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로 작품에는 빛이 가득하다. 잔물결이 일렁이는 수면 위의 푸른 물빛, 티 없이 맑은 하늘의 쾌청한 낮 빛, 금속 표면에 맺힌 매끄러운 반사 빛까지... 특유의 치밀하고 세밀한 필치로 극적인 빛의 세계를 잡아내고 있다.

신선영 기자 ssy@

사실 미학

▲ 이형로 작가.

이형로 작가가 그린 빛이 특별한 이유는 빛의 개입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데 있다. 대개 작가들이 자신의 취향과 해석에 따라 작가적 번안을 거치는 반면, 그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로 빛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섣부른 기교나 각색이 오히려 대상이 갖고 있는 고유미를 깨트릴 수 있다. 그래서 대상이 가진 고유 형태와 색채를 살리는 데 충실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을 분명하게 적시해서 사실화가 주는 완결성과 아름다움으로 이상향에 다가서고자 했다”고 그의 미학 세계를 설명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고성능 카메라로 찍은 듯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갖기 참 어려운 세상이다. 매일 사건 사고가 터지고,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무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작가는

“김승옥 작가가 소설 「무진기행」을 통해 ‘세상은 아름답게 보려는 눈이 있을 때 아름다워진다’고 말했듯이, 나 역시 아름다움에 대한 시각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경우는 그게 빛으로 나타났고 사실화로 구현됐다”고 작품 내용을 설명했다.

무채색 붓질
이형로 작가가 빛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금속 식기류에서부터다. “차가운 금속이 빛 아래서 차가움을 넘어서는 모습에 흥미를 느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오직 그 빛이 걸어오는 말로 얘기하고 싶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엄밀히 말하자면 ‘빛의 정물’이다. 은빛을 발하는 금속 면의 매끄러운 광택 표현, 사물의 굴곡에 따라 뭉개지고 일그러지는 왜곡된 표현, 서로를 반사하고 다시 재 반사하면서 나타나는 착시 표현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이형로만의 사실화를 완성했다.

▲ Classic Shine (정물 1402), Oil on canvas.

무채색도 작품을 더욱 극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색채가 결여된 무채색이 오히려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기품을 자아내면서 관객을 작품으로 끌어들였다. 이 정물 시리즈는 2016년 6월,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첫 선을 보이며 그의 작품세계를 공고히 하는 발판이 됐다.

사실 이형로가 무채색을 주조로 사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을 적록색약이라고 밝히는 그는 “색채에 대한 핸디캡 때문에 색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늘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무난한 중간색조 내지 흰색을 많이 섞어 혼탁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빨간색과 초록색에 감각이 둔한 대신, 시각적 제약이 만든 모호함이 오히려 그만의 독특함으로 어필됐고 도리어 그의 작품을 독창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좌) For tea time (정물 1507), Oil on canvas. (우) Still life 1604 with tableware (정물 1604), Oil on canvas.

빛, 삶
오랜 시간 무채색 회화를 그려온 작가는 최근 풍경화를 통해 색채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 “빛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물감으로 계속 시도하면서 점차 색감이 나아졌고 원색을 두려워하던 마음도 극복됐다”는 작가는 “이제 빛의 영역을 정물에서 풍경으로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기존에 정물화에서 가지고 있던 섬세함과 엄격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한결 자유롭고 넉넉해진 풍경화를 선보이고 있다.

주요 작품인 <View of rear garden(후원이 보이는 거실)>에서는 실내로 들어오는 햇살이 창문에 걸리고, 벽에 걸리고, 가구에 걸리면서 만드는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해냈고, <Access square in Ronda Bullring(론다 투우장의 작은 광장)>에서는 구름 한 점 없이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햇살이 보도블록에 작열하는 모습을 그대로 연출해 냈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순도 높은 빛의 강도만큼이나 청신한 느낌이 난다.

▲ Access square in Ronda Bullring (론다 투우장의 작은 광장), Oil on canvas.

작가는 “자연이 정적이고 평온해 보여도 사실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물결도 끊임없이 일렁인다. 반짝이는 빛 역시 잡을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런 자연이 캔버스에 들어오면 정물이 돼버린다. 그래서 캔버스 안에서도 살아있듯 숨결을 불어 넣는 일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작가로서 겪고 있는 고민을 털어 놓았다.

하지만 한 치의 오차나 흠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그의 집요함은 “그 누구도 이데아의 미를 완벽하게 잡아낼 수 없지만, 그렇다고 캔버스 위에 재현해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작가적 사고에서 계속 도전될 것이다. 앞으로는 유리창이라는 소재를 적극 활용해서 빛의 영역에 도달하고자 한다. 단순히 재현을 넘어 실체로 다가서려는 그의 예술가적 고집이 계속 이어져서 사실화에 대한 가치평가를 높이는 작품으로 주목받길 기대해 본다. NM

▲ View of rear garden (후원이 보이는 거실), Oil on canv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