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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우리나라 ‘녹음 1세대’, 영화녹음의 개척자 이경순
대한민국 영화녹음 1세대 ‘소리의 창조자’ 이경순의 삶
2013년 11월 07일 (목) 14:26:32 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소리는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다.’ -안성에 위치한 ‘이경순 소리박물관’ 앞에 적혀 있는 글귀다. 우리나라 50여 년 한국영화 현장을 지켜온 녹음 1세대로 심지어 ‘소리의 창조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고 이경순 선생(李敬淳,1921~2008).

   
▲ 이경순
전 한양스튜디오 대표로 한국영화와 레코드 녹음 계에 신개척을 이룬 이경순 선생의 삶은 소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듯 광복 이후 한국영화 녹음 변천사 그 자체다. 이곳엔 해방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가 영화녹음작업에 사용했던 손때 묻은 음향장비, 녹음기. 편집기, 영사기, 각종 대본, 영화관련 기자재, 트로피 등 국내 영화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물품 2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개인소장품을 넘어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이다. 영화녹음에 바친 이경순의 삶을 재조명해본다.

글 l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외곬인생의 산물, ‘소리의 창조 이경순기념관’
필자가 이경순 선생을 만난 것은 타계 직전인 2007년 무렵. 우리나라 녹음 1세대로 ‘소리의 창조자’라 불리는 선생은 타계 직전까지 직접 설립한 ‘이경순기념관’을 건립, 직접 관리했다. 지난 2006년 4월 더 많은 이들에게 자료를 공유하고자 소장품을 모두 안성문화원에 기증, 이에 안성문화원은 교육적 가치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2009년 11월11일, 동아방송예술대학에 의해 ‘이경순 소리박물관’으로 정식 개관했다. 2007년 당시 인터뷰를 정리해본다.

   
▲ ‘이경순 소리박물관’ 입구에서의 필자.
‘소리의 창조-이경순기념관‘. 지난 2007년,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마둔리에 위치해있던 ‘이경순 기념관’의 30평 남짓한 전시실에는 수많은 음향 장비와 희귀 자료들이 보관되어 한국사의 숨결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잇었다. 한국영화음향의 역사 이경순 선생(당시 86세)이 지난 1950년대부터 50여 년간 그의 손을 거친 영화 기자재 자료들을 모아 '소리의 창조-이경순 영화기념관'을 열어 자신의 분신들을 공개한 것으로 2004년 8월 12일 개관되었던 곳. 이경순 선생의 삶은 이곳에 전시되어있는 것들처럼 광복 후 한국영화 녹음 변천사 그 자체다. 개인소장품을 넘어 우리 근대사의 소중한 유산인 셈이다.

“이제는 낡아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마이크지만, 이 마이크를 통해 대한뉴스, 국방뉴스를 비롯해 많은 영화인들의 명대사가 이 마이크를 거쳐서 녹음됐지요.” 이경순 선생의 말이다. 그 뿐인가, 이승만 대통령 취임식 때 사용된 마이크는 물론 ‘이별의 부산정거장’ 취입당시 녹음기와 마이크도 옛 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한마디로 대중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것들이다.
그와 함께 세월을 보내온 지멘스 녹음기와 영사기, 직접 조립해 사용하던 음조정기는 물론 시대별 녹음 장비와 재생기, 축음기 등 이제는 추억에서나 남아있는 신기한 음향기기들이 즐비하다. 아울러 각종 기록사진과 케케묵은 영화포스터, 수백편의 시나리오 대본, 심지어 잉크자국이 바랜 ‘녹음작업일지’까지 보관되어 있어 당시 영화작업에 몰두하던 이들이 어떠한 수고를 했는지, 그 땀 냄새까지 맡아지는 듯하다. 본 건물 뒤편에 있는 ‘광’에는 원시적 음향기기들, 이를테면 산들바람소리부터 천둥소리를 근사하게 내주던 대형 철판, 파도소리를 만들 때 사용하던 키, 솜방망이 등 온갖 음향기기(?)들이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 쌓여있다.

