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벽암 김정남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발칙한 꿈을 꾸다> 展이 열렸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예에 회화적 요소를 가미한 작품 60여점을 선보였다. 현대적 조형미가 깃든 작품을 통해 벽암만의 새로운 서예화를 창출했다는 평이다.

신선영 기자 ssy@

법고(法古)의 세계

▲ 벽암 김정남 서예가.

첫 번째 개인전이기는 하나 벽암 김정남 작가는 서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품에 안겨 붓대를 잡아온 그는, 초등학교 군내 대회에 학교 대표로 활동하거나 대학교 서예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서예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첫 직장도 서예와 관련된 문화체육관광부에 재직하기에 일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광화문에 있을 때 인사동 건국 빌딩에 있던 동방연서회에서 짬짬이 서예 공부를 했어요. 그때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구당 여원구 선생의 회갑전을 보게 됐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필체가 제 마음에 쏙 들어오더라고요.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미감에 이끌려 바로 선생님 문하에 등록하고 토요일마다 공부하러 다녔죠.”

그렇게 굵고 강한 필선만 고집하던 필체가 구당 선생을 만나 한결 유려해지고 편안한 필체로 바뀌었다. 이를 바탕으로 꾸준히 법고(法古)를 통한 자기만의 노력으로 둥근 붓의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함을 터득하게 됐다. 이후 충남·대전서예전람회대전(도전), 대한민국서예전람회(국전), 대한민국해동서예문인화대전, 한국추사서예대전 등에서 대상을 휩쓸면서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그 와중에 서예에 대한 학식을 높이고자 대학원도 진학했다.

“바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박사학위과정을 밟았어요. 그때 조선조 임금의 어필을 서예사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이 제가 최초이기도 하고 학술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서 나중에 책으로 엮어 낼 계획을 하고 있어요.”

고위 공무원으로서, 철학 박사로서, 전문 서예가로서 이만큼 서예 사조를 깊이 이해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전통에 대한 고집이 남다를 법 한데,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양식으로 확장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시대인과 같이 호흡하고 소통하고자 한 벽암만의 글로벌화다. 그래서 첫 전시 주제가 <발칙한 꿈을 꾸다>가 된 것이다.

▲ 황조가, 63X35cm. 펄펄 나는 꾀고리는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창신(創新)의 정신
<발칙한 꿈을 꾸다> 展에서 가장 눈에 띈 작품은 아무래도 <숭례문>일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이탈리아 로마에 한국문화원을 개원했을 때 3층 중앙 홀 벽면에 썼던 작품이다. 숭례문은 훈민정음 서문을 한글로 도식하고, 콜로세움은 단테 신곡 일부를 이탈리아어로 도식해서 호평을 받았다.

“양국이 대화와 소통을 통해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자는 메시지로 한쪽 벽면엔 숭례문을, 한쪽 벽면엔 콜로세움을 마주보게 해서 썼어요. 그 작품이 못내 아쉬워서 한국에서 축소해서 다시 제작한 거예요. 멀리서 보면 회화인데 가까이에서는 한글이니까 두루두루 살펴보며 좋아해주시더라고요.”

▲ 행복(용혜원 시) 95x35cm.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집에 살아 신발을 나란히 함께 놓을 수 있으며 마주 바라보며 식사를 함께 할 수 있고 잠자리를 함께 하며 편안히 눕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시편 찬양의 시를 건반 모양으로, 주기도문을 십자가 모양으로, 전인권의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를 기타(Guitar) 모양으로, 일본과 영토문제로 쟁점화 되어 있는 독도(獨島)를 ‘독도’ 문자로 도식해서 일반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것이 종래에는 전통 서예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전통에 뿌리를 둔 법고의 차원에서 새로움에 정신을 둔 창신의 차원으로 현대 서예를 이룩하는 게 제 목표에요. 그래서 문자의 가독성을 유지한 채 문자의 다양한 형상을 운용한 서예를 펼치고 있어요. 문화 관광 정책을 실행할 때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요.”

▲ 숭례문, 150x200cm. 숭례문 작품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서문과 한글의 기본 글자를 조합하여 작품한 것이다. 동 작품은 2016년 10월 주이탈리아한국문화원 개원 행사에 초청되었을 당시 문화원 중앙홀에 벽화 작품(4mx2m)하여 호평을 받았다.

2012 헝가리문화원 8폭 병풍 書, 2012 문화재청 정책비전 표어 書, 2012 세계유산 경주 양동마을 문화관 현판 書, 2013 숭예문화복원사업 상량문 書, 2014 아름다운 한글 어제와 오늘 展, 2015 세계유산 정릉 재실 상량문 書, 2015 (재)한국문화재단 현판 書, 2015 세계유산 종묘CI 제작, 2016 주이태리한국문화원(로마)개원기념 서예벽화 제작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서예를 해본 사람이라면 서예가 갖고 있는 잠재된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걸 개발하고 활용해서 우리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도 웅장하게 열어가도록 더욱더 발칙한 노력들을 해나가겠습니다.”

▲ 피사의 사탑, 120x200cm. 이태리 문화의 상징인 피사의 사탑을 이태리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단테 신곡에 쓰인 이태리어를 사용하여 작품화 한 것이다.

벽암 김정남 작가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서예학) 석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동양미학) 박사 과정을 거쳐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문화재청 창경궁 소장, 덕수궁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기획운영과장, 한국서예문화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이자, 연묵회와 성유동행 회원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