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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립운동가 _ 인산(仁山) 김일훈 선생
독립운동과 인술(仁術)을 병행했던 신 지식인, 살아생전 ‘불세출의 신의(神醫)’로 불린 한국의 대표적 명의,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체의학 제시
2009년 03월 12일 (목) 12:04:42 김재열 ssgt21@naver.com

   
▲ 인산(仁山) 김일훈 선생
인산 김일훈 선생은 온갖 질병으로 죽음 앞에서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찾아오던 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던 만병의 통치자였다. 약 30년 전, 인산 선생의 도움으로 죽음 직전에서 되살아났던 K씨는 병이 낫자 서울 동자동에 K 한방병원을 설립하고 인산 선생을 고문으로 모셨다. 선생은 이 병원에서 고문 역할을 맡아 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들을 구제하면서 가난한 환자들 위주로 값싼 처방만을 쓰게 했다. 이로 인해 병원경영진의 압박이 들어오자 선생은 그 요구를 한마디로 일축하고 바로 병원을 떠났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뛰어난 의술을 돈과 바꾸었던 적이 없었다. 의술은 파는 것이 아닌 베푸는 것이라 생각했던 인산 선생은 목수일과 토목 일을 병행하면서 생계를 꾸려갔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던 불우한 삶을 달게 여기며 살았다.

자연적인 깨달음으로 얻은 직관적 의술
인산 선생은 1909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연홍리 산중마을의 유의(儒醫) 집안에서 아버지 김 경삼(金慶參)과 어머니 강릉 유(劉)씨 사이에서 7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예부터 연흥 마을에는 ‘병고에 신음하는 세상을 구원해 줄 성자(聖者)가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인산 선생의 어머니는 꿈에 구름 속에서 신룡이 품 안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을 본 후 곧바로 인산 선생을 잉태했고, 같은 날 할아버지 김면섭은 꿈에 구름 속에서 봉황이 날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잉태 과정부터 범상치 않았기에 인산 김일훈 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주변에서 신동(神童) 소리를 들을 만큼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말과 글에 눈이 뜨이고부터 인간과 우주의 제 현상을 비롯, 인신의 조직체계와 질병의 유무 등에 대한 예지능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가족들은 일제치하에서 그의 이러한 재능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까봐 재주가 드러나는 것을 엄중 단속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의 재주는 집안에서 썩히기 매우 아까운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병이 나자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8세 때는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를 달여 먹이도록 할아버지에게 제안하여 목숨을 구했고, 동네의 같은 또래 아이가 부족증(폐암의 일종)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되자 그 아이에게 벌집을 건들게 한 후 수백 마리의 벌에게 쏘이게 하는 방법을 이용해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고 다른 부족증 환자에게는 까치독사 한 마리를 잡아다가 엄지손가락을 물게 하는 방법을 써서 부작용 없이 완치시키기도 했다. 또한 9세 때에는 할아버지가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고 구워서 그것을 이용해 양치질도 하고 눈도 씻고 약이 된다며 그대로 삼키기도 하는 것을 보고 인산 선생은 아홉 번 반복해서 구워야 하고 또 아홉 번째 구울 때에는 송진, 관솔 등으로 화력(火力)을 돋워 소금을 용해시켜야만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설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죽염’의 효시(嚆矢)가 되었고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던 약소금의 제조 방법은 이 일로 인해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당시까지 전해지던 약소금 제조 방법은 장작불에 한두 번 구워서 사용하거나 겻불에 구워 썼는데 그렇게 해서 쓸 경우, 고치기 어려운 병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역한 냄새까지 나곤 했다. 하지만 인산 선생은 우주의 원리에 따른 지혜로운 약소금 제조 방법을 그 어린 나이에 제시했고 그러한 방법은 소금 속 독극물의 완벽한 제거와 천상 태백성(太白星)의 신철분(辛鐵粉), 대나무, 소나무, 황토 중의 묘약 합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릴 적 직관(直觀)으로 얻어진 의술은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특히 자연적인 깨달음이었기에 의술을 진행하는 데 있어 전혀 부작용이 있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과 의술을 병행했던 청년 시절
인산 선생은 어린 시절 홍원의 형제들과 헤어져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생활했다. 16세 때 친구들과 함께 길을 가던 중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도착,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인산 선생은 모화산 부대 대원으로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고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막노동으로 연명했고 때로는 산 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으로 양식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자신만의 독특한 의술로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고 18세 때는 묘향산 기슭에서 완성한 죽염으로 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도피생활은 기나긴 고통의 나날이기도했지만 환자들을 구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선생은 결국 붙잡혀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고 춘천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복역 도중 탈출한 선생은 묘향산에 주로 칩거하면서 독립운동을 도왔다. 특히 1942년, 김 두운, 문 창수 등의 주도 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한 인산 선생은 이듬해 일본경찰의 예비검속으로 주동인물이 모두 체포되자 또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설령암, 강선암 등에서 은거하게 되었다. 인산선생은 항상 남루한 차림을 하였고 심지어 한 겨울에도 방에 불을 때지 않고 자는 날이 많았으며 독립운동 시절 함께 고문을 당하고 일제의 총에 맞아 죽은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라 평생 방바닥에 요를 깔지 않고 잠을 잤다는 것이 자손들의 전언(傳言)이다.


