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3.9 화 11:55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피플·칼럼
     
[박성서 평론] 영원한 로맨스 그레이, ‘기타 부기’‘월남의 달밤’의 가수 윤일로 Story[1]
경쾌한 리듬으로 우울한 전후시대를 밝게 만들다
2017년 04월 06일 (목) 23:40:03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윤일로씨는 음악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스타 가수다.
50, 60년대 거리마다 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기타부기’와 ‘월남의 달밤’의 주인공인 동시에 ‘내가 울던 파리’, ‘재즈붐’, ‘청춘 아베크’, ‘남국의 룸바’, ‘심야의 탱고’ 같은 모던한 분위기를 구사하는 로맨티스트였다. SP시대에 창작 캐럴 ‘성종이 울리는 밤’도 발표했다.

'일로(一路)'라는 이름은 '오로지 한 길로만 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 하지만 한 길로만 가기에는 재주가 너무 많았다. 직접 작사, 작곡은 물론 MC, 그리고 코미디언 보다 더 놀라울 정도의 성대모사까지 구사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64년 전성기 시절, 대한뉴스 화면을 통해 소개된 선배가수 현인과 함께 부르는 ‘신라의 달밤’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당시에 회자되던 유행어가 ‘몸은 현인, 마음은 윤일로’였다. 강아지 성대모사까지 똑 같이 구사하는 노래 ‘강아지 부기’는 또 어땠는가.

부기우기, 룸바, 탱고, 왈츠 등 유행을 리드했고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냈던 만능 엔터테이너 윤일로씨의 특별함은 오늘날 우리 연예계를 풍성하게 다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도 중요한 날, 의미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카톡 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는 멋쟁이다. 물론 부인이 대신 보내지만 말이다.
현재 매니저 겸 비서 역할을 맡고 있다는 부인 박수전 여사(본명 박순자, 78세)도 60년대에 ‘사랑의 물새 한 쌍’, ‘희망의 청춘’ 등을 발표한 가수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76세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발표한 신곡 ‘돈돈’이 그렇듯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즐겁게 했던 원로가수 윤일로씨의 삶과 사랑,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첫 번째.

글 I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전후 복구시대에 등장한 ‘기타부기’, 세상을 밝게 만들다

1950년대 후반,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 ‘기타 부기’가 발표된다. 이 경쾌한 리듬의 멜로디는 전후사회의 우울한 분위기를 밝게 전환시킴과 동시에 삶에 지친 이들을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1.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부기부기/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부기.
2.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한 번 가면 다시 못 올 허무한 내 청춘/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이 밤이 다 새도록 춤을 춥시다/부기부기/부기우기 부기부기 부기우기 기타부기.
-기타부기/이재현 작사, 작곡, 윤일로 노래, 1959년.

미군들이 귀국할 때 음반을 사갔을 정도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 부기우기 열풍을 몰고 온 진원지였다. 이 ‘부기우기 열풍’의 주인공 윤일로씨는 ‘기타부기’ 외에도 ‘그라스 부기(천지엽 작사, 서영은 작곡)’, ‘사랑의 부기(반야월, 송운선)’, ‘강아지 부기(윤일로, 윤일로)’, ‘즐거운 부기 사랑(송운선)’ 등을 발표, 부기우기 붐을 주도했다.

‘이 밤을 그대와’라는 기획 음반에서 보듯 그는 트위스트, 룸바, 탱고, 도돔바, 스케이팅 왈츠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와 춤을 완벽히 소화하는 멋쟁이 가수로 특히 극장무대에서 인기 절정이었다.

1950년대 후반은 무엇보다 노래와 춤, 그리고 위안이 필요한 시절이었다. 전후 궁핍한 시대에 등장, 삶에 힘겨워하는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주었다.

