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윤정희 결혼 40년, 윤정희 영화 데뷔 50주년, 백건우 첫 독주회 60주년
“올해는 우리 부부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결혼한 지 40년, 아내의 영화 데뷔 50주년, 내가 데뷔한 지 60주년, 그리고 제 나이 70살. 무언가 특별한 공연을 해보고 싶었어요.”(백건우),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카메라 앞에 서겠습니다. 좋은 작품, 좋은 시나리오만 있으면요.”(윤정희) 70대에 접어든 피아니스트 백건우-배우 윤정희 부부가 노년에도 예술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남편 백 씨는 음악인생 60년을 함께해온 팬들에게 보답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오는 9월 2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백건우의 선물’이 그것이다.… 윤정희 씨는 특별전을 통해 자신의 대표작을 관객에게 다시 선보인다. 오는 10월 2일까지 서울 마포구 영상자료원에서 열리는 ‘스크린,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들다’에서는 윤 씨의 데뷔작인 ‘청춘극장’(1967년)부터 최근작인 ‘시’(2010년)까지 20편을 상영한다. <문화일보 2016년 9월 23일>

백건우(1946~ )의 부모는 음악을 좋아했다. 그가 서울에서 태어날 때 아버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영어교사였고 어머니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유치원 교사였다. 백건우는 8살 때 음악적 재주를 인정받고, 10살 때인 1956년 경남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해 그해 서울에서 독주회를 펼쳤다. 12살 때는 국립교향악단과 협연했다. 백건우가 미국 드미트리 미트로폴로스 국제콩쿠르에 나갈 기회를 얻은 것은 15살 때였다. 주한 미 대사관이 주관한 국내 콩쿠르에서 한국 대표로 선발된 것을 계기로 배재중을 졸업하고 1961년 도미했다.
세계에서 몰려온 실력파들과 경합을 벌여 특별상을 차지하자 그의 재능을 인정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줄리아드 음악학교(1961년)와 줄리아드 음대(1965년)에 입학했다. 백건우는 25년 후에야 독지가의 비밀을 알았다. 당시 콩쿠르에서 그가 연습하는 모습을 우연히 지켜본 세계적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콩쿠르 주최 측에 “저 아이를 꼭 도와주라”고 부탁한 것이다. 백건우는 1965년 런던의 나움버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69년에는 세계적인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에서 금상을 수상하고, 미국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이처럼 각종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26살이던 1972년이었다. 뉴욕에서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을 연주해 유명해지자 뉴욕 카네기홀에서 뉴욕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등 저명 연주자와의 협연이 잦아진 것이다. 그러나 백건우는 아직 음악 공부가 덜 되었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보다는 더욱 음악에 몰두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백건우가 미국에서 활약할 무렵, 전남 광주 태생의 윤정희(1944~ )가 1966년 1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청춘극장’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1967년 1월 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된 ‘청춘극장’은 2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상대역은 신성일이었다. 윤정희는 이후 신성일과만 99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었다.
윤정희는 1960~70년대 문희, 남정임과 더불어 국내 영화계의 1세대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데뷔 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28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 ‘은막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2016년 현재까지 모두 330여 편에 출연해 325편에서 주연을 맡았고, 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우주연상만 25번 받았다.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5편이 한꺼번에 같은 날 개봉한 적도 있었다.
윤정희는 학구파였다. 우석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한국 최초의 석사 여배우’ 타이틀을 얻었다. 학창시절 음악을 즐겨 듣고 틈날 때마다 책을 끼고 지내던 문학소녀 답게 영화 촬영 중에도 틈나면 ‘사상계’나 ‘문학사상’ 같은 책을 읽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 차에 들어가서 바흐나 슈베르트 음악을 들었다.

