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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불어 닥친 미국發 한국 금융위기
금리정책으로 맞서기 어려운 난국 봉착
2011년 09월 01일 (목) 13:11:35 장정미 기자 haiyap@newsmaker.or.kr

미국의 더블딥(경기회복 후 재침체) 징후와 신용등급 강등, 유럽 재정위기로 제2의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과거 금융위기 때마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았던 외채문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의 총 대외채무는 6월 말 현재 3963억 달러로 1년 전의 3515억 달러보다 13%(448억 달러) 늘었다. 정부는 7월 말 집계가 끝나면 총외채 규모가 400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미국 신용등급 하락 후 코스피 지수는 한 때 1600원 대까지 급락했다

한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최고치 기록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한국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등해 1년2개월여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8월 9일 국제금융센터와 증권업계에 따르면 한국정부 발행 외화채권에 대한 5년 만기 CDS 프리미엄은 지난 8일 135bp(1bp=0.01%)로 작년 6월11일 137bp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라왔다. 한국 CDS 프리미엄은 8월 1일 101, 2일 106, 3일 107, 4일 112, 5일 117 등으로 완만한 오름세를 보이다가 8월 8일에는 하루만에 18bp 상승했다. CDS는 채권을 발행한 기업이나 국가 등이 부도가 날 때 손실을 보상해주는 금융파생상품이다. CDS 프리미엄이 높아졌다는 것은 국가 신용도가 나빠져 해외채권을 발행할 때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는 의미다. 미국발(發) 재정불안으로 은행들의 차입여건은 나빠졌다. 하나, 국민, 신한, 우리, 기업, 산업, 수출입은행 등 주요 7개 은행의 CDS 프리미엄 평균은 8월 5일 140.0bp에서 8일 142.9bp로 3bp 가까이 상승했다. 이는 2010년 11월30일(143.2bp) 이후 최고치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가산금리도 비슷한 모습이다. 2014년물 외평채 가산금리는 8월 5일 160bp에서 8일 165bp으로 올라 지난 5월18일 166bp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9년물 외평채 가산금리는 5일 98bp에서 8일 100bp로 상승했다. 외평채 가산금리란 국제금융시장에서 유통되는 한국 정부 채권의 수익률을 나타내는 지표로 미 재무성증권 등 기준채권 금리에 대한 가산금리로 표기되며 대외신인도가 개선될수록 낮아진다. 현재 총 외채 4000억 달러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1조 달러의 40%에 이르는 규모로 정부가 내부적으로 잡고 있는 심리적 저항선이다. 최근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경제 규모가 커지면 외채가 느는 건 자연스럽지만 4000억 달러를 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총외채 4000억 달러 시 연 4% 금리이면 160억 달러를 이자로 지불해야 하는데, 경상수지 흑자 폭이 줄거나 적자로 돌아서면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수준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6월 경상수지 흑자는 29억8700만 달러였다. 정부는 일단 늘어난 외환보유액과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근거로 불안감 확산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경제의 한계상 외환유동성 위기는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어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외견상 한국의 외환건전성 지표는 양호한 편이다. 7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 3110억 달러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9월 말의 2397억 달러보다 700억 달러 이상 많다. 외환시장 불안의 뇌관으로 꼽히는 만기 1년 미만의 단기외채는 6월 말 현재 총외채의 38%인 1512억 달러다. 2008년 9월에는 단기외채가 1896억 달러로 총외채(3651억 달러)의 52%에 이르렀다. 1997년 외환위기 때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상태다. 1997년 말 정부가 집계한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04억 달러 규모였지만 당장 쓸 수 있는 가용외환보유액은 89억 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총외채는 1673억 달러, 단기외채는 636억 달러로 가용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비율은 715%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시장은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완전히 개방된 데다 수출입 비중이 GDP의 80%에 이르는 한국 경제의 구조상 조그만 충격에도 외환시장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환(換)변동에 대한 시장 불안 심리가 한 방향으로 쏠릴 경우 이를 버텨낼 맷집에 한계가 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급격히 이탈하면서 환율이 상승하면 원화가치 하락에 따른 외채상환 부담이 커지고 외화 조달에도 차질이 빚어져 일시적으로 외환 수급 불균형(미스매치)이 발생할 수도 있다. 2008년의 ‘9월 위기설’처럼 한국경제에 주기적으로 위기설이 반복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정부는 외환건전성부담금(은행세) 시행을 앞두고 “시중은행들이 단기외채를 많이 차입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일 때마다 한국 경제를 괴롭혀 온 외채를 정부가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이번에도 위기 돌파의 관건인 셈이다.

