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저자  김정형gorome@hanmail.net

■‘굴욕외교의 대명사’ 뮌헨회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11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와의 뮌헨 회담 후 ‘우리 시대의 평화가 도래했다’고 천명했지만 그가 가져온 합의문은 1년도 안 돼서 휴지 조각으로 변하고 2차 대전이 발발했다”면서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평화협정에 서명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후보는 이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세계일보 주최로 열린 ‘동북아 정세와 안보 리더십’ 심포지엄 축사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진정한 평화와 가짜 평화가 무엇인지 교훈을 얻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조선일보 2012년 11월 13일)

▲ 뮌헨 회담 당시의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왼쪽부터)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1938년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다. 비록 주데텐란트에 독일계 주민 300만명이 거주하고 있긴 하지만 체코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주요 공업지대였던 터라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데텐란트에 “완전한 자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머뭇거렸다. 히틀러에게 평화적으로 주데텐란트를 넘겨준다면 전쟁이라는 파국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영국은 조그만 나라 체코때문에 대영제국이 전쟁에 휩쓸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프랑스는 외국의 침략이 있을 경우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켜주기로 체코와 조약을 맺은 상태였는데도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주데텐란트를 넘겨주는 것에 내심 찬성하고 있었다.
1938년 9월 15일 한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69세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얻어낸 것은 “두 사람이 다시 회담할 때까지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  뿐이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그 사나이는 냉혹하고 고집투성이이지만 나는 그의 참다운 모습을 보았다. 나는 그 인물에게서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지인에게 말했다. 9월 18일 영·불 양국 총리는 체코가 히틀러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한다는 데 합의했고 이튿날 양국의 뜻을 체코에 전달했으나 체코정부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불이 “체코가 거부한다면 체코의 운명에 관심을 갖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 소리만 할 뿐 9월 21일 결국 영불안을 수락했다. 힘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9월 22일 독일에서 가진 히틀러·체임벌린의 두번째 회동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10월 1일까지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프랑스와 협의했으나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체코는 9월 23일 “10월 1일 시한을 거부한다”며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히틀러가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손에 넣겠다고 선언하면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유럽 하늘을 뒤덮었다. 런던에서는 방공포 파기, 학생들 소개(疏開), 병원의 피난이 시작되었고, 파리에서는 시골행 열차와 도로가 극도의 혼란을 이뤘다.
체임벌린과 프랑스 수상 달라디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만나기 위해 9월 29일 독일 뮌헨으로 갔다. 낮 12시 45분에 시작된 회담은 9월 30일 새벽1시가 조금 지나서야 끝났다. 뒤이어 4개국 정상은 곧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정작 당사국인 체코의 외무장관은 협상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옆방에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처칠은 “우리들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패배를 보았다”는 유명한 연설로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사소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히틀러의 요구를 거의 원안대로 수락하는 협정 내용이 발표됨에 따라 독일군은 주데텐란트에 무혈입성했다. 80만명의 체코인을 포함 360만명의 인구와 2만8500㎢의 영토, 그리고 공업자원의 75%가 하룻밤 사이에 히틀러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이로써 주데텐란트에 있던 방대한 체코 요새 대부분이 독일로 넘어가 체코의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 방위선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방위선이었다. 석탄생산 66%, 시멘트생산 80%, 제철의 79%, 전력의 70%도 독일로 넘어갔다. 번영하던 공업생산국이 하루아침에 파산한 것이다.
마치 항구적인 평화라도 보장받은 양 의기양양하게 영국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뮌헨협정의 사본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영국인들로부터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심지어 노벨평화상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해 2차대전을 일으킴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결국 뮌헨협정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추구했던 유화정책의 비극적인 절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의 이리떼들에게 던져줌으로써 서방은 기껏 세계대전에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만 벌었을 뿐이었다. 2차대전에서 살아남은 히틀러 측근 장군들은 한결같이 뮌헨협정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히틀러가 10월 1일 체코를 침공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독일은 그 전쟁에서 순식간에 패했을 것이라는데도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잠깐 동안의 평화를 위해 히틀러가 무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제공해준 꼴이 된 것이다.