50여 년 한국영화 현장 지켜온 1세대, 총 3천5백여 편 녹음
   
▲ 1953년 서울수복 후 이승만 대통령 재선 취임식 때 동시녹음 마이크
우리나라 1세대 녹음기사 겸 전 한양스튜디오 대표. 1921년 5월 17일,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난 이경순 선생은 삭주를 거쳐 신의주로 이사, 형이 직접 차린 축음기와 유성기판의 보급, 수리, 판매 전문 ‘춘일악기점’에서 일하며 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축음기기 수리를 위해 경성엘 오가다가 37년 아예 일본 빅타축음기레코드사 경성영업소 라디오 수리부로 들어간 뒤 주경야독, 41년 경성전기학교 야간부를 졸업한다.
‘녹음 인생’에 발을 들여놓으며 음향기술을 배우게 되었고 이 때 배운 RCA 토키 기술로 인해 영화계와 관련을 갖게 된다. 해방 후 47년, 이미 영화녹음 기사로 활동하고 있던 최칠복씨를 통해 미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미502부대는 영화기재 등을 관리하고 있었고 또한 대한민국 공보처가 만들던 ‘대한뉴스’를 제작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USIS(미 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후퇴한 그는 당시 국방부가 촬영한 군 영화 ‘정의의 진격’ 녹음을 미 공보원 측에 부탁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을 보고 영화과의 몇 사람이 의견을 모아 사표를 쓰고 나와 직접 현상녹음실을 만들자고 뜻을 모은다. 이경순 선생은 당시 일화를 이렇게 들려준다.

“우여곡절 끝에 진해해병학교 목욕탕을 빌렸어요. 목욕물을 데우는 가마솥 안에 녹음실을 만든 뒤 라디오 가게와 비행장 등을 돌며 전기부속품과 철판을 모아 구멍을 뚫고 자르고 붙여 16미리 필름식 녹음기를 시작으로 35밀리 녹음기까지 완성했죠. 그러고 나니 육군본부와 공보처에서 찾아와 35mm 국방뉴스와 대한뉴스를 만들자고 해요. 그 당시 얘기하려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죠. 영상에 녹음작업까지 마쳤는데 소리를 들어볼 데가 없어요.

   
▲ 미 공보원 시절 녹음기 수리장면
그래서 당시 진해 ‘해양극장’에 가서 사운드만 넣어 가지고 들어보았더니, 워낙 짧아 이게 기계 소리인지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미 공보원에 찾아가 소리를 체크해달라고 부탁하니까 영사실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피커를 바깥쪽으로 향하게 해서 건물 밖에서 들어보니 스피커에서 소리가 너무 작게 녹음되어 가까스로 전달될 정도야. 그래서 다시 소리를 조정하고 재작업했지. 그 후 ‘영화합동영화소’라는 간판을 내건 뒤 51년부터 공보처의 ‘대한뉴스’와 국방부의 ‘국방뉴스’를 만들었고 녹음실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자 극영화도 제작, 그 첫 작품이 바로 신상옥감독의 데뷔작인 ‘악야’였어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내가 넘은 삼팔선’, ‘삼천만의 꽃다발’, ‘낙동강’ 등이지.”

   
▲ 이경순 선생의 피난시절의 시장, 비행장 등을 돌며 녹음기 부속품을 구해 손으로 자르고 붙여 녹음기를 만들고 진해해병학교 목욕탕의 가마솥 안을 녹음실로 사용했다. 전쟁 당시 ‘국방뉴스’ 녹음 담당 이경순(우측)과 양주남. 1953년 진해.
진해 피난시절 함께 작업을 도왔던 부인 손길순 여사(당시 77세) 또한 당시 일화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 영감이 부대를 나오셔서 녹음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시엔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둘이 시장, 비행장 등을 돌며 녹음기를 만들 부속을 구하러 다녔죠. 한 10리길도 갔다왔다해서 가까스로 구한 구리판에 기계를 조립하기 위해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작고 크고 넓고 좁고 가늘게, 일일이 다 맞춰 뚫으려니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하는 수 없이 당시 7살, 9살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붙잡게 한 뒤 나는 가운데를 누르고 영감은 드릴로 뚫는데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그것을 수십 개 잘라서 뚫고 붙이고 해서 만들었지요”

이러한 노력으로 당시 전투상황을 뉴스로 내보낼 수 있었고 끊어질 위기의 한국영화가 비로소 맥을 이을 수 있었던 의미는 매우 크다. 이경순 선생은 휴전 후인 54년 공보처 영화과 녹음실에 근무하게 되면서 공보처 녹음실에서 잿더미 속의 한국영화는 부활한다. 한국영화녹음의 메카로 자리한 것이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봄날은 간다’음반도 직접 녹음
   
