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서예 예술은 ‘붓’이라는 특별한 필기구로 면(面)이라는 공간에 점과 선이 가지는 비례의 미학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체다.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글자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서예가 일반적인 글쓰기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윤담 기자 hyd@

서예의 역사는 3000년이 넘는다. 중국에서 한자를 대상으로 시작된 동양예술이지만, 우리나라의 서예도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조선시대에 그 가치를 더욱 발현시켰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20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서예도 이제는 생소한 문화가 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 서예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는 열암 송정희 선생의 행보가 화제다.

예술적 감각 돋보이는 ‘열암체’ 창안

▲ 서예가 열암 송정희

열암 송정희 선생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서체로 한국 서예계를 평정한 서예가다. 우리에게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대첩비의 휘호를 비롯해 두 글자에 아파트 한 채 값을 넘겼다던 현대그룹의 ‘現代’(현대) 글씨와 드라마 ‘왕과 나’의 글씨, 2006년 월드컵 태극전사들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투혼’을 쓴 서예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송정희 선생의 열암체는 전서·예서·해서 등 다섯 가지 서체의 특징을 모아 개성 있게 조형화한 서체로, 한 글자에 획이 10개면 10개 획을 전부 달리 쓰는 것이 특징이다.

왕희지체와 구양순체 등 중국 고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개발한 서체로 예술적 감각이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전국 각지의 유명 사찰과 각종 기업, 방송 드라마작품명 등 곳곳에서 송정희 선생에게 글씨를 의뢰하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은 국내 최고의 서예가로 통하는 송 선생. 하지만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랐다. 여섯 살 때 서당에서 조부의 서당공부를 통해 서예를 접했다는 송정희 선생. 그 후로 6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서예였다. 한때 대기업 CEO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경험 역시 송 선생의 예술세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두 차례의 국전 특선, 문인화대전 특선 등으로 서예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한국작가협회 최우수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서울시 초대작가, 한·중·일 서예가협회 한국대표로 활약하기도 했다.

자유중국 장총통기념관 초대전, 일본 오사카 민단 초대전, 우라디보스톡 러시아 제1회 고려인 문화의 날 행사, 극동국립기술대학교 부시킨극장 초대전 등 유수의 초대전과 그룹전을 통해 뛰어난 예술세계를 선보이고 있는 송정희 선생은 한국전통문예진흥회 이사장,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동남아 서예협회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서화대전 심사위원장, 한·일 서예협회 운영위원장, 대한민국 청솔회장, (사)아산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하며 국내 서예계의 대들보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사)한민족문화협회 이사장, (재)청소년건전문화육성재단 이사장, (사)선행칭찬운동본부 상임 고문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나눔의 가치를 아는 진정한 예술가
사실 송정희 선생은 한국 축구의 열렬한 후원자다. 현대건설과 그 계열사 현판을 써준 것을 계기로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 송 선생. 당시 축구의 축자도 몰랐던 송 정희 선생은 정 회장이 1999년 완공된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 사무실을 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축구와 직접적인 연을 맺게 됐다. 1988년 서울 패럴림픽부터 장애인축구 감독을 맡고 있던 신철순 곰두리축구단 감독이 2000년 그의 사무실을 찾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신 감독으로부터 뇌성마비 장애인들로 구성된 곰두리축구단의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후원자 역할을 자청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곰두리축구단이 어려울 때마다 작품을 기증해온 송 선생이 지난 15년 간 곰두리축구단을 위해 쓴 작품만도 수백 점에 달한다. 그는 “곰두리축구단을 처음 보고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존재 자체에 감사했다”면서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단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곰두리축구단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전했다.

그의 통 큰 기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천 아시아 경기 때에는 대회 조직위에 40점이 넘는 작품을 기부해 각국 대표팀에 선물하도록 했고, 1999년에는 고려대학교의 개교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5000점의 작품을 선뜻 내놓았다. 당시 시가 200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기부였다. 이에 대해 송정희 선생은 “예술은 부를 추구하는 순간 순수성을 잃고 만다. 마음이 탁해져 제대로 된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고 단호히 말하기도 했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 속에서 진한 묵향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는 열암 송정희 선생. 온정을 담은 붓으로 우리 사회를 향한 사랑을 써내려가고 있는 그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