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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20세기 이야기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7년 01월 08일 (일) 13:39:04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 워싱턴에서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치머만 전보
치머만 전보 사건 100주년

1차대전이 발발한 후 영국이 독일에 대해 해상봉쇄를 취하면서 독일의 모든 선박은 발트해와 북해에 발이 묶였다. 독일은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U보트’로 불린 잠수함을 총동원했다. 개전 당시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U보트는 29척에 불과했으나 전과는 혁혁했다. 1914년 9월 5일 259명의 승조원과 함께 영국의 순양함 ‘패스파인더’를 침몰시키고 9월 22일 영국 순양함 3척을 연달아 격침해 2,200여 명의 승조원 중 1,459명을 수장시켰다. 당시 영국 해군 참모총장인 피셔 제독은 “넬슨 제독이 평생 전투로 희생시켰던 병사보다 더 많은 병사가 하루만에 죽었다”며 탄식했다.

독일은 U보트 공격의 잇따른 성공에 고무되어 1915년 2월 영국 근해 전체를 전쟁 지역으로 선포하고 이른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했다. 영국 국적 선박은 물론 제3국 선박도 영국으로 전쟁 물자를 수송한다고 간주해 격침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독일은 1915년 한 해에만 74만 여t의 선박을 격침시켰다. 영국의 호화여객선 ‘루시타니아호’(3만 2,000t)도 그 해에 격침되었다. 독일의 U보트는 1,959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미국 뉴욕을 출발해 영국 리버풀을 향해 가던 루시타니아호를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근해에서 2발의 어뢰를 발사해 128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민간인 1,198명을 숨지게 했다. 루시타니아호는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격분한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이 “공격을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미국도 참전하겠다”며 독일에 경고하자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우려해 1915년 9월 U보트에 의한 무차별 공격 중단을 선언하고 다시 종래 방식대로 해상 공격을 전개했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 발발 이래 연합국의 참전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쟁은 미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쟁이고 그 원인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며 참전을 거부하고 중립 정책을 견지하고 있었다. 미국만 참전하면 전쟁은 당연히 연합국에 유리했으나 윌슨은 오히려 전쟁 당사국들에게 강화조약을 맺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독립 이래 미국 대외 정책의 기본원칙이었던 고립주의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윌슨 개인의 이상주의적 경향도 작용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순수한 무역거래라는 미명 하에 연합국 측에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팔아 실리를 챙겼다. 반면 소비 식량의 20%를 수입에 의존하는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 포기 후 강화된 영국의 해상 봉쇄로 최소 75만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결국 독일은 1917년 1월 불리한 전황 타개를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전쟁 지역에서 발견되는 연합국과 중립국의 모든 선박을 경고 없이 침몰시키면 6개월 내에 영국의 항복을 끌어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설사 미국이 군대를 모집하고 훈련시켜 전장으로 투입한다 해도 이미 전쟁은 끝나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독일, U보트 공격의 잇따른 성공에 고무돼

바로 그럴 때 1차대전의 전황을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치머만 전보 사건’이 터졌다. 사건은 1917년 1월 17일, 영국의 해군정보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발신된 전보 하나를 가로채면서 불거졌다. 암호를 풀어보니 평소와 달리 독일의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 주미 독일대사 조한 폰 베른스토르프 백작,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 등의 이름이 등장해 영국 해군정보부의 암호 해독가들을 긴장시켰다. 당시 영국은 침몰한 독일 구축함과 독일 첩보요원에게서 독일의 암호책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2월 19일 모두 해독된 전보는 1월 16일 치머만 독일 외무장관이 발신한 것으로 미국 주재 독일 대사를 경유해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를 최종 수신자로 했다. 전보 내용은 이랬다. “2월 1일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미국이 계속 중립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동맹을 제의한다. 함께 전쟁 수행 및 평화 체결, 넉넉한 재정지원,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주와 뉴멕시코주, 애리조나주를 회복할 때 지원. 멕시코가 일본을 설득, 일본이 연합국에서 빠져나와 하와이를 공격하도록 유도. 세부 사항은 공사가 알아서 하라.”
즉 미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대미전(對美戰)에 가담해준다면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주의 영토를 되찾는데 독일이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경우 미국을 아메리카 대륙에 묶어두겠다는 복안이었다. 주미 독일 대사는 전보를 받고 1월 19일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에게 이 내용을 전송했다.

