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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정몽준 의원
그에게서 한국의 미래를 보다
2009년 05월 04일 (월) 14:36:21 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정몽준 현 한나라당 의원. 지금은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한때 그가 없었다면 한일월드컵을 우리가 유치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고 그는 해냈다. 비록 공동개최였지만, 정몽준 의원 덕택에 우리는 안방에서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을 볼 수 있었고, 한국의 축구전사들은 홈그라운드에서 펄펄 날았으며, 월드컵 4강 신화라는 놀라운 성과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가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故 정주영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재력가 집안이라는 것을 티내지 않았던 정몽준 의원. 최근까지 그가 진행하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자. 그는 진정한 ‘한국을 움직이는 힘’이다.

   
▲ 공직이란 봉사라고 말하는 정의원
1951년 10월 17일 현대그룹 창업자인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8남 1녀 중 6남으로 태어난 정몽준 의원은 어렸을 적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워낙 대식구다보니 그러했을 수도 있지만 단체 생활 같았던 집안 분위기에서 정 의원은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내야 했다. 그는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에만 평생을 바친 전형적인 한국 여인”이라고 회상한다. 그러한 어머니가 있었기에 정주영 회장이 있을 수 있었고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

“학창시절, 그는 튀지 않는 조용한 우등생이었다”
학창시절, 늘 상위권을 지키며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던 정몽준 의원은 1970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의 정 의원에 대해 친구들은 “항상 겸손하고 성적도 우수하며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인관관계를 유지하는 우등생이었다”고 회상한다. “공부도 잘했지만 싸움도 제법 했었다”고 이야기하는 한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현대家의 아들인지 모를 정도로 튀지 않는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그는 눈에 별로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스포츠를 할 때는 마치 매서운 호랑이와도 같았던 정 의원은 체육 시간이면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축구, 스키, 농구 등의 스포츠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였지만, 그만큼 골절상 등의 부상도 많이 입었던 학생이 바로 정 의원이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75년 13기 ROTC 소위로 임관한 정 의원은 2년 뒤인 1977년 육군 중위로 만기 전역했다.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정몽준 의원은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만 일하면 일정한 범위 내의 좁은 세계밖에 모르는 이른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세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정 의원을 그 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 그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곳은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이 ‘뉴요커’가 된 듯한 기분에 뉴욕 생활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지만, 차분히 공부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이듬해인 1978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로 옮겼고 그 곳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던 정몽준 의원은 1980년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치’로의 첫 입문과정

1980년 귀국한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5년 뒤인 1985년에 이홍구 전 총리의 추천으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존스홉킨스 대학의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공을 경영학에서 정치학으로 바꾼 것은 당시 이홍구 교수와 한승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 특히 정주영 명예회장은 가문에서 한 사람 정도는 공직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1987년부터 88년까지 1년 반 동안 일본 도쿄대학 객원교수를 지내면서 일본의 관계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정치에 대해 하나하나 터득해 갔다. 이후 정 의원은 93년 5월 <일본에서의 정부와 기업 관계>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현역 국회의원의 신분으로 정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정 의원은 미국과 일본에서의 유학을 통해 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과 함께 세계의 리더인 미국과 일본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두 가지가 정 의원의 유학생활의 최대의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머물기 전 정몽준 의원은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려고 했었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만류로 출마하지 못했다. 정 의원이 언젠가 전두환 前대통령과 둘만이 있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전 대통령이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정 의원은 “신문 등 매스컴에서는 대기업을 재벌이라고 부르며 비난을 하고, 비판하고 있다. 나는 이런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공직에 몸을 담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그러면 공직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정 의원은 “공직이란 글자 그대로 공적인 서비스(public service)로 여러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의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지만 이번 선거(12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은 결국 12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단념하고, 85년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전두환 前 대통령 덕분에 좋은 학문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학문적으로 더욱 정치에 대해 ‘박사’가 되어갈 수 있었다. 1987년 동경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정 의원은 이듬해에 실시되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이때에도 전두환 대통령이 다시 불러 “여당의 후보로 입후보 해달라”고 했으나, 정 의원은 이를 거절하고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정 의원은 1988년 13대 때 처음 국회의원이 된 이후 14, 15, 16, 17대 선거에서 내리 당선되어 5선을 기록했다. 정 의원은 국회의원을 시작하면서 정치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공직(public service)을 하는 기분으로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 의원은 국회의원 이외에도 여러 가지 책임을 맡고 있는데 어떤 경우든 퍼블릭 서비스의 정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 아내 김영명여사와 함께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일등공신

