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 그림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천착해 나간 최정윤 작가. 천연 염색을 한 한지로 회화와 조각의 특성을 지닌 부조 작품을 만들고 있다. 삶의 굴곡과도 같은 돋음과 내려앉음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생명, 사랑, 희망과 같은 생의 감각들을 어루만지고자 한다.

신선영 기자 ssy@

한지로 만든 그림

▲ 최정윤 작가.

돋을 그림. 최정윤 작가가 천연 염색을 한 한지로 캐스팅(입체 성형)한 작품들을 일컫는다. 그 시작은 1992년으로 거슬러 간다. 석판, 동판, 실크스크린, 목판 등으로 만든 판화 작업에 한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깊게 부식된 동판에 보다 입체적인 느낌을 실어주고자 한지를 부조한 돋을 그림을 만들게 됐다. “한국적인 정감으로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의 순응 세계를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에 고집한 한지였고, “그것을 입체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용한 부조였다.

그래서 가장 공을 들이는 재료도 한지다. 오로지 직접 염색한 한지만을 사용하고 있다. 한지 위에 채색을 하거나 색지를 사다 쓰면 수월할진데 꼭 천연 염색을 직접 해서 자연의 색 그대로를 담아내고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가 자연에서 체득한 현상의 색이다. 천연 재료에서 추출한 염액에 한지를 담가 색을 정착시킨 뒤 햇볕에 말리는 작업으로 자연의 색을 얻어내기 때문이다.

“천연 염색은 한지의 원료인 닥 펄프에 소목, 황벽, 괴화, 치자, 황련, 쪽물, 홍화, 울금, 쑥, 밤 껍질, 양파 껍질과 같은 천연 재료로 직접 염색물을 들이는 것을 말해요. 이때 다른 화학 물감인 유화나 아크릴에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한 색채가 한지에 배게 되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이 깨끗해지고 맑아지는 기분 탓에 저로서도 치유되고 정화되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한지를 물감 삼아 손을 붓 삼아 만드는 그의 작업 과정은 느리지만 섬세하고 단호하나 부드럽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거려 감정을 차분하게 정돈시키듯 한지를 꼼꼼하게 가다듬어 더욱 입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렇게 작업에 매진하다보니 어느덧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 회귀-나모(南無 namo), 90x180cm, 2008.

구상에서 추상으로
25년 동안 작가는 많은 변화를 시도했다. 1995년에 연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무속이나 장승같은 소재들을 담아냈다. 운주사의 석불, 불회사의 돌장승, 진도 씻심굿의 한풀이를 소재로 한 것은 “한과 고뇌와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하는 인간의 모습이 마치 그림으로 맺힌 것들을 풀어나가는 나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999년에 연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흙과 안료를 섞어 갈색 계열의 모노톤을 구현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담담한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 <상여>가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다하면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실, 그 진실을 예거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화시켰다.

▲ 흐름–The ocean(流, A flow), 56×86㎝, 2016.

2002년에 연 세 번째 전시부터는 <돋을 그림>을 공식 타이틀로 삼고 꽃, 나무, 바다, 하늘 등을 주요 소재로 자연주의적인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다.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회귀-백련>에 대해 “지나온 삶의 아픔을 백련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다”고 말하며 세속의 무게를 벗어내고자 한 의지적 자세를 드러냈다.

“회귀라는 주제로 백련을 많이 그렸어요. 누구나 살면서 삶의 고비를 겪잖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고비를 넘기면서 겪었던 아픔을 새하얀 백련으로 승화시키고자 했어요. 중국의 옛 시 중에 <애련설>이라는 시가 있어요. 연꽃은 진흙 속에서 펴도 더럽지 않고, 멀리서 불어와도 향기가 그윽하다고 표현한 시에요. 제가 연을 그린 것도 이런 심성을 사랑해서가 아닐까 생각해요.”

▲ 흐름–Two trees(流, A flow), 59×106㎝, 2016.

이렇게 점점 자연으로부터의 명상 세계를 찾아 나선 작가 최정윤은 근래에 들어 <흐름>을 주제로 추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2016년 12월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첫 선을 보이며 관람자들의 주목을 받은 <흐름> 시리즈는 천연염색을 한 한지를 잘라서 켜켜이 쌓는 방식으로, 이전보다 더 함축되고 은유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구체적인 묘사는 피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해석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한지 추상의 세계에 푹 빠진 것이다.

“저에게 미술 작업은 마음에는 안정을, 정신에는 평온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세계에요.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 가듯 묵묵히 걸어가며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덜어내며 훨훨 비워내는 삶을 살고자 해요.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으로요.”

▲ (좌) 흐름–grayⅡ(流, A flow), 90×90㎝, 2016., 2016. (우) 흐름–red(流, A flow), 90×90㎝, 2016.

최정윤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14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50여회의 국내외 단체전, 기획전, 초대전에 참가했다. 한국미술협회, 한국현대판화가협회, 세계종이조형작가협회 회원이자, 신미술대전, 전국한지대전 초대작가다. 2014년에는 전주시 공모 입주 작가로서 전주한옥마을 창작예술공간을 일 년간 운영했다. 현재는 2017년 1월 19일부터 3월 12일까지 전주한지박물관에서 인생·흐름 이라는 주제로 <돋을 그림> 초대전을 열며 한지 문화의 활성화를 일으키고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