‘치머만 전보’, 워싱턴을 충격에 빠뜨려

전보를 해독한 영국 해군정보부의 암호 해독 담당 윌리엄 레지널드 홀 제독은 전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국이 독일의 암호를 해독했다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전보를 미국에 전달하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영국의 암호 해독을 눈치챈다면 독일은 앞으로 같은 암호를 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암호 해독을 위해 또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전보 공개는 곧 암호 해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보를 공개하지 않으면 미국의 참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고민에 빠진 홀 제독은 독단적으로 전보를 공개하지 않고 자신의 금고 속에 넣어두었다. 2월 1일 시작될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맞서 미국이 참전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때 전보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주미 독일 대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 돌입 8시간 전인 1917년 1월 31일,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전개한다”고 미국에 정식으로 통보했다. 워싱턴은 충격에 휩싸였으나 윌슨 대통령은 여전히 “어느 쪽도 승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중립을 고집했다. 이처럼 미국의 참전 의사가 분명하지 않았는데도 치머만은 만일을 위해 2월 5일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에게 “지금 멕시코 동맹을 제안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홀 제독은 이 전보도 가로챘다.
홀 제독은 윌슨이 여전히 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전보를 미국에 전달하기로 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영국은 악화하고 있는 전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독일이 암호 해독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숙제였다. 홀 제독은 주미 독일 대사가 미국에서 멕시코로 보낸 전보를 확보해 이것을 미국에 전달하면 영국이 중간에서 암호를 가로챈 사실을 독일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멕시코 내 영국 요원이 미국에서 멕시코로 보낸 전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홀 제독은 멕시코에서 가로챈 전보를 2월 19일 아서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전보는 2월 23일 영국 주재 미 대사를 거쳐 24일 워싱턴으로 보내졌다. 전보를 받아든 윌슨은 미국의 뒤통수를 때리는 이런 전보를 보내놓고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취해온 독일의 기만행위에 분노했다. 전보 내용은 3월 1일자 각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도 독일의 치머만은 미 정부가 전모를 알고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자신이 전보를 보냈음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의 1차대전 참전으로 진짜 세계대전 시작돼

모든 게 사실로 밝혀져 미국인들 가운데 4분의 3이 참전을 지지하고 있을 때 3월 18일 3척의 미국 선박이 경고 없이 독일의 U보트의 공격에 또다시 침몰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참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윌슨은 의회에 나가 “민주주의 수호와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미국의 참전이 불가피하고 이 전쟁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역설하며 참전 승인을 요청했다. 의회는 1917년 4월 6일 하원 373 대 50, 상원 82대 6의 압도적 다수로 윌슨의 대독 참전결의안을 승인했다. 이로써 미국은 1차대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바야흐로 진짜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 지상부대의 유럽전선 투입은 지연되었다. 전쟁을 선포했을 때 미 육군의 보유병력이 19만 명에 불과한 데다 신병을 선발하고 훈련시키는 데만 최소한 6개월이 걸리고 그들을 유럽으로 보내는 데도 1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6월 중순 경 180여 명의 선발대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으나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훈련만을 반복해 프랑스인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연말쯤에 가서야 17만 여명이 유럽에 파견되어 비로소 미군은 제대로 된 진용을 갖췄다. 미국은 전쟁 기간 200만 여명의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 이 가운데 5만 여명이 전사하고 20만 여명이 부상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초기 전황은 독일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 경제가 전시체제로 전환된 1918년에 이르러 전세는 역전되었고 1918년 9월 독일이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한 힌덴부르크 방어선마저 무너지면서 결국 1차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까지 독일은 975척의 U보트를 건조해 총1,482만t의 상선을 침몰시켰다.
참전은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만들었고 미국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116억 달러의 전쟁채권을 포함해 1920년 말에는 270억 달러의 해외자본을 갖게 되어 세계최대의 채권국이 되었다. 19세기 말 연평균 12억 달러였던 대외수출도 1차대전 중에는 연평균 65억 달러를 웃돌았으며 전후에도 47억 달러 이상의 활황을 유지했다. 전쟁 전 19억 달러에 못미쳤던 금 보유량도 전후 몇 년 사이에 46억 달러로 늘어나 전 세계 금보유량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바야흐로 미국의 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김중업과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
   
▲ 김중업
얕은 구릉 위 한옥 처마 형태 콘크리트 지붕으로 된 건물 두 동이 정자처럼 얹혀 있다. 콘크리트 건물인데 외씨버선 코 닮은 우리 전통의 선(線)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다. 도심 속 오아시스처럼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서울 서대문구 합동 주한 프랑스 대사관.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을 이끈 쌍두마차 김중업이 1960년 설계한, 우리 근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998년 본지가 실시한 ‘한국 50년 걸작건축물 20선’에서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 사옥과 함께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마터면 사라질 뻔했던 이 건물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고, 신관까지 곁들여 재탄생한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12월 14일 대사관 신축 계획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2016년 12월 15일> 