결혼 후 삶,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

▲ 백건우·윤정희 부부

이처럼 윤정희가 국내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던 1972년 뮌헨 올림픽 문화축제 때 한국 영화 ‘효녀 심청’이 상영되었다. 주연배우인 윤정희는 신상옥 감독과 함께 독일 뮌헨에 갔다. 그런데 뮌헨에서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의 세계 초연도 준비되고 있었다. 백건우도 윤이상의 초대를 받아 오페라 ‘심청’을 보러 뮌헨으로 갔다. 결국 ‘심청’이 중매쟁이로 끼어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둘은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르고 있었다. 15살부터 뉴욕에서 살았던 백건우는 한국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고 은막 스타 윤정희 역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백건우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짧은 만남 후 몇 번의 편지가 오가던 중 백건우가 1974년 파리에 정착했다. 윤정희도 같은 해 인기와 명성을 뒤로 한 채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파리 유학을 감행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1976년 3월 14일 파리에 있는 재불 화가 이응로 화백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화백이 주례로 선 결혼식은 조촐했다. 신랑과 신부는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을 입었고 신부는 화장을 직접 했다. 예물은 백금반지 한 쌍이 전부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결혼 1년 4개월 만인 1977년 7월 30일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인경이 주도한 납치 미수 사건에 휘말렸다가 가까스로 납북의 고비를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납치될 뻔했다가 탈출한 상황은 극적이었다. 1977년 7월 초, 프랑스에서 연주 활동을 하던 백건우는 박인경으로부터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한 부호가 자신의 집에서 당신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았다. 박인경은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이응로 화백의 두 번째 아내로, 1967년 이응로와 함께 동백림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이다.
백건우는 이응로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려 박인경과도 가까웠다. 며칠 후 백건우는 박인경으로부터 부호가 보냈다는 초청장을 건네받았다. 백건우는 윤정희와 5개월된 딸, 그리고 박인경과 함께 1977년 7월 29일 스위스 취리히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취리히 공항에는 부호의 여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부호의 양친이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 있어 연주지를 변경해야 한다”며 취리히~자그레브 간 왕복 항공권을 건네주었다.
백건우·윤정희 부부는 유고가 공산국가라 내심 찜찜했으나 기왕에 약속된 것이라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백건우·윤정희와 박인경이 찾아간 곳은 한적한 시골에 있는 3층집이었다. 마당에 사람이 없고 연주회를 초대한 집 치고는 너무나 조용해 이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택시 운전사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1층과 2층을 둘러보았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3층에서 한 동양인 남자가 내려왔고 백건우는 깜짝 놀라 대기시킨 택시에 올라탔다. 동양인이 “웨이트, 웨이트” 하며 다가왔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백건우는 택시 문을 잠그고 운전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가 달라고 요청했다. 오후 6시 10분경 자그레브 주재 미국 영사관에 도착한 백건우 일행은 영사관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투숙했다.
백건우 일행이 영사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그레브 공항을 벗어나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 것은 7월 30일 정오쯤이었다. 백건우가 이 사실을 파리 주재 한국대사관에 알리고 대사관이 박인경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하자 박인경은 “한국 정부가 제2의 동백림 사건으로 조작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대사관의 출두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백건우·윤정희는 지금까지 박인경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고, 박인경은 여전히 자신의 연루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사건의 실체는 더 이상 파악되지 않은 채 별 진전 없이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중 1996년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서울에서 펴낸 자신의 책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 사건의 전말을 공개해 베일에 가렸던 사건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한영은 1982년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1997년 자신의 집 앞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한영은 책에서 “사건을 총지휘한 인물은 이정룡 연락부 부부장이다. 유고의 자그레브 경찰국장을 3만 달러를 주고 포섭한 뒤 별장 하나를 빌려 외곽은 자그레브 경찰이 지키고, 별장 안에는 공작원들이 숨어 있었다. 공작원 할머니가 집에 들어와 ‘왔어요’라고 말하면 벽장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튀어나가 납치하기로 했는데 할머니가 ‘다들 어디 갔나’며 말을 잘못 하는 바람에 공작원들이 튀어나올 기회를 놓치고 허묵이라는 연락부 과장만 튀어나온 것”이라고 했다. 책에서 말하는 ‘공작원 할머니’가 박인경이다.

