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월 강원도 삼척에 있는 김태권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미로면이라는 지명답게 굴곡진 개천을 따라 삼척 고속터미널에서 이십 여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명은 미로(迷路)가 아닌 미로(未老)라고 한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뜻의 미로가 아닌,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뜻의 미로에서 작가는 생의 한 굽이굽이를 정지시키고 있었다.

신선영 기자 ssy@

미로에 들어서다

▲ 김태권 작가.

작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십년이 되어간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내려와 오로지 미술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수십 장의 드로잉이 작업에 대한 고뇌의 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전향한지 팔년 정도 됐어요. 저만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는데 그게 꽤 오래 걸렸어요. 마치 우주처럼, 검지만 검지만은 않은 깊이 있는 색을 추구하다보니 제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했어요.”

그래서 작가는 색을 여러 번 덧입히는 방식을 택했다. 종이에 색을 칠하고 물로 씻어내고 수세미로 벗겨내고 다시 색을 칠하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했다. 아무리 씻어내고 벗겨내도 남는 색을 지층처럼 쌓아 올리는 작업이었다. 이 색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주는 것이 목초액이었다.

“겨울에 장작 땔 때 나오는 연기를 액체로 채취한 것이 목초액이에요. 노르스름한 반 기름 형태라서 셀로판지를 얹어 놓은 것처럼 색도 차분하게 잡아주고 표면도 매끄럽게 코팅해주는 역할을 해요. 그만큼 종이도 질겨져서 물과 수세미를 이겨내는 거죠.”

결과적으로 색은 탈색되고, 표면은 상처로 뒤덮인다. 그만큼 대상도 실감나게 살아난다. 작품 <매화>처럼 스크래치가 거친 풍상을 이겨내는 이미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칼바람에 휘몰아치는 모습이 시선을 리드미컬하게 집중시킨다.

“<매화>는 완성까지 삼 년이 걸렸어요. 다른 작품들도 적게는 일 년에서 오 년까지 걸렸고요. 사진을 보고 그리거나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찾아가는 과정이 오래 걸리는 편이에요. 색이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동적인 느낌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 매화, 110x80cm, 종이에 채색, 2015.

그만큼 그의 그림은 직관적이다. 얼핏 보아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오로지 감각에 의존해서 그리기 때문에 색과 선이 마음에 들 때까지 가다듬는다. 그래서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방식이라고 해야 한다. 

“그림에 의미를 담고 싶었어요. 인생의 의미를 대상에 비유해서 그리는 거죠. 생활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게 작업의 매력인 거 같아요.”

▲ 장대비, 110x80cm, 종이에 채색, 2016.

미로에 머무르다
작품 <장대비>에 한 남자가 서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기라도 하듯 우두커니 서있다. 살짝 떨군 고개와 내려앉은 양 어깨가 처연해 보이지만 푸른 결속에 의해 그리 비극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제가 그리고 싶은 모습은 비극적이나 비극적이지 않은 모습이었어요. 그 몸체를 표현하는 게 잘 안 되더라고요. 특히 어깨선이 조금만 내려앉아도 기운 없어 보이고 조금만 좁아도 왜소해 보여서 몇 년에 걸쳐 수정했어요.”

▲ 백자, 76x55cm, 종이에 채색, 2012.

선에 대한 강조는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백자는 간결하게, 열기는 어른하게, 불빛은 산란하게 선의 형태를 잡아냈다. 선 하나하나가 고도로 집중된 삶을 살았을 것이란 느낌을 강하게 전해준다.

“아무리 기술이 있어도 감성이 없으면 백자를 만들 수 없듯이, 삶에 대한 고뇌들을 선으로 풀어서 선으로 승화하고 싶었어요. 결국 삶에 대한 의지에요. 그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못이에요. 인생으로 치면 고통스러운 순간이지만 잘 박힌 못이 있으면 기운을 받아서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작품으로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 Nailed, 76x55cm, 종이에 채색, 2013.

김태권 작가는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했다. 2013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강릉미술관, 갤러리라메르, 더케이갤러리, 리서울갤러리, 일호갤러리에서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덟 번의 단체전과 네 번의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2013 서울미술대전, 2014 목우공모미술대전, 2016 신사임당미술대전에서 수상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