김중업(1922~1988)은 현대 한국 건축의 미명을 밝힌 등불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의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에서 파리미술대 출신의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1941년 12월 졸업 후에는 일본의 건축사무소에서 건축 실무를 익히다가 해방 전 귀국하고 해방 후인 1947년 3월 서울대 건축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1952년 9월에는 김말봉(소설), 오영진(극작), 윤효중(조각), 김소운(시인) 등과 함께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참석했다가 귀국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에 눌러앉았다.
1952년 10월부터 3년 6개월간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하며 인도 찬디가르의 신도시 프로젝트와 파리의 브라질관 등의 설계에 참여하고 핀란드 호반의 개인주택 ‘미르바의 집’을 설계했다. 1956년 귀국 후에는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개설하고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로 부임해 한국 현대 건축의 초석을 쌓을 준비를 했다.
1957년 그가 설계한 명보극장이 개장했을 때는 이른바 ‘한국판 마천루 사건’의 주인공으로 신문에 오르내렸다. ‘한국판 마천루 사건’이란, 미국 영화 ‘마천루’에서 건축가가 설계한 대로 건물이 지어지지 않자 화가 난 건축가가 다이너마이트로 건물을 폭파해 법정에 선다는 이야기를 빗댄 것으로 당시 김중업도 자신의 설계안대로 극장이 지어지지 않자 저작권 침해라며 극장을 상대로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1957년 4월 제1회 건축작품전람회를 열고 1958년 부산대와 서강대 본관을 설계함으로써 현대 한국 건축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 그는 1959년 봄 7명의 프랑스 건축가들과 경합을 벌여 ‘현대 한국 건축의 기점’으로 평가받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의 설계를 따냈다. 당시 앙드레 말로 문화부 장관이 김중업의 손을 들어주었고 드골 대통령은 설계 원안 그대로 지으라고 당시 주한 프랑스 대사에게 친서를 보냈다. 김중업은 1961년 완공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이 이후 자신의 작품 세계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며 강한 애착을 가졌다.

일본화된 서양 근대 건축의 마감

그의 대사관 설계는 개인적으로는 스승 르코르뷔지에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우리 건축계로는 서양 건축의 한국적 수용과 한국 전통 건축의 현대화라는 당시 한국 건축의 두 화두를 동시에 풀어냈다는 점에서 일본화된 서양 근대 건축의 마감을 의미했다. 콘크리트로 지붕 처마선을 직선과 곡선으로 처리하는 등 단아한 전체 구성과 공간 처리는 한국의 얼과 프랑스다운 우아함이 잘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중업은 대사관 설계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고 귀족 칭호(슈발리에)를 얻었다.
김중업이 1964년 설계한 구 제주대학 본관 건물은 건축가를 하나의 작가로 대접하도록 한 첫 작품이라는 평가를 들었으며 1972년 미국의 건축잡지 ‘아키텍처럴 포럼’에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제주대 본관 건물은 1995년 철거되어 우리 건축사에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이후 김중업은 부산 유엔 묘지 정문(1966년), 이탈리아 대사관저(1967년), 국내 고층빌딩의 효시로 꼽히는 삼일빌딩(1969년)과 도쿄호텔(1971년)을 설계했다.
김중업은 일처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경주박물관을 설계하던 때 장관과 전화로 얘기하다가 “이런 무식한 사람이 있나”하며 전화를 끊어 결국 다른 건축가에게로 설계가 넘어간 일이 있으며 프랑스 대사관 공사 때는 대사관 지붕이 낮다며 이미 완성된 형틀을 자신의 비용으로 뜯어내고 다시 시작해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후배와 제자들에게 하는 직설적인 표현도 거침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재주가 없을 수 있을까?”, “짓기보다는 부숴야 할 집을 그리고 있구나” 등등 김중업에게 이런 거친 말을 듣지 않은 후배나 제자는 없었다.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두 번째 건축전을 열고 그해 11월  파리로 떠나 활동하다가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드 아일랜드대(1976~1978년)의 정교수와 하버드대의 평가교수(1977~1978년)로 활동하면서 건축 일도 병행했다. 1978년 설계한 나이지리아 스포츠 호텔은 우리나라의 실패 모양을 연상시켜 화제가 되었다. 1978년 11월 귀국 후에는 한국교육개발원(1979년), 육사박물관(1982년), 88올림픽 기념 평화의문(1988년), 중소기업은행 본점(1988년) 등을 설계했다. NM

   
▲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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