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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반락/뮤레카, From 1945’의 소리 독백[1]
광복 이후 70년 간의 노래를 돌아보다
2016년 05월 09일 (월) 01:50:1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지난 4월 26일, 서울 대치동에 있는 ‘한국문화의 집’에서 ‘박성서의 반락’ 공연을 가졌다 ‘반락(盤樂)’이란 ‘음반을 즐기다’라는 뜻으로 음반과 강연으로 꾸며진 렉처 콘서트(Lecture Concert)다.
   
 
이 ‘반락’ 무대를 준비하면서 나는 ‘뮤레카(M-eureka)’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뮤직, 유레카’라는 두개 단어의 합성어다. ‘유레카(Eureka)’는 그리스 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던 그 유명한 말로 ‘알았다’, ‘찾아냈다’는 뜻. 말하자면 ‘노래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겠다’는 각오로 ‘노래 속에서 내가 찾아낸 것들’이라는 것이 공연 주제다.
그동안 묻혀져 있던 노래들을 찾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특히 1945년 광복 이후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서 궁핍한 삶을 살아낸 우리에게 노래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귀동냥 40년, 발품 20년의 산물’을 통해 ‘우리나라 광복 이후 70년 동안의 삶과 노래’를 돌아보며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되묻는 시간도 가졌다.
이날 공연 무대에 올려진 노래들은 해설과 함께 한정판 CD로 제작, 관객들께 선사했다. 그 노래들 하나하나를 보다 상세히 소개하며 광복 이후 가요사를 돌아본다.

글 / 박성서 (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 옥상훈 (한국문화의집 KOUS)

‘반락’ 공연에 대한 소리 독백

   
 
현재 한글 자판에서 ‘가요사’라는 글자를 두들기면 빨갛게 밑줄이 표시된다. 잘못된 글자라는 뜻이다. 그렇듯 지금까지 우리나라 가요사는 볼모지다. 그러나 분명 우리나라 대중음악사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와 가치가 담겨 있다고 믿고 있다.

나는 음반을 토대로 연구를 시작했다. 음반이 곧 모든 기록의 시작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가요 음반이 사무실에 가득하다. 허나 결코 음반 수집가는 아니다. 콜렉션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구를 위해 갖게 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동안 방송 등에서 소문을 듣고 취재를 오면 정중히 사양해왔다. 음반 콜렉터로 먼저 인식되어지는 걸 경계해온 탓이다.
실제 나는 음반 수집을 하다 보니 평론가가 된 게 아니라 연구를 위해 음반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본인이 갖고 소장하고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노래가 우리 가요 중에서는 의외로 많다.
이 ‘반락’을 통해 광복 이후 가요사를 돌아보고자 했다. 이중에는 아직 음반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도 있고 처음 공개되는 음원도 있다. 또 시간의 제약이 주는 한계도 있었다.
광복 70년, 노래 70년... 오래 되어 빛바래듯 더욱 빛나는, 시간의 기록이자 시대의 기록이라고 믿고 싶다. 때문에 ‘뮤레카’란 단어를 떠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말과 노래도 해방된 광복 이후 가요사를 조명하면서 처음 무대에서 들었던 노래는 현인의 ‘세월이 가면’이다.

   
▲ 가수 현인과 작곡가 손목인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시, 이진섭 작곡, 현인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서늘한 가슴에 있네.
(라라레코드 R-646-B)


낭만을 추구하던 ‘50년대 명동시대’를 대표하는 이 노래는 박인환 시인이 글을 쓰고 극작가 겸 방송작가 이진섭씨가 즉석에서 곡을 붙여 만든 노래로 가수 현인씨가 1957년 라라레코드를 통해 SP음반으로 취입했다. 첫 출반 당시 제목은 ‘세월은 가고’였다.

광복 이후 가수 1호이기도 한 현인은 ‘서울야곡’ 등의 싱어송라이터로 그리고 ‘월드뮤직의 전령사’로 불릴 만큼 많은 외국곡을 번안해 발표했다.

