가들 속에도 당시 국민들의 삶이 절절히 녹아있다. 궁핍했던 시대의 위로와 희망, 그 힘겨운 시대를 노래와 함께 건너온 가수 명국환. 지금은 비록 혼자지만 음악으로 인해 결코 외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는 외곬인생, 원로가수 명국환의 과거,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글 Ⅰ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방랑시인 김삿갓을 평생 노래하다

1. 죽장(竹杖)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2. 세상이 싫든 가요 벼슬도 버리고/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笑文)을 놓고/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3. 바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괴나리봇짐 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 해든가/석양 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
-‘방랑시인 김삿갓’ (김문응 작사,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조선 왕조 철종 때의 방랑시인,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의 생애를 그린 영화 ‘김삿갓(1957년, 이만흥 감독)’의 주제가다. 풍자와 해학을 통해 피폐해가는 세상을 개탄한 방랑시인 김삿갓의 일생 중 가장 외로웠던 시기를 그린 영화다.
2000년 10월, 매년 ‘김삿갓 문화큰잔치’가 열리는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입구, 노루목천에 이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가 세워졌다. 아울러 노래비에서는 항상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발표 이듬해인 68년 6월, 왜색가요로 금지(금지번호 304호)되기도 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은 가수 명국환의 출세작인 동시에 가수로서의 영광과 고뇌를 함께 해온 노래다.

징집 피해‘여장’까지 했으나 결국 홀로 남게 돼 자원입대, 군예대원으로 전쟁터 누벼

명국환은 1933년 1월,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부친 명원표(明元杓)와 모친 지입분(池立粉)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4후퇴 때 피난 내려오기 전까지 인구 3만 명 규모의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48년, 연안중학교 3학년 때 연안극장에서 열린 콩쿨대회에서 ‘남아일생(남인수)’을 불러 입상할 정도로 ‘노래 잘 부르는 소년’으로 통했다. 학교에서도 음악점수만큼은 ‘갑’이었다. 그러나 매우 엄하셨던 부친의 반대로 인해 가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6.25 한국전쟁으로 명국환은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이때 부친은 합류하지 못했다. 피난길에 징집을 피하기 위해 내무서원의 눈을 속이고자 누이 옷을 빌려 입은 채 ‘여장’까지 했다.

“피난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혼자가 됐어요. 살아갈 길이 막연했죠. 할 수 없이 먹고사는 해결하기 위해 강화에 본거지를 둔 8240 KLO 유격부대 군위문대에 자원입대했죠.”
전쟁은 운명처럼 그렇게 그의 삶을 바꿔놓는다. 향토유격대인 육군 8240부대(8240 KLO)는 북파공작원 부대, 즉 H.I.D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정훈공작대원으로 서해안에 배치되었다.

“군 위문대였지만 전투요원이나 다름없었어요. 위험한 고비도 숱하게 넘겼고 모두 군복을 입고 무대에 섰지만 계급은 없었죠. 나중에는 멀리 속초, 원주 등까지 위문공연을 다녀야 했는데 그때 나는 주로 ‘남아일생’ 등을 불렀고 반공극 ‘나는 보았다’ 무대에도 섰던 기억이 나요.”

‘군번 없는 용사’로 전선을 누비던 명국환은 휴전이 되자 위문대가 해체되면서 서울로 온다. 이후 대한민국 제대장병보도회(이후 서울재향군인회)가 주최한 콩쿨대회에 참가, 당시 인기곡이었던 ‘전선야곡(신세영)’과 지정곡인 ‘마음의 사랑(박재홍)’을 불러 1등을 차지한다. 이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한 인물은 이후 ‘백장미 일기’, ‘눈물의 구포다리’를 발표한 이갑돈씨로 현재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장을 맡고 있다.