중학교 때부터 매일 인천 바닷가에 나가 목에서 피나도록 연습

본명 윤승경(尹昇京), 1935년 평양 태생으로 어느덧 82세다. 윤일로라는 예명은 데뷔 초 킹스타레코드사 전속가수 시절, 작곡가 나화랑 선생과 가수 백년설씨가 지어준 이름이다. ‘오로지 가수 한길로만 가라’는 의미다. 어려서부터 숟가락을 들고 남들 앞에서 노래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대여섯 살 때부터 남인수의 ‘서귀포 칠십 리’, ‘인생선’ 등을 불러 동네 어른들로부터 ‘신동’소리를 들었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3월, 11살 때 서울로 온 뒤 인천으로 옮겨 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이때부터 해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무려 14년 동안 축구공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축구광이기도 하다. 해군에 입대해서도 별도로 축구팀을 직접 만들 정도였다. 몸놀림이 빨라 공격과 백, 중계 플레이를 맡는 라이트 이너(Right inner) 포지션을 주로 맡았다. 송도고 1학년 때는 전국대회 우승도 여러 차례 했고 축구로 인해 고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녔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가수로써의 꿈도 키웠다. 숭의동 집에서 낙섬 바닷가까지, 삼십 리 거리를 매일 새벽 4, 5시면 일어나 뛰어갔다.
‘노래를 제대로 하려면 목에서 피가 나야 한다.’라는 당시의 속설로 인해 바닷가에 나가 죽기 살기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훈련은 5~6년 간 계속되었다. 날계란 먹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그 때문인지 이후 콩쿠르에 나가면 어김없이 상을 휩쓸었다.
고1 때 인천에서 열린 콩쿠르에 첫 출전해 ‘비 나리는 고모령’을 불러 1등을 차지한 이후 스무 살, 해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무려 20여 차례 콩쿠르 무대에서 우승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에피소드 또한 많다. 영등포에서 열렸던 콩쿠르에서는 화장실에 있을 때 하필 수상자를 호명하는 바람에 바지지퍼를 미처 올리지 못한 채 시상대에 올라 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음폭이 넓은 만큼 주로 따라 부르기 어려운 곡 위주로 취입

▲ 전성기 시절 ‘무랑루즈’ 무대에서의 윤일로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해군 27기생으로 입대, 해군 군악대에 들어가면서 부터다. 이때 그는 클라리넷을 불었다.

진해에서 해군 복무 중에도 부산에서 열린 콩쿠르에 참가해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백영호 선생과 교류를 갖게 되었고 서울 해군본부로 근무지를 옮긴 뒤에도 계속 콩쿠르에 참가, 이때 작곡가 손석우 선생, 나화랑 선생과 만나게 된다.

‘제대 후 가수가 되려면 찾아오라’는 권유와 함께 명함을 받은 뒤 1955년 제대 후 나화랑 선생를 찾아갔다. 그는 이때를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했다. 만일 손석우 선생을 찾아갔더라면 가수 인생이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싶어서다.
그는 결국 나화랑 선생에게 테스트 후 발탁, 킹스타 레코드 전속가수가 된다. 레코드사가 많지 않았던 때였던 만큼 음반사 전속가수가 된다는 것은 ‘스타 보증수표’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화랑 선생으로부터 고음과 저음, 높낮이가 풍부하다는 평을 받은 윤일로씨는 음폭이 넓은 만큼 주로 어려운 곡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너 없는 세상이란(강사랑 작사, 나화랑 작곡)’, ‘그림자 한 쌍(반야월, 나화랑)’ 등을 취입했으나 악상이 어려워 대중적으로 히트를 하지 못했다는 것. 반면 얼마 뒤 대구에서 올라온 도미(본명 오종수)씨의 경우 상대적으로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들인 ‘청포도 사랑’, ‘비의 탱고’ 같은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했다고 회고했다.