■홍신자와 존 케이지

한국 현대무용의 ‘전설’로 불리는 무용가 홍신자씨의 ‘네 개의 벽’이 11월 20, 21일 오후 7시30분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앙코르 공연된다. 미국 음악가 존 케이지(1912∼1992)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이 공연은 지난달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으나 관객들의 공연 요청이 쇄도해 다시 이틀간 같은 장소에서 재공연하게 된 것. ‘네 개의 벽’은 존 케이지가 1944년 동명의 피아노곡을 발표한 뒤 무용계에서는 잊혀졌다가 40년 만에 1985년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 공연에서 홍신자 안무의 댄스 드라마로 재탄생한 작품이다. (세계일보 2012년 11월 14일)

<홍신자>

▲ 홍신자(왼쪽)와 존 케이지

홍신자(1940~ )의 춤은 극히 단순한 움직임들의 연속이지만 아무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 나온다. 홍신자는 충남 연기에서 태어나 1963년 숙명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가을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연히 현대무용가 알윈 니콜라이의 춤을 보는 순간 “바로 저거야”라는 깨달음을 얻고 27살 늦은 나이에 무용계에 입문했다. 1970년부터 이듬해까지 알윈 니콜라이 무용학교에서 춤 동작을 익히고 1972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뉴욕의 댄스 시어터 워크숍에서 안무가 오디션에 뽑힌 그녀는 1973년 3월 ‘제례’를 무대에 올려 신인안무가 및 무용수로 데뷔했다.
30대 나이에 죽은 언니를 추모한 ‘제례’는 전통적인 한국의 곡으로 시작되어 촛불에 만장을 사르고 모호한 탄식을 허공에 퍼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제례’는 뉴욕에서 20회 이상 연속공연을 가졌고 수개월 뒤 서울 무대에도 올려졌다. 1973년 9월 26일 홍신자는 한국 최초의 전위무용인 ‘제례’를 비롯 ‘사다리’, ‘실내’ 등을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발표했다. 무대 중앙에 놓인 제사상 앞에서 제문 종이를 태우고 옷을 갈아입고 의자를 창밖으로 던지는 등의 도발적인 행위들로 구성된 ‘제례’ 공연이 한국 무용계에 던진 충격은 컸다. “춤 공연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극찬과 함께 “춤에 대한 모독”이라는 날선 비판이 극명하게 갈렸지만 어쨌든 이 춤 한편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의 불씨를 지핀 인물”로 이름 석자를 선명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1974년 10월 뉴욕에서 가진 ‘전진’ 공연 때는 알몸으로 공연해 뉴욕타임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홍신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뉴욕인들에게 신선한 춤을 선보였고 그때마다 언론으로부터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홍신자는 점차 “동양 춤과 서구 실험무용의 미학을 조화시킨 안무가”로 인정받아 전위무용계에 입지를 굳혔다. 그런데도 1976년 돌연 인도로 명상수행을 떠나 오쇼 라즈니쉬 문하로 들어갔다. 도를 깨우치기 위해 며칠씩 잠을 자지 않고 단식을 하고 맨발로 걷는 등 각종 고행을 감내했다.
1979년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의 춤에서는 구도적이고 명상적인 색채가 짙게 나타났다. 자유와 구도가 당시 홍신자 춤의 화두였다. 홍신자는 뉴욕에서 존 케이지, 다카하시 유지, 백남준 등의 아티스트들과 작업을 함께 하면서 명상과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삼는 현대 무용가이자 안무가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의 무용평론가 우장핑은 자신의 저서 ‘세계무용사를 만든 18인’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홍신자를 이사도라 덩컨, 바슬라프 니진스키 등과 나란히 이름이 올려 ‘동양 전통미학에 뿌리를 둔 서양 전위무용의 꽃’으로 묘사했다.
홍신자는 1981년 9월 뉴욕에서 ‘래핑 스톤’ 무용단을 창단했다. 모든 존재는 웃고 있을 때 행복하다는 뜻으로 ‘돌에도 정신이 있다. 모든 존재는 살아있다’는 인도에서 얻은 깨달음을 확장한 것이다. 홍신자의 무용세계를 따르는 6명의 무용단원들은 낭테르대 철학박사, 컬럼비아대 무용학 석사, 하버드대 심리학 석사 등 명문대 출신의 석·박사들로 구성되었다. ‘래핑 스톤’은 1981년 9∼10월 ‘입에서 꼬리까지’를 뉴욕의 라마마 극장에서 초연했다. 홍신자는 ‘여자의 몸은 이렇게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내걸고 8개월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좀처럼 공연평을 따내기 힘든 뉴욕타임스도 “원시의식과 어린이의 본능적 동작을 연결시킨 수작”이라고 격찬했다. 1주일에 평균 700~800편 이상의 엄청난 양이 공연되는 뉴욕에서 중요 신문의 평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인데도 홍신자는 이렇게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홍신자는 1993년 영구 귀국 후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에 터를 잡고 뉴욕의 ‘래핑 스톤’ 대신 한국인들로 구성된 ‘웃는 돌 무용단’을 창단했다. 1995년부터는 국제아방가르드 예술축제인 ‘죽산국제예술제’를 이끌며 자연과의 만남을 추구하고 있다. ‘웃는돌 무용단’은 지금도 국내를 기반으로 하여 전 세계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존 케이지>
    