그야말로 실과 바늘이요 암수 한 쌍

백건우가 다시 국내외 음악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백건우는 프랑스의 3대 음반상 가운데 하나인 디아파종 금상을 1992년과 1993년 연속 수상하고 1993년 ‘누벨 아카데미 뒤 디스크’에 선정되는 등 유럽의 권위 있는 음반상을 휩쓸었다. 1993년에는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가 선정한 2장의 ‘92 최우수 연주 CD’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다. 1998년에는 세계 5대 메이저 음반사 중 하나인 BMG의 출반 제의를 받았고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 예술문화가상 훈장을 받았다. 백건우는 40대 후반 블랙홀처럼 베토벤의 음악에 빠져들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국내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 연주라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연주는 10장의 CD에 녹음되었다.
윤정희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 지 14년만인 1987년 파리 3대학(소르본대)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 ‘물레야 물레야’를 바탕으로 한 한국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연구 테마였다. 학위가 늦어진 것은 딸을 낳아 기르고, 좋은 시나리오가 있으면 중간중간 국내로 들어와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윤정희는 결혼 후에도 20여 편의 영화를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찍었다.
그녀는 한때 빛나던 아름다움이 세월의 더께에 가려 버린 여느 배우들과는 달랐다. 50살이던 1994년 ‘만무방’에 출연해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2010년에는 66살의 나이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주연을 맡아 16년 만에 다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2010년 이집트 카이로 국제영화제에서 리처드 기어와 함께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2011년엔 영화 ‘시’로 LA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과 프랑스 문화예술훈장을 받았다.
결혼 후 윤정희·백건우 부부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살림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부부 손으로 한다. 가정부도 쓰지 않고 자동차나 식기세척기도 없다. 윤정희는 파리 정착 후 미용실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자신을 꾸미는데 돈과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워서다. 무엇보다 부부는 늘 함께 있다. 부부 소유의 휴대폰이 한 대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윤정희는 영화 촬영 시간을 빼면 백건우가 연습할 때 옆에서 지켜보고 연주회를 위해 전 세계를 따라다니며 그를 챙긴다. 부부 모두 사치를 피곤해하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을 즐긴다. 그야말로 실과 바늘이요 암수 한 쌍이다.

■라인홀트 메스너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
‘산악계의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72)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는다. 9월 30일 개막해 10월 4일까지 울산광역시 울주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일대에서 열리는 제1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가 그를 초청했다.… 이탈리아 출신인 메스너는 1978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를 산소 없이 등정했다. 1986년 로체(8516m)까지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모두 산소 없이 완등하며 신화적인 산악인이 됐다. 고향인 알프스 자락 볼차노에는 6개 박물관으로 구성된 ‘메스너 마운틴 뮤지엄(MMM)’이 있다. 그는 박물관장이자 산악 전문 작가 등으로 인생 2막을 살고 있다.<조선일보 2016년 9월 27일>

8000m의 고도는 신의 영역이라고 한다. 그곳은 인간의 침입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인간이 활개치지 못하도록 적대적인 환경들로 가득찬 절대 고독의 공간이다. 히말라야에는 14곳의 8000m봉이 있다. 정확히는 14곳이 넘지만 14곳을 제외한 나머지는 독립봉에 딸린 위성봉으로 취급받는다.
14곳의 독립봉 전부를 인류 최초로 완등한 이가 있다. 산악인들에게 ‘세기의 철인’으로 불리는 라인홀트 메스너(1944~ )가 완등의 주인공이다. 그는 오스트리아계 이탈리아인으로 알프스 산록에서 태어나 1970년부터 1986년까지 세계 산악인 가운데 처음으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해 ‘살아 있는 전설’이 되었다. 
‘현대판 오디세이’에 비유되는 8000m급 레이스의 첫 목표는 이미 31명의 목숨을 앗아가 ‘마의 산’으로 불리던 낭가파르바트(8125m)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는 루팔벽이 메스너의 등정 루트였다. 루팔벽은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남미의 아콩카과 남벽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오르기 힘든 3대 설벽 중 하나로, 메스너의 등정 후 한국의 원정대가 2005년 재등에 성공할 때까지 35년 동안 재등을 허용하지 않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메스너가 동생 귄터와 함께 독일 원정대에 참가한 것은 1970년 5월이었다. 하지만 메스너는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한 원정대장의 지휘에 반발, 동생과 함께 독자 등반을 시도했다. 다행히 형제는 낭가파르바트 정상을 밟았다. 그러나 반대편 디아미르 루트를 통해 하산하던 중 날이 어두워져 8000m 고지대에서 비바크(텐트 없이 한데서 노숙)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음날 동생은 산소 부족으로 고산병에 걸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메스너는 동생을 부축하며 하산했다. 그러던 중 메스너가 잠깐 길을 살피러 간 사이 동생은 눈사태를 만나 사라졌다. 메스너는 동생을 찾아 사흘이나 눈 속을 헤맸지만 결국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홀로 하산하다가 원주민을 만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메스너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 6개를 잃었으나 사람들로부터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래도 메스너는 다시 기력을 회복해 1972년 마나슬루(8156m), 1975년 히든피크(가셔브룸1봉·8068m) 등정에 성공, 14좌 완등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세계 최초로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에 올라

