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손정숙 화백의 50년 화업을 정리하는 개인전 <꽃비> 展이 열렸다. 1967년 홍익대학교에 입학한 재학시절부터 현재까지 작업한 작품 중 40여점을 소개했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진 첫 번째 개인전 이후로 15년 만에 여는 두 번째 개인전이자, 국내에서 여는 첫 번째 개인전이다.

신선영 기자 ssy@

50년의 작업

▲ 손정숙 화백.

자그마치 50년이다. 지금까지 손정숙 화백은 그룹전에만 작품 몇 점을 뜨문뜨문 선보여 왔을 뿐, 지난 50년간 이렇다 할 개인전 한번 열지 않은 희귀 작가였다.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던 걸까 하면 그건 아니다. 10대 때 故 안상철 화백에게 수묵화를 배웠고, 20대 때는 故 박생광 화백에게 채색화를 배웠다. 우리 화단을 대표하는 두 대가에게 사사 받은 것만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아 일찍이 동양화에 능했다. 오히려 예술가 중에 예술가인 스승님의 생애를 귀감 삼은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손 화백은 “故 박생광 선생께서는 명망에 비해 개인전도 많이 열지 않으셨고 다작도 하지 않으셨다”고 회고하면서 “그래서인지 제자들도 대체로 활동이 외골수다. 달리 말하면, 전시회나 매스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있다”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손 화백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대만으로 유학을 갔다.

대만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타이완 고궁박물관에서 명작들을 연구했다. 넓어진 지식만큼 해석이 풍부해지고 감동이 배가 되는 이 학문에 6년을 매진했다. 그래서 손 화백이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썼던 말이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뜻으로써, 작품을 시서화각(時書畵刻)으로 두루 살펴본다는 말이다.

그만큼 손 화백의 작품 또한 시심(詩心)으로 가득하다. 그의 평생 화두인 ‘사랑, 자유, 꿈’을 주제로 50년 간 동양화를 사유해왔다. “나의 성숙도가 저절로 그림에 반영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미술사에 발을 들였고, “다작보다는 꾸준히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타이완에 있는 문화대학 실기 수업을 병행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그 열정이 작품 곳곳에 은유되어 있다.

▲ 꽃비, 61x50cm, 한지에 채색.

사랑, 자유, 꿈
손정숙 화백의 작품에는 붉은 색이 도드라진다. <꽃비>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개화의 절정에서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붉디붉은 꽃들을 지상으로 낙화시켰다. 하지만 손 화백은 꽃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그저 ‘사랑’, 그뿐이다.

“이 꽃이 뭐냐고들 묻는데 이름은 묻지 마세요. 사랑에 이름이 있나요? 이 꽃도 그냥 꽃일 뿐이에요. 색이 변하고 형태가 바뀌고 향기가 다 하고 땅에 떨어져서도 꽃이 꽃으로 불리듯이, 일찍 떨어진 꽃은 일찍 떨어진 대로 기억에 남고 오래 핀 꽃은 오래 핀대로 가슴에 남아요. 그래서 사랑이에요.”

▲ 무이네-하이, 41x32cm,한지에 아크릴 석채.

손 화백이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다. 각양각색의 꽃들을 하나하나 엮어 내림으로써 사랑에 대한 감사, 사랑에 대한 존경, 사랑에 대한 실천을 대신해 나갔다. 그리고 그 속에 꽃비를 맞는 새와 구름을 그렸다. 구름 속으로 날아가는 새를 통해 ‘자유와 꿈’을 상징했다.

손 화백은 일찍이 새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고 학생 때부터 불사조를 그렸다. 발화의 정점에 오른 불꽃의 날갯짓과 시공을 바라보는 호기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그 작품은 故 박생광 선생도 생전까지 “불사조 그린 학생”이라고 기억해 줄 정도로 단번에 매료되는 작품이다. 그랬던 새가 50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한결 포근하고 부드러워졌다. 화염 대신 물결을 타고 노닐고 그 옛날 선인들처럼 구름 속을 유유자적한다. 요철지의 따뜻한 재질감도 한몫했다.

▲ 여정, 146x98cm, 한지에 혼합채색.

“제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고생 한번 안 하고 나이 먹은 거 같다고 해요. 하지만 고생도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사랑, 자유, 꿈을 주제로 삼은 사람이 그림을 어둡게 그리면 다 같이 어두워져요. 제 그림으로 행복했다는 말을 듣는 게 제 만족이에요.”

이렇듯 이제 중견작가를 넘어서고 있는 그의 손길에는 따스함과 원숙함이 가득하다. 민화 작품에서 보여준 세밀한 필치나 복잡한 것을 다 빼고 이제는 동양화 특유의 밝은 색채와 담백함으로 자기 앞의 생을 어루만지고 있다. 손정숙만의 온기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길 기대해본다.

▲ 꿈꾸는 연인, 60x45cm, 한지에 혼합채색.

손정숙 화백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했다. 이후 국립대만대학교 역사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캐나다 토론도 온타리오 미술대학에서 아크릴과 스테인드글라스 수업을 수학했다. 12년간 영남대, 중앙대, 덕성여대, 홍익대에 출강하며 중국미술사와 미학입문을 강의했다. 숙란전(LA 한국문화원), 숙명 100주년 기념(서울갤러리), 백양회전(국립공보관), 9인전(덕수미술관), 창조회전, 대만초대전, 일본초대전, 창연민화연우회전 등 다수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캐나다 토론도와 서울 라메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역서로는 중국미술사(마이클 설리번 저), 석도화론(석도 저), 미학입문 (주광잠 저), 공자사상의 현대적 의의 예술편(장기윤 저)가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