정몽준 의원은 1993년 1월 12일 대한축구협회 제47대 회장에 취임했다. 정 의원은 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보나마나 안 된다”, “일본에 승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 의원은 우선 1994년 5월 13일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월드컵 개최지는 회장과 각 대륙별 부회장을 포함한 21명의 집행위원이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 의원이 FIFA 부회장이 됨으로써 월드컵 개최지 결정에서 일단 한 표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정 의원은 이때부터 1년의 1/3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면서 월드컵 유치를 위한 강행군을 계속했다. 1994년부터 1996년 5월 31일 월드컵 개최지 결정 때까지 정 의원은 150만km가 넘는 거리를 다녔는데 이는 지구를 15바퀴 도는 거리에 해당한다. 1996년 5월 31일, 비록 공동개최이기는 하지만 결국 2002년 월드컵 유치라는 목표를 이루어냈다. 일본에 절대 불리할 것이라던 예상을 뒤엎은 정몽준 의원의 외교력과 추진력의 승리였다.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잘 살린 우리의 축구전사들은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환상적은 호흡을 통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어냈다. 공동개최국인 일본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에 반해 우리는 월드컵 4강 신화를 통해 수천억 원의 경제효과는 물론,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서 드높였다. 정몽준 의원이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력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정몽준 의원이 아닐 수 없다.

본격적인 의정활동과 이룬 성과들
정몽준 의원은 국방위원회, 교육위원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해왔다. 상임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신대 문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일본의 군사대국화 문제, 한미 간 안보협력 문제, 남북 간 군축의 필요성 등 한일, 한미, 남북관계를 주로 다루어 왔다. 또한 정 의원은 OECD 가입, 일본의 독도 망언, 한일어업협정 체결, 일본의 10억 달러 차관 제공, 동티모르 파병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국가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입장을 개진하였다. 정몽준 의원은 우리나라의 실패한 20년 정치실험을 마감하고, 의회정치의 정상화를 이루겠다며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07년 대선에서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아 TV 연설은 물론 대중유세까지, 이명박 후보의 지지를 호소하며 전국을 누벼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루어 냈다. 또한 만장일치로 한나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집권여당의 지도자로서 정치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2008년 2월, 이명박 당선인의 대미특사단장으로 미국을 방문한 정 의원은 조지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을 모두 만나는 한미 외교사에 전례 없는 큰 성과를 이루며, 한미 동맹강화 및 북핵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21세기 사람들이 ‘정몽준’을 원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꿈을 현실로 만드는 강한 의지와 능력, 탄탄한 경제이론과 풍부한 경영 경험, 국익을 지키는 세련된 외교력, 대한민국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초당파적 정치 그리고 부정부패를 유달리 싫어하는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 때문이다. 특히 ‘월드컵’하면 누구나 ‘정몽준’을 떠올리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는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약속한 것이 있었다. “일본이 현재 한 발 앞서가고 있지만 1996년 총회까지 3년 여가 남아 있으니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경험을 살려 꼭 월드컵을 유치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그의 약속을 들으며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 뒤, 공동개최에 코웃음을 쳤던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 스스로 한일공동개최를 제창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국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이 안 되는 이유를 말할 때, 되는 방안을 찾았던 정몽준. 그는 21세기가 요구하는 긍정적인 사고와 강한 도전의지를 가진 진정한 21세기의 한국을 움직이는 힘이라 할 수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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