“한 턱을 내라고 덤벼들 깡패들이 무서워 입상식이 끝나기 무섭게 뒷문으로 뺑소니를 쳤죠.”
그는 이 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곧바로 샛별악극단(단장 손기성)에 입단, 본격적인 연예인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샛별악극단은 그가 군 복무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멤버들이 대부분이라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 악극단에서 만난 가수 겸 배우 나애심의 소개로 그의 오빠인 작곡가 전오승을 만나게 되면서 비로소 데뷔곡인 ‘백마야 울지 마라’를 취입하게 된다. 가수 박경원과는 데뷔 동기다. 오아시스를 통해 발표된 SP음반 ‘백마야 울지 마라’ 뒷면에 수록된 곡이 박경원의 데뷔곡 ‘비애(悲哀)부르스’다.

백의민족에 전하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백마야 울지 마라’

1. 백마는 가자 울고 날은 저문데/거치른 타관 길에 주막은 멀다/옥수수 익어가는 가을 벌판에/또 다시 고향 생각 엉키는 구나/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2. 고향을 등에 두고 흘러가기는/내 신세 네 신세가 다를 게 없다/끝없는 지평선을 고향이거니/인생을 새 희망에 바라며 살자/백마야 백마야 울지를 마라.
-‘백마야 울지 마라’ (강영숙 작사, 전오승 작곡, 명국환 노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백의민족으로써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자, 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또한 작곡가 전오승은 이 해에 첫딸을 얻는다. 바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의 ‘옥희’ 역을 맡았던 깜찍한 아역배우 전영선이다. 이 첫 딸이 54년 백말 띠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걸 기념해 지었다는 에피소드도 함께 회자되었다.

이 노래로 명국환은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다. 당시 HLKA(서울중앙방송국, 현 KBS 제1라디오)의 ‘노래 수첩’, ‘노래와 경음악’, ‘노래 파티’ 등 가요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송민도, 나애심, 원방현 등과 함께 방송 출연을 거의 독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955년, 이갑돈, 임미란 등과 함께 전속가수로도 발탁되었다.

아울러 이 무렵 설립되는 신신레코드사(이후 신세기)에 작곡가 전오승과 함께 스카웃,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한다.

신세기로 스카웃된 전오승-명국환 콤비의 거침없는 히트 행진

전오승-명국환 콤비는 신신(신세기) 전속1호 작품인 ‘방랑시인 김삿갓’을 시작으로 ‘공주의 비련’, ‘백제왕의 최후’, 그리고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거침없는 히트행진을 이어간다. 또한 전속 이전에 발표했던 영화주제가 ‘구원의 정화’ 역시 음반으로 새롭게 제작된다.

동시에 유니버샬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캬라반의 꿈(손석우, 손석우)’, ‘향수의 밤차(고명기, 박시춘)’, 박춘석 작곡의 ‘흐르는 백마강(백호, 박춘석)’, ‘아라비아 야곡(백호, 박춘석)’, 그리고 파라마운트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아리조나 카우보이(김부해, 전오승)’ 등으로 거침없는 인기가도를 질주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50년대 SP(축음기) 시대의 소중한 산물이다. 당시 우리나라 음반 산업은 전쟁 직후였던 터라 물자부족으로 아스테이트나 PVC같은 재료들이 턱없이 부족하던 때였고 또한 음반 제작 시설 또한 열악해 숯불을 직접 피워 원료를 녹이거나 동판을 제작하던 시절이라 음반을 한 장, 한 장 만들어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때였다.

특히 방음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소음이 비교적 덜한 야간시간을 틈타 밤 새워 녹음해야 했을 만큼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게다가 동시녹음 시절이라 취입하다 가사가 약간 틀려도 큰 문제가 없으면 그냥 OK사인을 냈다고 회고한다.

