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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렬 계속 이어져
2009년 06월 02일 (화) 17:44:58 김희준 juderow9@paran.com

   
국내 정치계의 큰 별이 지고 말았다. 퇴임 후 편안한 일생을 보내려던 그의 계획은 그렇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안타까운 서거는 전 국민의 가슴에 큰 멍을 안기며 대한민국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그처럼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겪은 정치인이 또 있을까? 대통령의 자리에서도 그는 진심을 다해 국정을 이끌어간 인물이었지만 그의 진심을 그에 대항하는 특정 주도세력들은 사상 초유의 ‘탄핵’이라는 엄청난 카드를 들이밀며 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형인 노건평씨가 장례식장에서 했던 “하늘만이 아실 것”이란 말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요즘이다. 일본의 독도망언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던 모습이 눈에 아직도 선한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난 1946년 8월 6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 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였던 탓에 유난히 사랑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남다른 재주와 뛰어난 학업성적 그리고 특유의 명랑함으로 그 사랑은 한결 더했다고 한다. 또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은 초등학교 때부터 보여주었는데,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해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혼이 난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특유의 리더십으로 5학년 때에는 전교 회장에 당선돼 학생들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이 경험은 지금까지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 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가난했지만 그 가난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격도 명랑해 아이들을 이끌었던 모범성인 성격은 어렸을 적부터 주위의 큰 신뢰를 얻었다.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인생을 살다

어린 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 형님의 영향을 받아 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했지만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변변치 않은 대우에 크게 실망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966년 10월,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던 그는 공사판에서 식사를 제공해 주는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잠을 자는 생활을 이어갔고 그나마 공치는 날은 굶기도 하는 등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그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결국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966년부터 공부는 시작했지만 공부다운 공부를 한 것은 1971년 5월, 군대를 다녀온 이후부터였다. 사법고시 합격 후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그는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한편 사법고시를 공부하던 중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라면서 알고 지내왔던 권양숙 여사와 1973년 1월 결혼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호사로 재직하던 시절, 인권변호사로 특히 이름이 높았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였던 부산의 ‘부림사건’. 이 사건은 그의 변호사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던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그는 행방불명된 학생들과 그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해 크나큰 상처를 받았던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고 이후 시국사건이나 노동 관련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 시절 늘 “바르게 살자. 비겁하지 않게 살자”고 말하곤 했다. 인권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그는 즐겨 타던 요트로 접었고, 잘 나가던 조세전문가로서의 길도 과감히 버렸다. 그 당시 얻었던 별명이 바로 ‘인권변호사 노변’이었고 그는 서거하는 그 날까지 그 별명을 자랑스러워했다. 노동자들과 소수자들은 그를 있게 한 힘이었고, 그를 대통령에까지 이끌어 준 원동력이었다.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가 발족함과 동시에 이사 자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1985년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고 노동자들의 인권을 본격적으로 대변하기 시작했다. 19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운동에 전념했으며, 1987년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 자리에 오르면서 6월 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지역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던 그의 정치적 신념
1988년은 성대하게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이자 그의 정치인생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 선거에 출마해 민정당의 허삼수 후보를 누르고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이후 국회의 대정부질문, 노동위원회 등을 통해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해 나갔고 특히 노동위에서는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리는 등 왕성한 활약을 펼쳤다. ‘5공비리 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은 그를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던 계기가 되었다. 청문회에서의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주었고, 그의 활약은 높은 시청률과 함께 그를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은 기반이 되었다. 아직도 ‘노무현’하면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는 청문회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며 국민들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 주었다. 