1952년 8월 29일, 미국 뉴욕주 우드스탁의 메버릭 콘서트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가 무대 위에 놓인 피아노 의자에 앉고도, 피아노는 치지 않고 피아노 뚜껑을 세 차례 열고 닫기만 하다가 정확히 4분 33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 당연히 피아노 소리는 없었다. 다만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청중들의 웅성거림과 일부 관객의 짜증 섞인 목소리만이 들렸다. 피아니스트는 왜 피아노를 치지 않고 그냥 일어선 것일까?
해답은 존 케이지(1912~1992)가 작곡한 ‘4분 33초(4' 33")’라는 제목의 악보에 있었다. 3악장으로 구성된 악보에는 악장마다 ‘TACET(침묵)’라는 표시가 있었고, 악장을 구분하기 위해 33초, 2분40초, 1분20초 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으라는 지시사항만 적혀 있었다. 따라서 피아니스트는 악보에 적혀진 대로 연주를 한 것이고, 관객들은 악보의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짜증을 낸 것이다. 존 케이지는 누구이고 왜 이런 음악을 작곡한 것일까?
존 케이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퍼모나 칼리지를 중퇴하고 무작정 유럽으로 떠난 그는 1년 6개월 동안 파리와 카프리, 마드리드, 베를린,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지를 무전으로 돌아다니다가 1931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요리사 겸 정원사로 일을 하고 전문적인 음악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다가 알게 된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의 음악은 그에게 새로운 음악세계를 알려주었다. 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유럽 음악을 지배하고 있던 조성음악을 버리고 무조(無調)주의의 12음계 음악을 창시한 사람이다.
1933년 케이지는 뉴욕으로 가 작곡과 동양학, 포크뮤직을 배웠다. 학비가 없어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새벽까지 작곡 공부를 했다. 그 무렵 쇤베르크는 나치가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미국의 UCLA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케이지는 2년간 쇤베르크의 대위법과 화성법, 분석법 등을 배웠다. 쇤베르크는, 케이지가 수강료를 낼 수 없는 딱한 처지라는 사실을 알고 무료로 가르쳤다. 케이지가 평생의 동지이지 연인이 될 현대무용의 거장 머스 커닝햄(1919~2009)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오랫동안 커닝햄과 작곡가와 무용가로 공동작업을 했다. 1970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는 동성애자로 커닝햄과 함께 살았다.
케이지는 1939년부터 전통적인 범주를 벗어난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는 피아노 현 사이에 나사, 볼트, 고무, 털실 등을 끼워 음색과 음정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면서 타악기 효과까지 내는, 조작된 피아노를 개발했다. 1943년 2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 번째 뉴욕 공연을 열었다. 평론가들은 꽃병, 워낭소리, 진동자 등으로 구성된 케이지의 절충주의적 악기 조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케이지가 1952년 작곡한 ‘4분 33초’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메시지는,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할 때 나는 소리만이 음악이 아니라 우연하게 빚어지는 자연스러운 소음도 얼마든지 음악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4분 33초’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을 시험하고 도발한 것이며 그때까지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데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 일부 음악평론가들은 ‘4분 33초’가 처음 연주된 순간을 20세기 음악사에 세워진 이정표로 간주하기도 한다. “완전한 ‘무음(無音)’이란 있을 수 없다”는 케이지의 믿음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완벽한 방음시설을 갖춘 녹음실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과 머릿속 이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기묘한 ‘침묵의 소리’를 듣고부터 완전한 ‘무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 후 그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식적 행위가 없더라도 이미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들의 우연한 조합이 생성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음악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케이지는 음악을 ‘소리의 조직’으로 정의한 뒤 기존의 음악과 소음을 동일한 음악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서양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케이지는, 청중은 작곡가나 연주자에 의해 만들어진 완성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무음’의 음악을 통해 때와 장소에 맞는 환경적 음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음악관을 발판으로 케이지는 피아노의 현 사이에 너트, 볼트 등의 금속과 야채, 파이 등을 끼워 넣어 피아노의 음을 기괴한 소리로 변조시켰다. 한 항아리에서 다른 항아리로 물을 쏟아부으며 휘파람을 부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플라스틱이나 심지어 새털, 장난감, 인형 등을 활용하여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음의 자연발생 상태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는 케이지의 생각은 인간이 음을 지배하고 음을 구축함으로써 음악작품을 꾸려온 근대 유럽의 음악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케이지는 ‘4분 33초’의 후속곡으로 ‘0분 00초’를 1962년에 발표했다. ‘0분 00초’의 무대에 설치된 여러 대의 스피커에서는 비명소리, 침 삼키는 소리, 찰칵거리는 소리 등이 증폭되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케이지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르를 넘나들고 전통적 벽을 허물며 현대 예술의 모습을 바꿔간 케이지의 음악은 다른 분야의 전위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詩)에서는 알렌 긴즈버그, 비디오 아트에서는 백남준, 무용에서는 머스 커닝햄 등 다양한 전위 예술가들이 케이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전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선구자로 나섰다.