‘아리조나 카우보이’, ‘공주의 비련’등 노래만큼 사연도 많아

발표한 노래 숫자만큼이나 에피소드 또한 많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80년대 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라 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었던 노래다. MBC 정치드라마 ‘제4공화국’을 통해 그가 장교시절 이 노래를 특히 애창했다는 일화가 소개되면서 부터였다. 때문에 그가 퇴임할 때 일부 언론에선 ‘떠나가는 전삿갓’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또 다른 히트곡인 ‘아리조나 카우보이’도 한때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김병현의 애칭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명국환은 다양한 소재의 노래들을 발표했다. ‘한석봉’, ‘이차돈의 한’, ‘논개의 비가’, ‘만고스님 서산대사’, ‘에밀레종’ 등 고전을 50년대식으로 해석해 발표했는가 하면 5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탱고 리듬의 ‘이태리의 정원’ ‘집시의 탄식’ ‘모정’ 같은 번안곡도 상당수 발표했다. 이 노래들을 통해 바이얼리니스트 문대항 등 50년대 음악인들의 명연주도 들을 수 있다.
5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였던 만큼 당시 국민들의 꿈, 이국에의 동경을 대신한 이국적인 가사와 멜로디의 노래도 많다. ‘알젠틴 탱고’, ‘캬라반의 꿈’, ‘아라비아 공주’, ‘버마의 옥피리’, ‘텍사스 카우보이’ 등이 그것이다.
또한 평민 출신의 대령과의 사랑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국 마가렛 공주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공주의 비련’ 등도 당시 큰 사랑을 받았다.

명국환이 부른 드라마주제가 & 영화주제가들

라디오 드라마주제가와 영화주제가 역시 많이 발표했다.

1. 만승(萬乘)에 높은 자리 아우님께 사양하고/비웃음 손가락질 한잔 술에 잊으련다/푸른 풀 붉은 단풍 초야에다 몸을 묻어/하---- 너털웃음 휘파람에 한숨지네.
2. 금지(金枝)라 옥엽(玉葉)이라 귀하신 몸 오늘에는/떠도는 구름이냐 흘러가는 물이련다/지는 해 걷는 발에 늘어나는 주름살이/봄바람 가을비에 흰 수염이 향기롭네.
-주유천하 (周遊天下, 조흔파 작사, 김호길 작곡, 명국환 노래)

양녕대군의 거짓 광태와 서민으로 위장한 채 궐 밖에서 주유천하하며 많은 미담 기화를 남긴 내용을 그린 영화로 1962년, 안현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영균, 최남현, 방수일이 출연했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양녕대군 역은 성우 이창환이 맡았다. ‘얄개전’으로 유명한 작가 조흔파(본명 조봉순) 극본에 김호길이 주제가를 작곡했다.

이외에도 명국환이 발표한 영화주제가들을 살펴보면, 조선 말기 기독교 신자들의 순교를 그린 ‘구원의 정화(1956년, 이만흥 감독)’, ‘김삿갓(1957년, 이만흥 감독)’, ‘지평선(1961년, 정창화 감독)’, ‘한석봉(1963년, 이만희 감독)’, ‘거지왕자(1963년, 안현철 감독)’, ‘백마고지(1963년, 김수길 감독)’, ‘훈장은 녹슬지 않는다(1966년, 박성복 감독)’ 등이 있다.

금지의 늪 딛고 작곡자로 변신

특히 당시 엄격한 동시에 한편 애매모호한 심의 기준으로 심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특히 그의 최대 히트곡인 ‘방랑시인 김삿갓’이나 ‘청춘의 삼색 깃발’ 같은 노래들이 금지되면서 가수활동에 타격을 받는다.

