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오 작가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새가 등장한다. 끝 간 데 없이 깊고 넓은 바다의 심해 속 또는 태양의 첫 빛이 발하는 천공의 구름 속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다. 영원한 존재이자, 새로운 의미를 전해주는 존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하던 바로 그 새다.

신선영 기자 ssy@

새

▲ 허은오 작가.

벌새와 파랑새. 작은 체구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참새와는 몸 색깔부터 다르다. 그래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치면 눈에 선명히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게 벌새와 파랑새다. 허은오 작가에게도 그랬다.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그 순간들을 기억하게 하는 새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돌연 떠난 유학길에서 낙이라곤 산책 밖에 없었어요. 제가 있던 업스테잇뉴욕이 도시 외곽이라서 산과 공원이 많았거든요. 그때 봤던 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새에요. 야생 새인데도 한 번씩 제 앞에 와서 앉고는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작품 속 새들은 모두 세밀하게 그려졌다. 한 털 한 털씩 살려서 새의 존재를 부각했다. 마치 진짜 새가 내려앉은 것처럼 새로우면서도 놀라운 느낌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제 작품에서는 새가 정말 중요해요. 예로부터 동양화에서도 지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매개체이자 통로로서 역할을 해왔잖아요. 제 작품에서도 현실에서 작품 속 고요 공간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허은오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현실의 밑 또는 현실의 위처럼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새 없이는 지나치게 삭막하거나 지나치게 경이롭다는 느낌을 준다. 전혀 다른 차원, 즉 초월된 공간이다.

바다
“‘미지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 어디쯤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우선 바닷속이 그곳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물의 유동성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았어요. 그건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물감을 미디엄과 섞어내기 시작했어요.”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먼저 먹을 사용했다. 선의 영역을 벗어난 먹의 번짐과 흩어짐, 여기에 미국 유학 시 습득한 유화를 가미해서 지금의 다채로운 심해를 완성했다. 고요하나 그 어떤 세계보다 응축된 힘으로 가득한 세계다.

▲ 窈, 72.7x91cm, mixed media on canvas.

“물감과 미디엄을 섞어내는 비율에 따라 빠르게 번지고 느리게 번지는 유동성이 결정돼요. 이걸 흐르고 번지게 해서 순간을 포착하는 거예요. 범짐의 추상성과 겹침과 풀림의 유동성이 한데 어우러지는 거죠.”

이렇게 바탕이 만들어지면 대상을 하나둘 그려 넣는데 여기에는 새뿐만 아니라 매난국죽도 들어간다. 그 중에서도 난에 애착을 갖고 있다. 난에는 “한 시간에도 모든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꽃대 하나에 어우러진 피는 꽃, 핀 꽃, 지는 꽃, 떨어지는 꽃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서는 거였다. 이렇게 시각적 한계를 넘어 가다보니 어느덧 하늘에 이르게 됐다.

▲ 窈, 53x53cm, mixed media on canvas.

하늘
“처음에는 먹빛 바다에 새 하나를 그렸어요. 자기 성찰에 필요한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색채가 점점 가미되고, 새도 한 마리씩 더 그리더니 이제는 지상 낙원인 하늘까지 그리게 됐어요. 고요 속의 조화에서 조화 속의 고요로 심경에 변화가 온 거죠.”

광활한 하늘에 어스름히 떠오르는 태양, 그 따사로움이 물든 하늘은 묻혀있던 생의 감각을 되살려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새들도 훨씬 더 생기 있어 졌다. 이는 ‘자연의 고요함으로 마음을 다스리면 세속이 맑아지고, 세속의 고요함으로 생활을 지속하면 활기가 생긴다’는 노자 사상과 맞닿는다.

▲ 靜, 70x145cm, mixed media on canvas.

“제 전시 주제가 <고요함이 필요한 순간>이에요. 자연의 고요를 가까이 하라는 노자의 말이 와 닿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 고요를 극대화하기 위해 화조를 더 뚜렷이 해서 심연(해저와 천상)을 실제처럼 마주치게 했어요. 이때 경험하는 심미의 체험이 많은 분들에게 즐거움으로 연결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는 수많은 심미적 순간들을 작가는 다시 불러 세웠다. 이러한 환시적 체험이 그의 작품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고답적 감성이 삶을 돋보이게 해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 어떤 시도들로 다시 세상의 경계를 넘어보일지 주목해본다.

▲ 窈, 50x60cm, mixed media on canvas.

허은오 작가는 숙명여자대학교 회화과 학사,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뉴욕에 5년 동안 머물며 미국 미술 사립 명문대인 RIT(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Fine Arts(순수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10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60여회의 단체전과 17번의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가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며 박사 재학 중이며, 숙명여자대학교, 전북대학교, 군산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