▲ 라인홀트 메스너

메스너가 낭가파르바트에 오를 당시의 일반적인 등정법은 극지법이었다. 수십톤이나 되는 짐을 포터 수백 명이 몇 달간 날라서 한 단계씩 캠프를 전진시킨 뒤, 마지막까지 힘을 비축한 공격조가 정상에 오르는 물량작전이었다. 메스너는 극지법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히말라야 고봉 등반에서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는 종래의 방식을 벗어나 한 두 명이 장비를 직접 지고 올라가는 알파인 스타일을 개척했다. 이 방식은 1975년 히든피크 등정 때부터 사용되었다.
메스너는 파트너와 둘이서 최소한의 짐을 지고 표고 차 1000m 이상을 하루 만에 왕복하는 집중력으로 단숨에 히든피크에 올랐다가 내려왔다. 메스너가 알파인 스타일로 히든피크 북서벽 코스를 등정한 1975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도 가장 오르기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남벽으로 올라 8000m봉 벽등반 시대를 열었다.
보닝턴이 정상에 오르는 것보다 어떤 루트로 어떻게 올라갔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등로주의’를 고집했다면, 메스너는 모든 외부의 도움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오르는 ‘포기(抛棄) 알피니즘’을 추구했다. 산소통, 셰르파, 지원부대 따위의 모든 장비와 안전대책을 포기하고 두 팔과 두 다리만으로 등산의 참 기술과 살아남는 기쁨을 누리겠다는 것이 그의 등산철학이었다.
메스너는 1978년 세계 최초로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에 오름으로써 8000m 이상에서는 반드시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뜨렸다. 1980년엔 역시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단독 등반에 성공했다. 이런 메스너를 가리켜 독일의 ‘슈피겔’지는 “그는 기술 발달을 멈추게 했다. 그것은 인간을 한층 진화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보도했다. 영국의 한 언론은 “처음 (인간의 힘만으로) 인간이 에베레스트에 올라갔다”고 했다.
메스너의 고봉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다울라기리1(1977년·8172m), 안나푸르나(1977년·8091m), 에베레스트(1978년·8848m), K2(1979년·8611m), 칸첸중가(1982년·8598m), 브로드피크(1982년·8047m), 가셔브룸2봉, (1982년·8035m) 등 모두 12개 봉을 등정함으로써 마침내 14좌 완등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 제4위, 제5위봉인 로체(8516m)와 마칼루(8485m)는 좀처럼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 년 동안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런 고비를 겪은 뒤 1986년 마칼루(9.27)와 로체(10.16)마저 등정하는 데 성공,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고봉에 오른 영예의 주인공이 되었다.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어 자신의 산악 경험을 40여 권의 저서에 남겼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세 번이나 산악문학상을 받았다.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100주년
1912년 어느날, 마거릿 생어(1879~1966)가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뉴욕 빈민 거주지역의 한 병원으로 26세의 젊은 여성이 실려왔다. 무리하게 유산을 시도하다 몸에 이상이 생겨 급하게 병원을 찾은 새디 작스라는 유대인 여성이었다. 2주일 뒤 병세가 호전된 여성은 다시 임신되는 것이 두려워 의사에게 “믿을만한 피임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의사는 “임신하면 안된다”고만 할 뿐 피임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피임’이나 ‘산아제한’이 신을 거역하는 죄악으로 인식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의사라고 해도 딱히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생어는 3개월 뒤, 새디 작스의 남편으로부터 다시 아내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의사와 함께 달려갔으나 부인은 이들이 도착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피임 실패로 인한 유산 시도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당시는 산아제한이나 피임이 음란죄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불법으로 낙태를 하는 의사에게 갔고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여성들이 속출했다. 생어는 피임법을 알지 못하고 죽은 새디 작스의 모습에서 11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48세로 죽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려서 어머니에 대한 생어의 기억은 늘 임신 중이거나 아이를 돌보는 모습 뿐이었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이로 인한 산모의 죽음, 살았더라도 계속되는 빈곤과 질병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가난한 어머니들의 초상이었다.