이후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반대하며 故 노무현 전대통령은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된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한 결과 1991년 9월 마침내 두 당은 통합민주당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탄탄대로를 포기하고 원칙과 정도를 따르는 그의 정치 신념은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대의를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이후 그의 정치 생활은 한동안 ‘낙선’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1992년 3월, 제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도전한 그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 후보에게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1992년 12월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1993년 3월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당선돼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낙선 이후 보통 실의에 빠지기 마련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최고위원에 출마해 당선된 직후 그는 “낙선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만은 아니었다”며 “우리 당원들이 나를 민주당의 가장 젊은 최고위원으로 뽑아준 것은 나의 낙선에 대한 보상이었으며 이후 나는 보다 큰 시야에서 정치를 배울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고위원으로서의 자리도 잠시, 1995년 6월 치러진 제1회 지방 동시선거에서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민자당의 문정수 후보에게 또 다시 패배하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이는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한 또 하나의 사례로 남았고 그는 “민주당을 탈당하면 뽑아 주겠다”고 권유한 부산시민들의 제의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던 것이기에 패배의 아픔은 한층 더 컸다. 선거초반까지는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김대중 총재의 정계복귀, 지역등권론 등의 역풍을 맞으면서 최종 낙선하고 말았던 것. 부산시민의 제의를 거절한 것에 대해 그는 “지역주의에 영합하는 일이었고 정치인의 원칙과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말했다. 1995년 김대중 총재를 충심으로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고 나서도 그는 민주당을 꿋꿋이 지켰다. 이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민주당의 간판으로 서울 종로구에 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 활동을 하다가 1997년 대선 국면을 맞아 통추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자 김원기, 김정길 씨 등과 함께 11월 ‘정권교체’를 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부총재가 되었고 그 해 대선 기간 동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던 TV 찬조연설을 통해 국민정부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얻어낸 대통령선거의 승리
이후 1998년 7월 치러진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그는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때부터 갈등의 현장에 적극 나서서 중재와 조정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 8월 현대자동차 파업 중재는 가장 성공적인 중재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는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농성과 갈등이 장기화돼 그것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더 이상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인기를 얻으려 한다는 일부 언론에서 왜곡된 보도를 하는 등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고, 중재가 실패할 경우 내가 뒤집어써야 할 책임과 비난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갈등의 현장이 바로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을 바꾸어놓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1999년 삼성자동차 매각 협상의 성공적인 중재가 이어졌다. 1999년 초, 다시 지역갈등을 악용한 집회가 이어지자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 많은 지지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해 다시 한 번 높은 지역주의의 벽을 실감케 했다. ‘낙선’후보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청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일명 ‘노사모’가 결성되었다. 노사모의 자발적인 태동은 국민 참여를 통한 정치변화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후 박근혜, 이재오, 정동영 등 유명 정치인들의 팬클럽이 생기게 한 계기가 되었다.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경의 없이 직원들과 이메일 대화를 하는 등의 수평적 토론문화를 확산시켰고 다면평가 등 인사평가 시스템을 만다는 데 주력해 공직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국정운영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 한편, 낮은 자세의 리더십을 통해 공무원과 국민들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아울러 받았다. 마침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후보수락연설을 통해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라고 말하면서 국민들에게 또 다시 큰 감동을 안겨준 그는 결국 전통적 선거캠페인 방식을 탈피하고 국민들의 후원금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방식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이에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졌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60억 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았다. 희망돼지저금통, 카드결제, 휴대폰모금, 희망티켓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진행된 모금행사는 기존의 선거자금 모금방식을 뛰어 넘었고 미디어선거, 인터넷선거, 정책선거의 원칙과 결합돼 국민 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전과 선거운동 마지막 날,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파기 선언으로 인해 선거의 결과는 갑자기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혼전 속에 빠져들었지만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결국 48.9%의 지지를 얻어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뜨거운 소망이 이루어낸 국민의 승리이며 쾌거라 불릴 만 했다. 