특히 독특한 스타카토 창법을 구사, ‘현인 창법’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영화인 ‘푸른 언덕’을 통해 가수 겸 배우로 등장했다. 무명의 음악학도가 성악가로 성장해가는 과정과 집념을 그린 영화 ‘푸른 언덕’의 상대역은 김은희였으며, 서월영, 황정순, 연극인 김복자, 그리고 장민호와 윤일봉이 소년 역을 맡았다.
녹음기재가 열악하던 당시에 녹음기사 조종국이 창의적인 기술을 발휘, 옵티컬 사운드(Optical sound, 광학 방식으로 생필름에 파장을 녹음하는 것)로 노래 부르는 장면을 동시 녹음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인공이 성악가로 성공한 후 음악회에 등장하는 장면에는 김생려가 조직한 서울교향악단 45명이 출연했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하여 명동에 있던 시공관 무대를 빌려 밤샘 촬영했던 ‘푸른 언덕’의 주제가는 반락 무대에서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음반의 훼손으로 잡음이 심해 틀지 못했음이 매우 아쉽다.

한류의 진원지, 한명숙의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이라는 유행어의 주인공, 가수 한명숙
새삼 ‘한류’가 화제다. 세계 문화의 변방에서 이제금 문화발신기지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편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60년대, 당시 가수를 소개할 때 최고 수식어 중에 ‘이제 막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누구...’라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실력 있는 가수라는 일종의 수사다. 당시 유행어처럼 사용되던 ‘동남아 순회공연’을 지금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일종의 ‘한류’인 셈이다.
이 수식어를 만들게 된 주인공이 바로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의 가수 한명숙이다. 61년도에 발표되자마자 전국을 노랗게 물들인데 이어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한명숙 또한 이들 나라로부터 끊임없이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관광 기념으로 이 음반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지요. 언젠가 대만사람들이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와 ‘빨간마후라’가 자기네 나라 노래라고 우기는 거예요. 워낙 대만에서도 응원가로 사용되는 등 널리 불리어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겼겠지요. 그 무렵 공산권 국가에서도 널리 애창되었으니 저로써는 민간외교에도 한몫했던, 그야말로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죠.” 가수 한명숙씨의 회고다.

이 무렵 ‘귀국리사이틀’이라는 공연 또한 화제였다. 주인공은 김시스터즈, 패티김, 김치켓, 윤복희 등. 모두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는 가수들이었다.

김시스터즈는 59년, 미국 라스베가스로 진출, ‘찰리브라운’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6위에 올랐다. 윤복희는 63년 ‘코리안키튼즈’를 결성해 동남아를 거쳐 영국에서 활동했다. 67년 잠시 귀국해 가진 공연실황음반이 제작되었고 이 음반의 자켓 사진이 미니스커트 붐을 일으키는 진원지가 된다. 그만큼 국민들에게 영향력이 컸다.

그럼에도 한명숙이 ‘한류 1호’로 평가받는 이유는 우리말로 된 노래로 붐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 떠올려지는 인물이 프랑스를 대표했던 세계적인 샹송가수, 이베뜨 지로(Yvette Giraud)다.

1950년대 말부터 아시아에서의 잦은 공연과 함께 샹송 붐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녀가 직접 우리말로 취입, 출반한 앨범이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와 '안개'다.

공교롭게 이 노래 ‘안개’는 이로부터 2년 뒤 동경국제가요제에 출전해 상을 받는 최초의 우리 가요가 된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해외가요제 참가 러시를 이뤘다. 정훈희를 비롯해 문주란, 민해경, 정미조, 패티김, 현미 등의 낭보가 이어졌고 이러한 붐은 우리나라에서 직접 국제 규모의 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TBC 세계가요제’, ‘MBC 국제가요제’ 등이 그것.