SP 시대의 명곡‘항구의 사랑’, 부산을 노래하다

그로부터 2년 반 뒤 신신레코드사(이후 신세기레코드사로 이름이 바뀜) 전속가수로 옮긴 뒤 작곡가 이재현, 김부해 선생 등을 만나 비로소 ‘기타 부기’, ‘항구의 사랑’, ‘추억의 영도다리’ 등을 발표하며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그가 신세기에서 처음 발표한 노래들은 ‘남국의 룸바(윤일로, 김부해, 1958년)’, ‘연분홍 로맨스(양류상, 벽호)’를 비롯해 ‘청춘 아베크(이철수, 이재현)’, ‘재즈봄(이재현, 이재현)’, ‘돌아오라(이재현, 이재현)’ 등등이다. 모던하면서도 로맨틱한 멋이 물씬 풍기는 이 노래들이 SP시대에 발표된 명곡들이다. ‘기분파 인생(강남풍, 김부해)’, ‘내가 울던 파리(차경철, 하기송)’, ‘순정의 탱고(차경철, 한복남)’, ‘인디안 로맨스(이철수, 김성근)’ 등도 모두 이무렵 축음기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당시는 녹음실 여건이 매우 좋지 않을 때였다. 녹음 장비도 열악했지만 방음시설 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창문을 미군 담요나 가마니로 가리고 녹음해야 했다. 때문에 엿장수라도 지나갈라 치면 녹음을 중단했다가 가위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녹음해야 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회고한다.

당시 대중가요도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본격적인 사랑노래로 눈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크게 히트한 곡이 ‘항구의 사랑’이다. 1959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안정애의 ‘대전블루스’와 함께 음반 앞뒷면에 함께 실려 발표됐다.

1. 둘이서 걸어가던 남포동의 밤거리/지금은 떠나야 할 슬픔의 이 한 밤/울어 봐도 소용없고 붙잡아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대사)영희야 울지 마라 응? 울어 봐도 소용없고 붙잡은들 무엇 하니? 어차피 떠나가는 마도로스가 아니냐. 응? 영희야 잘 있어.
2. 네온 불 반짝이는 부산극장 간판에/옛 꿈이 아롱대는 흘러간 로맨스/그리워도 소용없고 정들어도 살지 못할 항구의 사랑/영희야 잘 있거라 영희야 잘 있거라.
-항구의 사랑/최치수 작사, 김부해 작곡, 윤일로 노래. 1959년.

이 노래는 부산항에 잠시 머문 마도로스와 부산아가씨의 짧은 사랑을 그린 노래다. 노래 속에 나타나 있는 남포동 거리, 부산극장 등이 사랑의 배경이 되어준 장소다. 당시 젊은 아베크족들의 최고의 데이트코스였던 부산극장, 그리고 남포동 거리는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다시금 전국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 되살아난 곳이기도 하다.

‘추억의 영도다리’그리고 ‘제3의 고향 부산’...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항구에 관한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만남과 이별의 장소인 부산항과 더불어 마도로스(항해사) 관련 소재는 50, 60년대 대중가요에 자주 등장했던 주요 테마였다. 입에 문 파이프 담배, 멋진 마도로스 모자는 남성적인 매력이 한껏 돋보였다. 이러한 마도로스 관련 노래 중 하나가 ‘항구의 사랑’이다.

또한 ‘추억의 영도다리’를 비롯해 본인이 직접 만든 노래 ‘멋쟁이 마도로스’, ‘내 사랑 희야’가 그렇듯 그는 부산 관련 노래들을 유독 많이 발표했다. ‘청춘 12열차(한산도, 백영호)’, ‘메리켕(아메리카라는 뜻) 부두(월견초, 김부해)’, ‘잘 있거라 제3부두(천봉, 허경구)’, ‘야속한 부산열차(반야월, 김병수)’ 등등. 스스로 부산을 ‘제3의 고향’이라 여기듯 실제로 그는 80년대에 직접 부산으로 이사, 당시 부산에서 녹화했던 ‘장수무대’ 같은 TV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진행하기도 했다.

작사, 작곡, 진행까지 네 박자를 모두 갖춘 엔터테이너

▲ 전성기 시절의 윤일로
가수로서 ‘기타부기’, ‘항구의 사랑’ 같은 많은 히트곡을 남겼지만 그는 작곡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군악대 시절, 배운 실력을 바탕으로 직접 싱어송라이터로 활동을 시작한다. 특히 제대할 때 행진곡을 하나씩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엄한 제도가 그에게 작곡에 눈 뜨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첫 작곡은 ‘화류 일야’와 ‘파리의 마돈나’, 1962년도에 발표되었다. 계속 해서 ‘눈물의 키스’, ‘그대 없는 일요일’, ‘비 젖은 골목길’ 같은 노래를 발표한 데 이어 후배가수 남진씨에게 ‘타향에서 뼈를 묻으리’와 전국노래자랑의 MC 송해씨에게 ‘노총각 맘보’ 등을 만들어주어 취입시켰다. ‘싱어송라이터 윤일로’에 관한 부분은 다음 호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전쟁고아의 아픔을 그린 ‘집 없는 아이’

1961년에 발표한 ‘집 없는 아이(최치수, 김성근)’ 또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노래다. 당시 수많은 전쟁고아들과 마찬가지로 혼혈아 문제 역시 전쟁이 남긴 비극이었다.