독립운동 동지들로부터 인산(仁山)이라는 아호 받아
   

광복 후 서울에 돌아온 선생에게 인술을 이용한 활인구세의 행적이 인정되고 독립지사 문빈 선생과 임시정부 독립 신문사장 김승학, 평북의 거유 김 두운 선생 등이 그에게 인산(仁山)이라는 아호를 붙여주게 된다. 광복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의학과 양의학의 장점을 살린 의과대학 및 종합병원 설립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그 길로 계룡산에 들어가 칩거하며 세속과의 인연을 끊었다. 계룡산과 지리산을 오가며 인산 선생은 오핵단, 죽염 등 암약실험을 하면서 그의 신비한 의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4.19의거가 있었던 1960년, 그의 사랑하는 아내 장영옥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내 장영옥은 인산 선생의 뜻을 깊이 받들던 여인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 장파열로 고생하고 있을 때, 인산 선생이 황급히 치료를 하려 하자, 이런 세상에 무슨 애착이 있겠느냐고 하면서 치료를 거절했고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말년까지 자신의 의술을 세상에 펼쳤던 명의로서의 인생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로 주거지를 옮긴 인산 선생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술을 세상 사람들에게 펼치기 시작했고, 1974년 경남 함양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수많은 환자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제했다. 특히 소경이었던 할머니의 눈을 뜨게 한 것, 모 기업 회장 아들이 음독으로 죽어가게 되자 중완쑥뜸으로 그의 아들을 살린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선생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던 K씨의 청을 받고 서울동자동 K 한방병원의 고문을 맡아 그 곳에서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했다. 1980년, 선생 자신의 외론을 담은 최초의 저서 ‘우주와 신약(神藥)’을 출간하게 된다. 이듬해 한문 투로 된 ‘우주와 신약’을 한글화해 ‘구세신방’으로 재발간한 인산 선생은 그해 겨울 다시 경남 함양으로 낙향하게 된다. 이때부터 모 신문사에서 편집업무를 맡아 일하던 선생의 차남(김 윤세)에 의해 아버지 인산의 독특한 의술과 경험의방들이 집대성되고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인산은 “당신의 지혜를 일반인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세상에 널리 펴겠다”는 차남 김 윤세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지혜와 경험의방을 구술하기 시작하였다. 인산의 구술을 차남이 받아 적고 다듬으면 인산이 다시 감수하는 작업을 5년여 한 끝에 1986년 6월15일, 한 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바로 인산의 의학과 사상이 집대성된 ‘신약(神藥)’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암을 비롯한 난치병과 각종 괴질에 대한 일생의 경험 의방을 모은 대 저술로서 지금까지 5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신약(神藥)’ 출간에 따른 ‘인산의학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게 된다. 강연 활동은 1992년 5월, 선화(仙化)할 때까지 매달 한차씩 열려 총 32회를 기록하고 이후 차남 김 윤세(전주대학교 대체의학대학 객원교수) 인산가 대표에 의해 지금까지 ‘인산의학’의 본산(本山)인 경남 함양 죽림리 삼봉산(三峰山) 기슭의 인산연수원에서 매달 1회 이상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참 의료’의 자각(自覺)과 활용을 당부
1987년 8월 27일, 차남 김 윤세에 의해 ‘신약(神藥)’ 책에서 제시한 죽염 등의 물질을 산업화하여 생산하는 기업(오늘의 주식회사 인산가)이 설립되고 훗날 건강문제연구시민모임으로 개칭한 민속신약연구회가 발족되어 인산선생은 이 모임의 종신회장으로 추대된다. 1989년 7월, 건강도서 및 잡지 등의 출간을 목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 광제원 김 윤세 대표에 의해 ‘인산의학’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월간 ‘민의약’이 창간되고 이 잡지는 매달 2만부 이상 발행되며 몇 번의 제호 변경을 거쳐 지금의 월간 ‘仁山의학’으로 정착되었다.
인산 선생은 말년에 자신이 체득한 의술의 비밀을 꼭 전하고 가야 한다는 염원으로 전국을 돌며 삼십여 차례의 공개 강연회를 가졌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난치, 불치병 환자들이 모여들어 인산 선생으로부터 처방을 받고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특히 병을 고친 이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었지만 인산 선생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처방만 해주었다고전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각지에서 행했던, 참의료의 자각(自覺)과 활용을 당부하는 인산의학 강연 내용을 묶어 ‘신약본초’라는 책으로 출간할 것을 지시한 인산 선생은 이 책의 표지가 완성되던 1992년 5월 19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인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롭게 쓸 목적으로 개발한 화공약독과 각종 생활용품, 편리하기 이를 데 없는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이 도리어 인류의 건강을 해치는 적으로 탈바꿈한 오늘날, 이들에 의해 빚어지는 암, 난치병 등의 제 문제들을 다스리는 명쾌한 의방(醫方)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인산 김일훈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며 남기신 유언 중 '인업(人業)을 중시함이 부국(富國)의 지름길'이라는 요지의 말씀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충정,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효(孝)의 가르침으로서 오늘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할 수 있겠다.
선생은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가 남긴 불멸의 저서를 탐독하고 그것을 ‘참 의료의 이정표’이자 ‘심신(心身)건강의 지침’으로 삼으며 따르고 있다. 인산선생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선생의 지혜와 경험이 담긴 독특한 의방(醫方)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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