■잭슨 폴록 ‘액션 페인팅’ 정립       
   
미국의 세계적인 추상화가 잭슨 폴록(1912∼1956)이 1951년에 완성한 작품 ‘4번(Number 4·사진)’이 4040만2500달러(약 438억3700만 원)에 낙찰됐다. 11월 13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이 작품은 당초 예상 낙찰 금액인 3500만 달러를 훌쩍 넘은 가격에 팔렸다. ‘4번’은 물감을 흩뿌리는 드리핑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미술 애호가들은 폴록의 드리핑 기법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 2012년 12월 15일)
 

▲ 작업중인 잭슨 폴록

2차대전 후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문화예술에도 관심을 갖고 미국적인 가치를 갖는 미술을 뉴욕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것이 형태를 완전히 무시하고 화가의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린 ‘추상표현주의’다. 잭슨 폴록(1912~1956)과 드 쿠닝으로 대표되는 ‘추상표현주의’는 2차대전이 한창일 때 초현실주의 운동이 미국에 전파되어 새 바람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잭슨 폴록은 이 추상표현주의로 미국 미술을 유럽 미술의 예속에서 해방시키고 미국의 회화를 현대미술의 첨단으로 끌어올린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예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오고, ‘화가는 붓을 사용해야 한다’는 오랜 서구적 전통의 속박에서 기성 화가들을 해방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술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를 평정한 미술사조였다. 20세기 들어 인상주의, 야수주의, 입체주의 등이 만개했지만 그것은 유럽인들만의 유행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출발한 이 추상표현주의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을 휩쓸었고 남미와 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 놓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무대에서 공연하듯 작업을 하는 이른바 ‘액션 페인팅’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했다.