국내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는 최고조
   
 
시장은 리더십을 믿지 못했다. 한국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실물경기는 낫고, 외환유동성은 안정적이라는데도 국내 증시는 이틀 연속 폭락세를 연출했다. 왜 그런 것인가. 시장의 대답은 “믿지 못하겠다”로 요약된다. 나라 간 정책 공조가 2008년만큼 쉽지 않고, 선거를 앞둔 각국의 리더십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8월 9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68.10포인트(3.64%) 급락한 1801.35로 장을 마쳤다. 오전 한때 1684.68까지 내려가며 1700선이 무너졌다. 지난 6거래일 동안 코스피지수는 370.96포인트 빠졌다. 시가총액에서 208조9872억원이 사라졌다. 코스닥지수도 6.44% 내린 432.88로 마감했다. 안전자산인 금 가격은 3.75g(1돈)에 24만3200원으로 하루 만에 1만1200원 올랐다. 유럽 증시는 오후 11시 현재(한국시간) 영국(-0.93%), 프랑스(-0.77%), 독일(-2.02%) 등 대부분 약세를 나타냈으나 전날보다 다소 진정된 모습이었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내 경제의 건전성을 강조하고, 증시 전문가들은 미국이 더블딥(경기가 잠시 호전됐다가 다시 침체하는 현상)으로 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전망하고 있다. 미국 국채는 오히려 강세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의 불안심리는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 지난 6거래일 동안 17.1%가 빠졌다. 중국에 비하면 3배에 가깝다. 실제 국내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나타내는 ‘코스피200 변동성지수’는 전날보다 42.12% 오른 50.11이었다. 지수 산출 이래 최고치다. 전문가들은 대안 부재를 이유로 든다. 2008년 금융위기 해결 과정에서 보여줬던 정책수단 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다. 우선 미국이 3차 양적완화(채권을 사들여 달러를 시장에 푸는 것)에 나서더라도 글로벌 증시 급락세를 진정시킬지 의문이 든다. 이미 두 차례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의 회복신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3차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할 경우 달러 약세 심화와 물가상승 압력이 세계경제를 궁지로 몰고 갈 여지도 있다. 중국이나 유럽은 물가상승과 재정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정책 공조에 발 벗고 나서기가 쉽지 않다고 시장은 판단하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 문제도 주요 변수다. 내년에 한국과 미국은 총선과 대선을, 프랑스·러시아 등은 대선을 치른다. 레임덕 문제를 피해가기 쉽지 않다. 송태정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의 정부부채 한도 증액 합의만 보더라도 양당의 합의가 끝까지 진통을 겪었다”며 “각국이 리더십 교체기에 접어들고 있어 글로벌 공조가 금융위기 당시만큼 잘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아시아 증시 가운데서도 국내 증시의 하락폭이 가장 컸다. 수출 위주의 소규모 개방경제와 자본시장의 높은 개방도 때문으로 분석된다. 글로벌 수요가 위축될 경우 수출에 실적을 의존하는 국내 기업들의 이익하향이 불가피하다는 우려에 외국인들의 매도세가 이어졌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이 30%를 넘는 등 국내 자본시장에서 외국인들이 일시에 유동성을 회수할 경우 그 파급력도 우려되는 지점이다. 금융위원회는 “우리 금융기관의 외환유동성은 아직까지 양호한 상황이지만 글로벌 신용경색이 발생할 경우 국내 금융기관의 차입여건이 급격히 악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권혁세 원장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은 양호”
   
▲ 세계 경제가 장기간 저성장·고물가 국면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한국으로서는 지금 처지에선 재정을 추가로 투입하기도, 금리정책으로 맞서기도 모두 어려운 난국에 봉착해 있다
주식 공매도가 3개월간 한시적으로 금지된다. 또 하루 동안 살 수 있는 자사주 수량한도도 완화된다. 금융위원회는 8월 9일 임시 금융위를 열고, 최근 금융시장 불안에 따라 이 같은 내용의 대응책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금융위는 우선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전체 상장종목에 대해 한시적으로 공매도를 제한하기로 했다. 제한기간은 8월 10일부터 11월9일까지 3개월간이다. 현재는 금융주에 대해서만 공매도가 제한돼 있다. 금융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공매도를 제한한 바 있다. 금융위는 역시 석 달간 하루동안 살 수 있는 자사주 수량한도도 완화하기로 했다. 주식을 직접 살 때는 취득신고 주식수만큼, 신탁을 통할 경우 신탁재산 총액 범위 내에서 취득가능한 주식수만큼 살 수 있도록 허용했다. 