그는 당선 소감을 통해 “저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신 민주당 당원 동지 여러분, 개혁국민정당과 노사모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당선을 위해 뛰어주시지 않은 분들이나 저를 반대한 많은 국민 여러분께도 역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저를 지지한 분들만의 대통령이 아닌, 저를 반대하신 분들까지 포함한 모든 분들의 대통령으로,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순탄하지 않았던 대통령 시절, 그리고 퇴임 이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적은 편이었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온 정치인도 아니었고 타협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내세워 종종 반대 세력의 집중포화를 맞기도 했었다. 특히 당내에 자신의 세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철학을 내세워도 여당과의 동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야당 역시 코드인사, 아마추어 정치인이라며 비아냥을 하기 일쑤였다. 특히 사상 초유의 ‘탄핵소추’ 사건을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야당은 “노 대통령은 줄곧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고 있으며 자신과 측근들 그리고 참모들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법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낮은 경제 성장률에 머물러 있는 점을 비추어볼 때,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라면서 그를 맹비난했고 결국 2004년 3월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당 국회의원 195명 가운데 193명이 선거법 9조 공무원의 선거중립의무 조항 위반, 대선자금 및 측근비리, 실정에 따른 경제파탄을 이유로 경호권을 발동해 탄핵안 가결을 저지하는 여당 의원들을 물리적으로 몰아낸 뒤 기습적인 투표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과 동시에 야당에 대한 전 국민적인 질타가 쏟아졌다. 전국 각지에서는 탄핵에 반대하는 촛불시위가 잇따랐고 각종 시민단체들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야3당의 쿠데타, 즉 ‘3ㆍ12 쿠데타’로 규정하고 탄핵안 철회운동에 돌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대한변호사협회’ 등 변호사 단체들도 탄핵철회 촉구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전국이 탄핵사태로 한동안 들끓었다. 특히 탄핵안 가결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는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총선거까지 이어졌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하고 제1당이던 한나라당은 121석밖에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 이후 탄핵의결서가 헌법재판소에 접수된 뒤, 평균 주 2회씩 7번의 공개변론과 10회에 가까운 평의를 개최하는 등 집중적인 심리가 진행됐다. 대통령에 대한 증인신문은 기각됐고, 4월 30일 최후 변론이 종결된 뒤 헌법재판소는 2주일 동안의 집중 평의를 거쳐 결정문 작성에 들어갔다. 5월 14일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동안 계속된 대통령의 권한정지는 자동적으로 해소되고 탄핵사태는 종결되었다. 특히 이 사건은 국민들의 큰 분노를 샀고 이후 국민여론의 절대적인 지지를 통해 탄핵소추안이 기각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아직까지도 이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야당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억지로 밀어부친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렇게까지 반대세력의 집중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꿋꿋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주면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정치 인생은 이제 남은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지역 경제 발전에 참여하는 등 임기 이후에도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편안한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다가가고 있었지만, 우연히 태광그룹 박연차 회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돈을 주었다고 자백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비리 수사가 전면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부인 권양숙 여사를 비롯, 그의 아들과 딸까지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검찰의 주장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 가족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서민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았던 그였기에 이 사건은 한동안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고 ‘전직대통령에 대한 비리조사’가 또 다시 되풀이되는가에 대한 국민들의 허탈감도 이어졌다. 특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고집은 이 사건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신은 재임 중에 돈을 받지 않았고 가족들이 받았던 것에 대해서는 재임 기간 중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수사는 미궁 속에 빠졌고 국민들은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심하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고, 결국 전 국민들에게 또 한 번의 큰 충격을 안겨주고 말았다.

   

현재 전국에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분향소가 곳곳에 마련돼 있으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과 시위자들을 가려낸다는 이유로 덕수궁 근처 분향소에는 경찰 병력이 배치돼 사람들의 진입을 막으면서 한바탕 큰 소동이 일면서 국민들의 슬픔은 잠시 분노로 변하기도 했다. 유서까지 남겨졌으니 그의 자살은 기정 사실화돼 있지만, 항간에서는 여러 가지 음모설을 내세우면서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또한 “검찰 조사 과정에서 얼마나 압박이 심했으면 그가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생을 마감했나”라며 검찰에 대한 비난도 높아지고 있다.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가 이렇게 크게 달아올랐던 적이 있었던가? 한동안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국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부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끔 해야 할 것이다. ‘전직대통령의 자살’이라는 초유의 사건. 그도 역사 속에 그렇게 기록되길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생을 마감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한 압박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깊이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반성을 하고 누가 위로를 받아야 할지 참으로 난감할 뿐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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