▲ 잭슨 폴록 그림 ‘Number 4’

그는 물감을 물에 타서 깡통에 부은 뒤 뿌리고 흘리고 퍼부었다. 손놀림에 따라 선과 입자는 가늘었다가 굵어지고 가까웠다가 멀어졌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떤 주관적인 자의식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그릴까, 어떻게 그릴까 하는 생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쪽이 위인지 아래인지 조차 구분이 안 되었다. 그는 “한참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작업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될 뿐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의 그림은 유럽적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스케일과 그림의 모든 부분을 고르게 채워넣는 이른바 ‘전면회화’를 특징으로 했다.
잭슨 폴록은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나 주로 애리조나주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랐다. 초기 작품은 멕시코의 벽화 화가였던 오로스코, 리베라 등의 영향을 받았다. 아메리카 원주민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토템적이고 해독할 수 없는 원시문자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1937년 알콜 의존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1938년 잠시 신경쇠약을 앓은 뒤부터 그동안 그려온 구상적인 풍경화 등에서 벗어나 반추상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후 폴록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회화의 주제였던 사물의 재현과 서사성을 제거해나갔다. 1945년 10월 결혼한 크레이스너는 평생 폴록의 뮤즈이자 후원자로 활동하며 폴록의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폴록이 회화의 기본 실재 요소인 캔버스의 평면성과 물감의 물질성에 도달하는 방법을 ‘드리핑 기법’으로 해결한 것은 1946년이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붓거나 떨어뜨리는 ‘액션 페인팅’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완숙해지고 정립된 것은 1947년으로, ‘모든 길 다섯’과 ‘매혹적인 숲’ 등이 그 해에 완성되었다. 수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어떤 대상을 그리던 서양 회화의 전통을 폭력적일 정도로 거침없이 부정한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은 일약 미술의 새 장을 열었다. 이후 캔버스는 폴록에게 더 이상 화면이 아니라 행위의 장이었다. ‘액션 페인팅’으로 폴록은 자로 잰 듯한 작품으로 시대를 풍미한 기하학적 추상에 반발해 형태를 완전히 무시하고 화가의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리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1948년 1월 5일, 뉴욕 베티 파슨스 미술관에서 개막된 전시회를 계기로 폴록은 ‘액션 페인팅’ 화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가 출품한 17점의 거대한 그림들은 일찍이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덕분에 전시회는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당혹해하고 일부 미술 애호가들은 대중을 속이려는 예술적 장난이라며 분노했다. 호평과 혹평 속에 그의 작품은 모두 팔려나갔다. 전시회 후 그는 새로운 미술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넘버1’ ‘넘버 10’을 완성한 1949년, 라이프지는 그를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 화가’로 꼽았다.
폴록이 가장 정력적으로 작품을 제작한 해는 1950년이었다. 이 해에 그는 ‘연보랏빛 안개’나 ‘가을의 리듬’, ‘하나’ 등을 제작했다.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그의 ‘그림같지 않은 그림’에 유럽인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그는 유럽에서도 유명 화가가 되었다. 유럽인들은 웬만한 정도의 추상에는 익숙해 있었으나 ‘액션 페인팅’ 같은 그림은 처음이었다. 추상표현주의는 이렇게 미국을 떠나 세계 미술계에 정식으로 신고했다. 비엔날레를 계기로 폴록은 신대륙의 미술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미술관의 주요 수장품 목록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