현재는 ‘취득신고 주식수의 10%’ 및 ‘이사회 결의일전 30일간 일평균 거래량의 25%’ 중 많은 수량과 발생주식 총수의 1%를 비교해 이 가운데 적은 수량만큼만 살 수 있다. 신탁을 통할 경우 발행주식 총수의 1%이내에서 자사주를 살 수 있다. 금융위는 또 금융감독원을 통해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로스컷 규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해달라고 요청했다.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 의무적으로 주식을 팔아야 하는 로스컷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되면서 매물을 부추기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융위는 아울러 사이버상 자본시장 교란행위에 대한 감시체제를 가동해, 최근 주식시장 급락에 따른 불안심리를 이용해 악성 루머를 유포하는 시장교란 행위에 대한 감시도 강화하기로 했다. 홍영만 금융위 증선위원은 “최근 급락장에서 공매도가 크게 확대되면서 시장불안을 확산시키고 있어 공매도 제한을 비롯한 관련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금융당국이 이례적으로 외국계 증권사를 겨냥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외국계 금융회사 사장들에게 “한국 경제 상황을 평가할 때 객관적 기준에 의거해 달라”고 주문했다. 일부 외국계 증권사들이 글로벌 재정 위기에 대한 한국의 대응 능력이 취약하다고 분석한 것에 불편한 심기를 보인 것이다. 권 원장은 8월 12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외국계 증권회사와 자산운용사 현지법인 및 지점, 외국계 은행 등 대표 20여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권 원장은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양호하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외채무가 적고 외환보유액은 많으며 국내 글로벌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대외 불안 요인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권 원장은 “일부 외국계 증권사에서 객관적 기준이 아닌 자의적 기준으로 유럽 재정 위기 악화 시 아시아 국가 중 한국의 대외 상환 능력이 가장 취약하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고 꼬집었다. 금감원은 권 원장이 지목한 것은 최근 발표됐던 모건스탠리, 노무라증권 등의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8월 1일 충격흡수 정도 순위에서 아시아 8개국 중 한국이 최하위라고 했다가 정부가 거세게 반발하자 8월 10일에는 “이번에도 잘 방어해 낼 것”이라는 정반대 분석을 다시 내놓기도 했다. 노무라증권은 8월 11일 펴낸 ‘아시아경제보고서’에서 “미국과 유럽이 경기 쇠퇴 국면으로 가고 국제 원자재가격 지수(CRB)가 15% 추가 하락할 경우 올해 한국의 GDP 성장률 전망치를 3.5%에서 2.5%로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경제 위기, 美 정부 나설 여력 없어
국제적 신용평가사 S&P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강등한 시점은 세계 경제에 마른 장작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때였다. 미국의 제조업 경기가 식어가고 있었고, 2차 양적완화(금리를 더 내릴 수 없는 상황에서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는 것)가 지난 6월 30일로 종료돼 추가 대응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재정적자가 심각한 남유럽 국가들은 발등에 위기가 떨어졌는데도 ‘복지병’이라는 만성질환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고, 중국은 치솟는 물가를 잡으려고 긴축 정책으로 돈줄을 계속 조이고 있다. 이런 4대 악재 위에, S&P가 성냥불을 그었으니 불꽃이 ‘메가톤급 폭탄’으로 확 번져 전 세계 증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S&P가 신용등급을 내리기 전부터 미국 경제에는 이미 좋지 않은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지난 8월 1일 발표된 미국 제조업지수는 시장 예상치(54)를 훨씬 밑도는 50.9로 나왔다. 이 지표는 미국 기업들의 경기 전망을 지수화한 것으로 숫자가 작아질수록 부정적인 전망을 갖는 기업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3월 8.8%였던 실업률은 되려 지난 7월 9.1%로 튀어 올랐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든 건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시점이 미국의 2차 양적완화 종료와 맞물렸다는 점이다. 미 연준은 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를 통해 2조3000억 달러를 풀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3차 양적완화는 쉽지 않다. 