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한의사

얼마 전 또래 여자들과 우연히 옛날 얘기를 나누노라니, 대부분 중산층 이하였던 60-70년대 한국인들의 삶의 궤적은 흥미를 넘어 신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국민소득 1천불’을 목표로 달려가던 시절 한국인의 삶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척박하고 고단한 것이었던가. 지금 당장 국가경제나 개인들의 가계가 불황에 봉착했다고 해도, 당시의 고난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당시의 생활상으로 옮겨가자 그 중에서도 여자들의 삶이 더 한층 변화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삶의 방식만 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의식이 크게 뒤바뀐 것이 분명했다. 과거에 한국의 여성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남자들 중심의 사회를 떠받들고 유지하는 데 헌신하는 보조적 존재로, 남자들에 의해서 뿐 아니라 여성들 스스로부터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경제를 일으킨 공장 여성들의 고난을 말할 것도 없고, 크고 작은 사무실마다 푼돈을 받는 사환, 경리 등의 이름으로 헌신하는 여자들이 있었고, 특히 ‘밥그릇 농사’라도 짓는다고 가난한 집안에서 밥숟갈 하나라도 던다는 목적으로 도시 가정에 보내지는 식모살이에는 더 많은 애환이 따랐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권 유린의 사각지대’였던 셈이지만 당시에는 인권(人權)이라는 말조차도 모른 채 여자라면 당연히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아들 하나 얻을 때까지 아기를 무한정 낳아서 딸부자가 된 집도 흔했으며, 시대가 좀 발전한 뒤에는 아들딸 가려 낳느라 불법 낙태를 불사하기도 했다. 불과 20-30년 전까지의 일이다. 그에 비하면 요즘 한국은 여성의 지위가 상전벽해라 할 만큼 높아졌다.
여성 의원, 여성 장관, 여성 대통령이라 해서 차별을 하지 않고, 기업에서도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두어서는 위법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으며, 대학이나 각종 시험에서는 이제 남성 지원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제기구 등의 시각에서는 한국의 남녀평등지수가 아직 세계 하위권이라는 통계가 종종 나온다. 기업의 임원비율, 교육비율, 정치참여비율 등에서 여전히 불평등 요소들은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긴 ‘남존여비(男尊女卑)’를 상식으로 여기던 시대에 자라난 세대들이 아직 사회의 중심에 있는데 여성의 지위가 일사천리로 높아질 수만은 없을 것이다. 상대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지금 청년층 이하 여성들이 누리는 성적 평등의 현실은 우리가 돌아보는 과거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다.
이젠 성생활 측면에서 여성 역할의 변화를 생각해 보자. 연애나 부부생활에서 여성의 주도권은 얼마나 신장되었을까.

전통적으로는 성생활에서 남녀의 역할은 일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가 먼저 또는 적극적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일은 망측하게 여겼고, 부부가 된 후에도 여자가 잠자리를 먼저 제안하면 정숙하지 못한 일로 치부되었다. 요즘에야 여자들도 적극적으로 즐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지만, 한국과 일본의 에로 영화에 보면 대개의 여자들은 섹스에서 수동적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견지하는 게 보통이다. 여성 상위냐 하위냐 하는 체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이 최대한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쾌감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라도 지닌 듯, 남성의 요구에 눈치 빠르게 순응하는 역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절정에 이르는 경우에도 한껏 본능을 발산하는 남성에 비해 여자는 겨우 이불을 움켜쥐거나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연기가 태반이었다. 남성이 여자의 몸매를 탐미적으로 관찰하는 경우에 비하면 여성이 남자의 몸을 감상하는 장면은 극히 적다. 
물론 이러한 경향도 과거와 현대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다. 과거와 현대를 비교해볼 때 영화나 소설 등 예술작품에 반영된 성생활에서의 남녀 역할 또한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성생활에서도 남자나 여자의 즐길 권리, 또 상대를 배려할 의무는 대등하다는 것을 남녀 모두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성생활은 두 사람이 그 즐거움과 책임을 공평하고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대화당한의원, 한국 밝은 성 연구소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