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 다소 진부하거나 상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어제, 오늘, 내일이 아니라 오늘, 오늘, 오늘에 급급한 당신이라면 말이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어제가 되고 있는 오늘, 오늘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라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마냥 한정 없게 느껴진다면 이 장면을 떠올리길 바란다. 윤영란의 <Time>이다.

신선영 기자 ssy@

Time

▲ 윤영란 작가.

윤영란 작가는 지금까지 총 네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명제는 모두 <Time>이었다. 그리고 모두 나무였다. 그리기 까다롭고 다루기도 어려운 수채화와 콩테로 학생시절부터 지금까지 “안 그려본 게 없다”는 작가였다. 그런데 정작 전시장만 가면 고작 나무일뿐이니 이상한 노릇이다.

그래도 첫 개인전 때는 나무가 어느 정도 숲을 이룰 정도는 됐다. 그런데 2012년 두 번째 개인전, 2014년 세 번째 개인전, 2016년 네 번째 개인전을 거치면서 한 두 그루씩 빠져지더니 지금은 덩그러니, 한 그루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는 고작이라는 표현보다 유일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다.

그래서 “왜 타임이냐”는 질문보다 “왜 나무냐”는 질문이 먼저 들어갔다. 대답은 “어느 날부턴가 나무가 그려지더라”는 거였다. “그저, 그저 나무.” 작가는 이때를 “마음을 비우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을 벗 삼아 여행을 다니면서 마음에 있는 욕심과 집착을 없애간 시간이자, 없앰으로서 마음을 보존한 값진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에 말없이 있어준 나무가 놓여 지금의 <Time>이 됐다.

시간의 집합
침묵 속에서 명상을 하듯이 윤영란 작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너른 벌판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 너르게 비상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만의 시공 세계가 보는 이로 하여금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나의 이미지로 시간이라는 명제를 끌어내기까지 쉽지 않았을 터다.

첫 번째 개인전에서는 “소나무를 정말 잘 그렸다”는 반응이 태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Time>이라는 명제를 더 드러내기 위해 색채를 바꿔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여전히 “소나무를 정말 잘 그렸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나무의 관점을 바꾸고 소재도 다양하게 해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제야 “작품 정말 좋다”, “시간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직유가 아닌 은유로써 말이다.

▲ Time, acrylic, gold, 80.5x116.5cm, 2016.

“어떻게 해야 시간이 더 드러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이 세계가 수많은 원자와 원자의 집합으로 이뤄져있다는 말이 떠올랐어요.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 큰 여백을 여백이라고 부를 수 없고, 비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예요.”

텅 빈 허공 같지만 얼마나 많은 원자와 원자들이 꾸물대는 공간이며, 얼마나 긴 세월이 억겁으로 지난 뒤에 있은 자연인가를 생각하니 생명의 순환과 자연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동으로부터 오는 태양의 어슬렁거림, 나무에 부는 다음 계절의 바람, 아득하게 놓인 별들의 발자국... 흡사 구도자적 자세로 작품에 질서를 부여해 나갔다.

▲ Time, acrylic, 90.5x116.5cm,2016.

윤영란은 색채도 작은 단위로 중첩해 나갔다. 작품의 8할을 차지하는 여백을 비운다는 느낌이 아니라 채운다는 느낌으로 일일이 칠하고 덧댔다. 한 번에 강하게 칠한다고 되는 색이 아니기 때문에 수 없이 덧대고 덧댄 색이다. 그런데 그렇게 채색을 하던 윤영란이 종래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우리는 어떤 색으로부터 왔는가.’

색채 홀로그램
‘나무는 어떤 색을 입히고, 바탕은 어떤 색으로 채워야 나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그렇게 거슬러 가다 보니 우리 선조들의 의복이 떠올랐다고 한다. 강하지만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그 색채에 영감을 받아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금분도 주저 없이 사용했다.

“제 작품을 보고 동양화 채색을 했냐고 하는데 사실은 수채화 물감과 아크릴 물감이 주에요. 수채화를 오랫동안 했어요. 하지만 서양화 하고 있다고 해서 동양적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성장하는 과정이라 색채가 아직 젊은데, 앞으로는 좀 더 농익은 색을 내려고 해요. 제 삶의 연륜이 색으로부터 배어나게요.”
 

▲ (위) Time, acrylic, gold, 26.7×65.3cm, 2016. (아래) Time, acrylic, gold, 26.7×65.3cm, 2016.

윤영란 작가가 시간이라는 명제로 그려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그럼에도 “아직 젊다”고 말한다. 마음이 때가 되어 비워졌듯이, 나이도 억지로 들일 수 없는 노릇이니 작업실에 앉아 이런 저런 것들을 시도하며 그 다음의 때를 맞고 있다.

“가족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이렇게 한 화두에 몰두하지 못했을 거예요.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아들의 권유도 힘이 됐고, 왜 그만두느냐며 말려준 큰 형님도 용기가 됐어요. 사실 저희 큰 형님이 2005년에 밥 딜런의 자서전을 옮긴 양은모 씨예요. 그런데 11년이 지난 지금 노벨상을 타면서 다시 읽히고 있잖아요. 저도 지금의 작품에 최선을 다해서 언젠가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의미로 전해지면 좋겠어요.”

▲ Time, acrylic, gold, 91x60.5cm, 2016.

윤영란 작가는 건국대학교를 졸업했다. 2010 남농미술대전 종합대상을 수상하고 2013 FACO아트페스티벌 선정작가로 선정됐다. 갤러리 이즈, 경인미술관, 대한민국예술인센터, 갤러리 루벤에서 네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열한 번의 단체전 및 초대전을 가졌다. 2014 행주미술대전, 2012 나혜석미술대전을 심사했다. 현재 남농미술대전 초대작가이자 (사)한국미술협회 회원이자, 고양어울림누리드로잉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