더욱이 지난 5월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2008년 10월 이후 가장 높아 전년 동월 대비 3.6% 상승했다. 이런 시점에 양적완화를 통해 돈이 풀린다면 물가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이미 시중에 돈이 엄청나게 넘쳐나는데, 더 많은 돈을 푼다고 경제가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설 여력도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2%대를 맴돌던 미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2009년 10.8%에 이르렀고 올해도 8.7%로 예상된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도 사정이 좋지 못하다. 유럽의 상황은 미국보다도 오히려 심각하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GDP 대비 국가 채무 규모는 각각 143%와 119%에 이른다. GDP를 훨씬 웃도는 빚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94%인 미국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경기가 좋을 때 남발한 복지 정책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 연금 지급 확대, 공무원 고용 증대, 법인세 감면 등 포퓰리즘 정책을 줄줄이 내놨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려면 재정지출을 대폭 줄이는 등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은 싸우고 있고 국민은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남유럽 복지병은 만성 질환을 넘어 불치병 수준이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중국은 당장 물가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미국발 악재가 터지면서 기준금리 인상이 늦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물가 상승 문제는 더 악화될 수 있다. 반대로 중국이 기준금리를 종전 속도대로 계속 올린다면 과도한 경기 위축 신호로 해석되면서 부동산 시장의 경착륙이 발생할 수 있다.

버냉키 “앞으로 2년간 미국 경제는 희망 없다”
   
▲ 버냉키는 “이례적으로 낮은 현재 기준금리(0~0.25%)를 최소한 2013년 중반까지는 유지해도 되는 경제 상황”이라며 사실상 앞으로 2년간 미국 경제는 희망이 없다고 고백했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별명은 ‘헬리콥터 벤’이었다. 대공황 전문가인 그가 ‘위기 순간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 유동성을 늘리면 된다’고 말해 2006년 취임 순간부터 그렇게 불렸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엔 그에게 별호가 하나 더 붙었다. ‘창의적인 벤(Creative Ben)’이다.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85)도 상상하기 힘든 아주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였다. 그는 다급한 순간 초우량 회사채뿐 아니라 모기지 관련 증권이나 기업어음까지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장에 돈을 주입했다. 그는 투자은행마저도 시중은행으로 면허를 바꿔 긴급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버냉키가 8월 10일 (한국시간) 창의력을 또 한 번 발휘했다. 이른바 ‘금리 동결기간 예고제’를 만들었다. 그는 이날 “이례적으로 낮은 현재 기준금리(0~0.25%)를 최소한 2013년 중반까지는 유지해도 되는 경제 상황”이라고 밝혔다. 금리를 2년간 동결하겠다는 얘기다. 뒤집어 보면 사실상 앞으로 2년간 미국 경제는 희망이 없다고 고백한 꼴이다. 역사적으로 아주 이례적인 기술이다. 로버트 헤첼 리치먼드 연방준비은행의 이코노미스트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알기론 근대 중앙은행 310여 년 역사에서 금리 동결 기간을 미리 예고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좀 더 짧게 보면 그린스펀 패러다임의 폐기나 다름없다. 그는 시장의 의표를 찌르듯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렸다. 심리적 충격 요법으로 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그의 기준금리 조정이 경기나 고용 동향보다 한 걸음 앞서 ‘선제적 정책’으로 불리기도 했다. 버냉키가 예고제 실험이란 강수를 둔 이면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우선 전 지구적인 자산가격 대폭락이다. 미 국가부도 우려가 본격화한 지난 7월 26일에서 8월 8일 블랙먼데이까지 글로벌 주식가치는 7조8000억 달러(약 8500조원) 증발했다. 이 증발을 막지 못하면 미국뿐 아니라 선진국 소비가 급감할 수 있다. 미 실물경제도 심상찮았다. 버냉키도 “경제성장률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예상한 것보다 상당히 낮다”고 진단했다. 