1.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 속에서 솟았나요/날 버리고 가실 때는 부모님도 울었으리/나는 이제 울지않아/다방에서 다방으로/담배장사 하더라도 눈물 닦고 살리다.
(대사) 아저씨 담배사세요, 그럼 만년필 하나 사세요. 싫어 싫어 오늘은 꼭 사야 해, 맨날 거짓말만 하는 걸 뭐.
2, 눈물 나고 사람 났나 사람 나고 눈물 났나/나를 두고 돌아설 때 하늘땅도 울었으리/나는 이제 죽지 않아 피를 팔아 고학을 해도/모진 세파 싸우면서 눈물 닦고 살리다.
-집 없는 아이/최치수 작사, 김성근 작곡, 윤일로 노래. 1961년.

때를 같이 해 ‘생일 없는 소년(최치수 작사, 김성근 작곡, 김용만 노래)’이 등장했고 ‘집 없는 천사’라는 제목의 영화도 개봉되었다. 혼혈아 문제를 정면으로 ‘엄마 나만 왜 검어요’라는 소설이 많은 국민들을 울렸고 기지촌을 살아가는 혼혈아 에니박의 실화가 소설로 출간, 영화화되며 주제가 ‘내 별은 어느 하늘에’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거리에 핀 꽃(이재현 작사 작곡, 윤일로 노래)’이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이다. 미군이 들어오고 ‘헬로, 오케이’ 같은 영어 단어가 국민들 입에 오르내렸다. ‘기브 미 초콜레트’가 어린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어린 구두닦이 소년들은 구두통을 들고 다니며 ‘슈샤인!’을 외쳤다. 담배 장사하는 아이, 신문팔이라 불리던 소년들도 쉽게 볼 수 있었을 만큼 전쟁고아들이 거리에 넘쳐 났다. 당시 공연 전단지 아래에 적혀 있던 ‘내 자식 귀엽거든 전쟁고아 사랑하자’는 글귀만큼이나 전쟁의 후유증이 컸던 시절이었다.

대한뉴스와 함께 등장한 유행어, ‘몸은 현인, 마음은 윤일로...’

윤일로씨의 놀라운 모창 실력을 실감케 했던 영상 중 하나가 1964년 2월, 대한뉴스 456호에 소개된 ‘노래의 선물’이다. 바로 소개된 선배가수 현인과 함께 부르는 ‘신라의 달밤’ 영상이다.
1절은 현인이, 2절은 윤일로가 부르는데 특히 윤일로씨가 과장된 모습으로 눈을 치켜뜨며 현인의 제스처와 목소리를 흉내 내는 모습에 관객들은 배꼽을 잡았다. 웬만한 전화번호는 모조리 외우는 탓에 전화번호 수첩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소문난 기억력과 예리한 눈썰미가 빚어낸 명장면이었다.
이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나온 유행어가 바로 ‘몸은 현인, 마음은 윤일로...’였다. 이 유행어는 시대에 따라 계속 이름이 바뀌며 회자되었다. 여전히 멋진 중절모 차림의 모습에서 새삼 현인의 풍모와 오버랩된다. 한때 ‘몸은 현인, 마음은 윤일로...’에서 이제는 ‘몸은 윤일로, 마음은 현인...’인 듯 외모까지 닮아가는 모습이 한편, 신기하다.

60년대 중반, 박수전 여사와의 결혼과 더불어 윤일로씨는 거침없는 질주를 계속한다. 바로 ‘월남의 달밤(반야월, 김성근)’이 발표된 것이다. (계속)


 

박성서의 다른기사 보기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