▲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 음반 재킷.
이때 그는 신생 레코드사인 유니버샬레코드사로 부터 음반녹음도 제의 받는다.
“영화녹음작업을 하면서 만났던 작곡가 박시춘씨가 피난 갔다가 올라오자마자 유니버샬 김영찬 사장과 함께 찾아 왔어요. 유니버샬레코드사를 만들려고 하는데 첫 취입이니까 신경 써서 녹음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녹음시간이 비는 일요일을 택해 레코드 녹음을 했지요. 이때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비롯해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 손인호의 데뷔곡 ‘나는 울었네’를 녹음했고 소문이 나자 손목인, 이재호, 한복남, 이봉룡, 나중에는 박춘석, 백영호, 이봉조씨와도 많은 작업을 했죠. 영화 주제가들이 많이 나와서 레코드계에도 발 들여 놓게 된 셈이죠."

이경순 선생은 그 후 58년 2월, 정릉 촬영소 녹음실과 수도영화 안양녹음실을 재정비하고 62년, 사재를 털어 한양녹음실을 설립한다. 1969년 녹음실을 증축하여 한양스튜디오로 개칭, 오늘에 이른다. 특히 이 한양스튜디오를 통해 완성한 녹음 작품은 총 3천 5백편으로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6년 제1회 녹음부문 금용상을 시작으로 1997년 제35회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하기까지 대종상, 청룡상 등 14차례 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84년엔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서훈 받았다.

부인 손길순 여사는 말한다.“평생 영감 잔소리를 들으며 살았어요. 게다가 고집도 엄청 세죠. 최신 녹음기재가 나오면 무조건 구입하면서도 또 이전에 쓰던 기재 하나 버리지 못하게 해요. 시나리오도 약 2천 권 정도가 있어요. 결국 이것들을 모아 기념관을 만들어 놓은 걸 보니 우리 영감이 평생 수고를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2천여 편 소장품 안성시에 기증, ‘이경순 소리박물관’ 개관
당시 ‘소리의 창조-이경순기념관’은 여느 가정집 모습 그대로였다. 이북에 두고 온 고향이라 부모님 선산을 마련하려 사놓은 산 밑 텃밭에 영화작업이 힘들고 귀찮아지면 때려치우고 조용히 소나 키우며 살려고 마련해놓은 집이 이제는 무엇보다 소중한 그의 영화기념관이 되었다. 다만 규모가 너무 작아 아직 제 자리를 다 차지하지 못했지만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틈만 나면 부부는 함께 이곳을 찾아 우리 한국영화 기본 골격과 뼈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물품들을 손질하곤 했다. 이들의 부지런한 손에 의해 비로소 반짝이는 이 빛나는 유산은 한국영화사의 기초 자료가 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서는 당대 문화 전반에 관한 폭넓은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녹음역사에 또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거기엔 우리나라 녹음역사의 개척자 이경순이 있었다.
이러한 뜻이 결국 이루어졌다. 이경순 선생은 지난 2006년 4월 더 많은 이들에게 자료를 공유하고자 2,000여 점의 소장품을 안성문화원에 기증하였고 이에 안성문화원은 교육적 가치와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동아방송예술대학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한국영화 3천여 편을 녹음한 한국영화 녹음 분야의 선구자 이경순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이 가치가 생생하게 전달될 것을 기대해본다.

‘소리의 창조자’ 이경순은...

1921년 5월 17일 창성 출생.
1941년 2월 경성전기학교 졸업.
1941년 7월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 라디오부 입사.
1947년 7월 주한미군 공보원 영화과 녹음실 근무.
1951년 1월 진해협동영화제작소 녹음 및 현상실 설계시설 후 자영.
1954년 4월 공보부 영화과 녹음실 근무.
1962년 5월 한양녹음실(스튜디오) 창설.
1956년 제1회 금용상 녹음상을 시작으로 1997년 제35회 백상예술대상까지 대종상, 청룡상 등 14차례 굵직한 상을 수상, 1984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서훈.
2004년 경기도 안성에 ‘이경순기념관’ 건립.
2008년 타계.
2009년 11월 동아방송예술대학에 ‘이경순 소리박물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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