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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에 한없이 맑은 웃음으로 주위를 전염시키다
장창익 작가
2013년 03월 05일 (화) 10:53:54 김대수 기자 kds@newsmaker.or.kr

인류의 예술발전역사를 돌이켜보면 예술은 원래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원시시대에는 생산을 상징하거나 노동을 도와주는 목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의 교육을 목적으로, 중세에는 종교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예술 활동이 전개되었다.

오늘날에는 문화 전반에 파고드는 상업주의에 떠밀려 예술의 순수성이 점차 상실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특유의 순수함으로 관객들에게 예술의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는 작가 장창익이 주목을 받고 있다. 
   
▲ 작가 장착익은 50대 초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한창 꽃필 나이였던 만 21세에 지뢰를 밟아 왼쪽 발과 왼쪽 눈을 잃은 뒤 30년 간 혼자 그림을 그려온 그가 생에 처음으로 열었던 개인전이었다. 쉽게 개인전을 하지 않겠다는 젊은 시절의 생각에서 비롯된 고집의 결과다.

그림 그리기는 생명이자 숨쉬기
지난 2008년, 작가 장착익은 50대 초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한창 꽃필 나이였던 만 21세에 지뢰를 밟아 왼쪽 발과 왼쪽 눈을 잃은 뒤 30년 간 혼자 그림을 그려온 그가 생에 처음으로 열었던 개인전이었다. 쉽게 개인전을 하지 않겠다는 젊은 시절의 생각에서 비롯된 고집의 결과다. “30년 전에 절단되고 없는 왼발이 지금도 날만 궂으면 쑤신다”고 말하는 그는 “마흔을 전후한 몇 년이 가장 힘들었다. 진통제 사고 남은 돈으로 화선지, 장지, 먹을 사서 그림만 그렸다. 고통에 대한 오기였는지도 모른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한 때는 증오와 분노를 그렸었고 한 때는 바다에게 연애편지를 쓰며 세상과 담을 쌓고 게으름 없이 곁눈질 없이 그림으로 일기를 쓰듯 작업을 해온 작가는 전통 문인화로 한국화를 시작했다. 수묵채색 수묵담채 작업을 하면서 밀도에 대한 목마름으로 장지채색을 선택한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그는 바다를 꿈꾼다. 바다 위에서 기다리고 환호하며 분노하고 토한다.

세상을 용서하고 생을 살아갈 희망을 반짝이는 물살 위에서 거둬들인다. 그림그리기는 그의 생명이다. 숨쉬기이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두려운 내일을 비관으로 밑그림 그리고, 시린 뼈로 뒤척거린 새벽을 뒤로하고,’ 작은 행복에 한없이 맑은 웃음으로 주위를 전염시킨다. 이미 거장이거나, 거장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아니면 거장에게 빌붙는 세상살이의 시끄러움은 안중에도 없고 화폭 앞에 앉아 있는 그는, 길들여지지 않는 사내, 세상이 정복하지 못하는 바위이다. 80년 오월의 피 냄새와 이데올로기, 부적, 탈, 민중, 바다, 무당, 액막이, 앵도 열매, 매화꽃, 잡풀, 해바라기, 섬, 곱추, 사랑, 거문도, 고독은 작가와 함께 산다.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려는 어린아이의 손놀림처럼, 사실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그의 손놀림은 분주하기만 하다.

그가 발을 딛고 사는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소재들과, 고된 삶의 위안처럼 다가오는 작품의 소재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가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상호 보완적인 기능을 하는 두무더기의 말벗들이 그를 땅위에 서 있게 만드는 균형추다. 그의 그림은 육지를 그리워하는 배, 선원들의 향기이다. 항구를 찾아 배의 후미가 보였다 안보였다 하고 파도에 온몸을 기우뚱거리며 다가가는 절규이다.
   
▲ 1993 240x180 수묵채색

민중미술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지다
키 182cm의 우람한 장정이었던 작가 장창익은 입대한 지 넉 달 만에 판문점 인근 육군 1사단 병영에서 월동용 무 구덩이를 판 뒤 화장실에 가려고 내무반 옆을 지나다 지뢰를 밟은 후 한때 모든 꿈과 희망을 잃기도 했다. 방황을 계속하던 시절, 동양화를 배워보지 않겠냐는 큰형의 권유에 남농 허건의 문하에서 2년간 사숙하고, 미대 입시에 도전해 추계예술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졸업 직전 교통사고로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고 낙향해 돼지우리를 개조한 작업실에 틀어박혔다. 연금으로 먹고 살면서 가족도, 친구도 거의 만나지 않고 그림만 그렸고, 1996년에는 4년간 고기잡이 배 선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거문도에서의 고된 노동과 자궁 같은 바다는 그의 가슴 속에 있던 증오와 분노를 녹이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이후 작가가 민중미술의 정체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했다. 추계예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한 작가 장창익은 지금까지 총 5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동서 민족미술 교류전, 한국화 9인 9색전, 전국 민족미술전, 땅울림 꽃바람전, 전남민족미술제,여수국제아트페스티발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우리의 색, 오방색 전 등 국내 유수의 초대전 및 단체전에 참가하며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여수엑스포 주관 사생대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현재 여수 민족미술협의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는 5월 갤러리 평창동에서 특별 초대전을 가질 예정이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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