올 6월 그는 “완만하지만 꾸준히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진단 변화는 시장을 괴롭힌 더블딥 우려가 근거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사정이 급하다고 버냉키가 모든 카드를 다 보여줄 순 없었다. 시장이 내심 기대한 양적 완화(QE)는 넌지시 내비치기만 했다. 그는 이른바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 단기 국채를 팔고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작전도 쓸 수 있었다. 단기 금리를 올려 자본을 유인하고 장기 금리를 떨어뜨려 기업의 투자를 자극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결국 버냉키는 이런 카드들을 모두 포기하고 예고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처방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미 기준금리는 2008년 12월 이후 4년 넘게 0.25%로 고정되는 셈이다. 1980년 이후 기준금리 인하 뒤 동결 기간은 12~18개월 정도였다. 버냉키의 동결 기간이 서너 배 길다. 그동안 시장 플레이어들은 중대한 리스크 하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기준금리 변동 리스크다. 그러나 실물경제 측면에서 보면 버냉키 예고제는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 경제가 2013년 중반까지는 확장 국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고 애셔 뱅걸로 미 노던트러스트 이코노미스트는 말했다. 미 경제가 앞으로 2년 정도는 지지부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기둔화 가능성이 한꺼번에 분출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왔다. 저성장과 고물가라는 동시다발 악재도 문제지만 앞선 위기 탈출을 위해 휘둘렀던 칼(정책수단)들이 이미 무뎌진 상태여서 다가올 위기는 한층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8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한 뒤, 국내외 경기둔화와 물가상승을 동시에 우려했다. 그는 “앞으로 국내 경기는 해외 위험요인의 영향으로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며 “물가 역시 근원인플레이션율이 3.8%까지 상승하는 등 인플레 기대심리를 타고 당분간 오름세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총재의 우려는 최근 경제지표의 흐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지난해 6.2%의 깜짝 실적을 냈던 경제성장률은 올 들어 1분기 4.2%, 2분기 3.4%로 크게 둔화됐다. 어찌 보면 경기하강을 우려할 만한 수준이지만 올 들어 정부의 최대 화두는 줄곧 물가 잡기에 고정됐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하반기 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올 성장률 전망을 4.5%로 낮춰 잡은 것은 물가안정 의지를 감안한 것"이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여기에는 하반기 국내 경기가 세계경제의 회복세와 맞물려 나아질 것이라는 전제가 들어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했다. 잠재 불안요소로 여겼던 주요국들의 경기둔화 가능성이 재정위기의 뇌관을 타고 한꺼번에 분출된 것.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로서는 덩달아 힘들어 질 수밖에 없는 수렁에 빠진 셈이다. 실제 각국 경제는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의 조짐이 역력하다. 최대 경제대국 미국의 2분기 성장률(전기비연율 1.3%)은 1년 전(3.8%)보다 크게 악화됐다. 3월 8.8%던 실업률은 6월 9.2%까지 치솟았고 6월 소비지출 증가율 역시 21개월 만에 마이너스(-0.2%)를 기록했다. 반면 5월 근원물가는 전달보다 0.3%나 올라 3년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유럽 역시 마찬가지다. 재정난에 허덕이는 남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에 이어 신용등급 강등루머에 시달리는 프랑스 경제까지 흔들릴 경우 유럽 경제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유로존의 물가상승률(7월 2.5%)은 이미 8개월째 자체 관리목표(2% 미만)를 훌쩍 넘어선 상태다. 세계 최대의 성장엔진 중국 역시 7월 물가가 6.5%나 급등, 3년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긴축 분위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세계 경제가 장기간 저성장·고물가 국면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으로서는 내년 물가가 다소 안정되면 성장 쪽에 신경을 써야 할 상황이지만 지금 처지에선 재정을 추가로 투입하기도, 금리정책으로 맞서기도 모두 어려운 난국에 봉착해 있다”고 말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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