▲ 마거릿 생어

생어는 미국의 뉴욕주 코닝에서 태어나 뉴욕시에 있는 간호학교를 졸업했다. 결혼 후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사회주의자 유진 뎁스, 여권 옹호론자 에마 골드만, 노동운동가 빌 헤이우드,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기자 존 리드, 역사가 윌 듀랜트 등 진보주의적 지식인 그룹과 어울리며 진보적 사고를 견지했다. 1909년 클라크대학에서 있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강연을 듣고부터는 여성이 기독교적, 민주주의적, 금욕적 이상에 의해 지나치게 억압받고 있다는 인식을 구체화했다.
생어는 1914년 3월 미국 산아제한운동의 신호탄이라 할 8페이지짜리 뉴스레터 ‘여성 반란’을 발행하고 팸플릿 ‘가족계획’을 준비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스스로 행동하고 스스로 억제할 권리, 즉 생명을 생성시키거나 그 생성을 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어의 그 유명한 주장이 실린 것도 ‘여성 반란’이었다. “육체적·정신적·재정적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이들을 낳으면 안된다”는 생어의 주장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뒤집으려는 생어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여성은 자기 자신이 육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1914년 7월 미 우정국이 외설금지법인 ‘컴스톡법’을 근거로, ‘여성 반란’의 우편발송을 금지하고 그해 8월 생어를 음란출판물 발행·배포 혐의로 기소하면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1873년에 제정된 ‘컴스톡법’은 음란물이 공공우편을 통해 발송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으로, 피임과 낙태에 대한 내용도 음란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죄가 확정되면 최대 45년 동안 옥살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생어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피신했다.
생어는 영국에서 산아제한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맬서스 리그’ 의 동조자들과 연대 가능성을 모색했으나 ‘맬서스 리그’의 회원 대부분이 상류층이고 이 때문에 산아제한에 관한 정보가 상류층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것을 알고는 정작 이런 정보를 필요로 하는 대중에게 보급되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연대를 포기했다. 그러던중 남편이 ‘여성 반란’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와 지식이 담긴 ‘가족 계획’을 배포하다가 체포되자 생어는 감옥행을 각오하고 1915년 10월 미국으로 돌아왔다. 1개월만에 딸이 폐렴으로 숨지는 개인적인 아픔을 겪으면서도 생어는 스스로 변호하고 자신의 대의를 선전했다. 그러자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연방정부는 1916년 생어에 대해 기소를 취하해야 했다. 그렇다고 그 정도에서 만족할 생어가 아니었다.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100여 차례 이상의 순회강연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전파했다.
1916년 10월 16일에는 빈민가였던 뉴욕 브루클린의 브라운스빌에 미 최초의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었다. 클리닉은 9일 동안 464명의 가난한 기혼여성들이 다녀갈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으나 개소 10일째 되는 날 경찰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고 생어는 30일 동안 구류를 살았다. 그런 가운데 1918년 뉴욕주 법원이 “성예방과 치료를 위해 여성에게 피임기구를 제공할 권한을 의사에게 준다”고 판결하면서 피임이 합법화되었다. 이 판결이 있은 후 그동안 생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의사들이 생어의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주관하는 산아제한 임상연구소와 의료시술상담소들이 대도시 곳곳에 개설되는 가운데 1921년 생어는 ‘미국산아제한연맹’을 결성, 의사들에게 무제한 피임처방권을 부여하는 ‘의사법’ 제정을 위해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였다. 1923년에는 여성 의료진과 직원으로 구성된 첫 번째 합법적인 산아제한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생어의 끈질긴 노력은 1936년 “환자의 생명을 구할 목적으로 의사들이 피임약을 처방할 수 있다”는 연방법원의 판결, 1937년 컴스톡법의 무효화, 여기에 “의과대에서 피임에 관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미 의학협회의 결의까지 곳곳에서 결실을 맺었다. 1939년 마침내 미 연방의회를 통과한 ‘의사법’은 생어가 걸어온 대장정의 클라이막스였다. 생어의 다음 목표는 여성들이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여성 스스로 임신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경구 피임약의 개발이었다. 1960년 5월 미 FDA(식품의약국)로부터 승인을 받은 경구 피임약 ‘에노비드’는 생어의 또 다른 노력의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