사실 이전부터 일본은 우리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다. 1930년대부터 이난영, 채규엽, 남인수, 백난아 등이 일본 전역 순회공연을 가진 곳이기도 했고 또한 60년대 초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노래 '카스바의 여인(カスバの女)'은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의 작곡가 손목인의 곡이다. ‘구가야마 아끼라(久我山明)’란 예명을 썼기 때문에 이 노래가 ‘목포의 눈물’의 한국 작곡가의 곡이란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듯 일본무대에서 많은 가수들이 활동을 해왔다. 김연자, 이성애, 계은숙, 조용필 등. 이들을 통해 우리나라 대표적인 노래들이 일본에서 불리어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노래방기기가라오케’가 본격 등장하며 한국 노래 붐이 일어났다. 90년대에 이어 2000년대 현재의 한류 붐의 바탕에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왔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의 아이돌스타들 공연 소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비틀즈마저 영어로 노래한다고 외면 받았던 곳에서, 우리말과 영어가 조합된 노랫말에 맞춰 파리 시민들이 댄스를 추는 장면을 보면서 음악은, 만국 공통어란 생각이 들었다. 50~60년대 이베뜨 지로가 그랬듯이.

세계적인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가 부른 우리말 노래들

   
▲ 이베뜨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해 발표한 음반
‘시인의 혼(L'ame Des Poetes)’의 세계적인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Yvette Giraud). 60년대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에서의 잦은 공연과 함께 아시아에서 샹송 붐을 주도했던 지로는 당시 에디뜨 삐아프, 줄리에뜨 그레꼬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가수 중 한 명이다.

상냥하고 붙임성 있는 외모와 함께 그의 깊고 낮은 목소리에는 한껏 정감이 묻어난다. 부드러운 창법과 발음으로 매우 친근감을 안겨주는 그의 노래는 이전까지 어둡고 우울한 샹송 이미지를 또 다르게 바꾼 인물인 동시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최초로 내한공연을 펼쳤던 최초의 샹송가수이기도 하다.

아울러 우리 노래를 직접 우리말로 취입한 '노오란 셔쓰'와 '안개'.

“마치 우리말을 알기라도 하듯 섬세하면서도 역동감이 넘치는 표현력, 그래서 '노래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지로만의 가창력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뜨거운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당시 공연에 참관했던 ‘노오란 셔쓰...’의 작곡가 손석우 선생의 회고다.

특히 노래 취입 당시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에 집중하던 그녀의 모습 또한 매우 감동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단순하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힐빌리(Hillbilly, 현재 Country & Western) 리듬의 이 곡은 61년, 처음 발표될 당시엔 일부 관계자들로부터 '그저 단순히 동요에 털이 좀 난 것일 뿐'이라는 별로 곱지 않은 ‘악평’도 한 편으론 감수해야 했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60년대 우리나라 가요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로부터 우리 가요는 다양한 리듬의 팝스타일로 폭넓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지로는 이로부터 6년이 지난 1968년 6월, 다시 내한해 펼친 공연과 함께 작곡가 이봉조악단의 반주에 맞춰 '안개' 그리고 그녀의 히트곡인 'Papa Aime Maman(아빠는 엄마를 좋아해)'를 '엄마 좋아 아빠 좋아’라는 제목으로 바꿔 우리말로 취입한다. 이 노래 'Papa Aime Maman‘은 이후 70년대 들어 포크부부듀엣 바블껌이 ‘엄마는 아빠만 좋아해’라는 제목으로 또다시 번안 발표하면서 전국적으로 애창되었다.
이후 지로는 이 '안개'를 자신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자 했다. 때문에 일본에서 발표한 '이베뜨 지로 대표 샹송집(일본방송서비스사 발매)'을 발표할 때 이 노래의 원제를 'Brouillard(안개)', 그리고 일본어 제목으로는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이라 표기해 직접 일본말로 취입해 수록하기도 했다.

   
▲ 이베뜨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해 발표한 음반
1916년 파리에서 태어난 지로는 52년 ‘L'ame Des Poetes(시인의 혼)’로 프랑스 디스크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국경을 초월, 언어 장벽을 뛰어넘은 외교대사로 수많은 외국공연을 통해 프랑스 문화와 샹송을 보급하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시인들이 사라진 오랜 뒤에도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거리에 흐를 것'이라고 지로는 그녀의 노래 '시인의 혼'에서 읊조렸다. 그녀가 한국을 찾은 것도 어느덧 5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들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베뜨 지로 역시 세월 속에 묻혀지며 지난 2014년 타계했다.
그러나 그녀가 남기고 간 서툰 우리 말 노래들은 여전히 한국인들 가슴에 이따금씩 흘러, 젖어들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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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7 05:3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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