“무엇보다 당시 심의위원들이 클래식, 즉 순수음악을 하는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중가요에 적용되는 심의가 매우 엄격했어요. 이를테면 마이너 곡조, 즉 단조의 노래는 비탄조, 왜색조라며 제재시켰기 때문에 자연히 대중가요 작곡가들은 애조를 담은 곡들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죠.” 당시 이러한 규제 때문에 대중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노래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특히 지방공연을 비롯한 일선 장병 위문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당시 어려운 여건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애환도 적지 않다. 일례로 지방공연을 갔을 때 한 순간 쇼 단장이 잠적해버려 개런티를 한 푼 받지 못한 채 갑자기 빈털터리 신세가 된 적도 다반사, 서울로 돌아올 차비조차 없어 열차 승무원에게 사정해 무임승차했던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 그런가 하면 반대로 모직회사나 방직회사 같은 곳에서 공연을 한 뒤 출연료 대신 당시 매우 귀했던 나일론 옷감이나 ‘아무리 신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00양말 등을 현물로 받아 주위 분들에게 선심 쓰기도 했던 일화는 되레 흐믓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60년대 들어 작곡가로 변신하기도 했던 그는 1965년 국제가요대상 10대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5년, 동양TV의 후원으로 국제신보사가 주최한 제1회 ‘국제가요대상’에 10명의 후보로 선정된 것. 방송가요대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는 이 국제가요대상은 모두 12개 부문에 걸쳐 시상되었는데 디스크 대상을 비롯하여 가요, 보컬그룹, 작곡, 작사 등을 선정, 시상했다. 이때 가요부문에 선정된 10대 가수로는 명국환씨를 비롯해 남일해, 박경원, 안다성, 최희준, 박재란, 이미자, 한명숙, 현미씨였다.

환갑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만든 노래 ‘아버지’

현재 한국참전예술인협회와 대한가수협회 원로가수회에 적을 두고 있는 그는 한때 원로가수들의 친목단체인 동심회(同心會)의 회장을 맡는 등 선후배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 보호에 앞장 서왔다.
동심회는 70년대 초, ‘울고 넘는 박달재’의 가수 박재홍씨가 주축이 되어 곽규호, 김광남, 나애심, 최병호 등 14명의 원로들과 함께 발족한 모임으로 주로 불우한 이웃을 위한 위문공연 활동을 펼치던 친목단체. 아울러 대한불자가수회 회장을 맡아 불우이웃 돕기, 무의탁노인 돕기 자선공연 활동을 펼쳐왔다. 지난 2004년에는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서훈 받았다.

그는 북에 두고 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로 만들었다. 60세 환갑 때 자신을 되돌아보다가 문득 만든 노래였다.
“아버지 다시 한 번 불러 보고 싶어요/그때는 너무나 몰랐어요/아버지 용서해주세요/인자한 웃음도 사랑의 매도/너무나 고마워요 그리워져요/고독한 일생을 살다 가신/아버지 어디 계신가요.”
-‘아버지 (명국환 작사, 작곡, 노래)

그는 현재 혼자다. “모두 네 번의 결혼에 실패했어요. 내가 바람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 실패한 것은 아마 팔자소관인가 봐...”

현재 경기도 부천에서 홀로 지내는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필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갈수록 밖으로의 외출을 가급적 자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된 인터뷰 장소였다. 때마침 며칠 뒤 KBS ‘가요무대’에 출연하게 되었다며 늘 입버릇처럼 말했듯 ‘여건이 허락하는 한 무대에서 최선을 다 할 것’임을 강조한다.
“5개월 만에 서는 무대야,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내 노래가 어떨지는 사람들이 보고나서 판단하겠지.” -약간 설레면서도 긴장된 어조다.
그의 머리맡에는 이번 가요무대에서 부를 ‘삼각산 손님’ 악보와 기타 한 대, 그리고 라디오가 놓여있었다. 라디오는 자는 동안에도 계속 틀어놓는다고 했다.

노래가 그의 전부였듯 오로지 가수 활동에만 전념해온 원로가수 명국환, 그가 새삼 힘주어 말한다.
“외롭지 않아요. 노래가 늘 나와 함께 하니까...”

▲ ‘박성서의 토크콘서트’에서의 ‘명국환 데뷔 60주년 기념공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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