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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이 될 뻔했던 그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
최근 아시아 4개국 순방 성공적으로 마쳐
2009년 03월 06일 (금) 11:00:03 김희준 juderow9@paran.com

힐러리 클린턴의 인생과
대 북한 정책 등 앞으로 그녀의 행보에 대해

   
▲ 지난 2월 19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은 방문 기간 동안 시종일관 자신있는 모습과 언변으로 이번 방문을 큰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힐러리 다이앤 로댐 클린턴. 보통 힐러리 여사로 알려져 있던 그녀의 정식 이름이다. 지난해 미국 대선 후보 지명에서 같은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끝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후보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오바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약속했고, 그녀의 큰 후원에 힘입어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최초 흑인대통령이 되는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아내이기도 한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만큼이나 정치적인 행보가 눈에 띄는 인물이며, 앞으로 전 세계에는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대통령의 부인 즉, 영부인의 위치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까지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속담일 뿐, 그녀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내조 덕분에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훌륭히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고, 퇴임 후 아내의 정치적인 행보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다.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정치판이지만, 힐러리 클린턴의 그간 모습들을 보면 ‘여성’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정치인’이 아닌 그냥 ‘정치인’일 뿐이며 웬만한 남성 정치인보다 더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아시아 4개국 순방에서 그녀의 모습은 각 나라 대표 정치인보다 더 강한 카리스마를 남겼으며, 성공적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녀의 정치적 역량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전까지 그녀의 어린 시절

   
▲ 지난 2007년 1월 이라크를 방문해 주둔 미군을 격려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힐러리 다이앤 로댐 클린턴은 현재 미국 민주당 소속 정치인이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 국무장관 자리를 맡으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에 일조하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 제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으로 1993년부터 2001년 사이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였다.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아버지 휴 엘즈워스 로댐과 어머니 도로시 하월 로댐 사이에서 태어난 힐러리 클린턴은 시카고 교외의 파크리지로 옮겨 그 곳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성장했다. 파크리지의 메인사우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 웰즐리 여대에 입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여기서 청년 공화당 단체에 잠시 몸담았으나 당시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탈퇴한 이후 유진 매카시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지원하였고 웰즐리 대학 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졸업식 때 대표 연설을 하였는데, 이 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예일 법학대학원에 입학한 후 학회지 편집자, 아동학연구소등에서 활동하던 중 1971년 같은 예일대 법학과 학생이던 빌 클린턴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뉴헤이븐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으며 1973년 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클린턴의 졸업 때까지 1년간 같이 지냈다. 졸업 후에 심화연구를 위해 예일 어린이 연구 센터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어린이와 법에 대한 학술 논문을 1973년에 발표했다. 1974년 워싱턴 DC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청문회를 위한 탄핵 조사 연구원으로 일했던 힐러리 클린턴은 빌 클린턴이 콜롬비아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고 아칸소 주 시험에 붙자 그녀는 클린턴을 따라 아칸소로 이사한다.

   
▲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08년 2월 뉴욕에서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선 힐러리 클린턴 상원 의원과 함께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녀와 클린턴은 이 시기 아칸소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으며 클린턴은 하원의원에 도전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 무렵, 클린턴은 계속 청혼해서 1975년 결국 승낙을 하고 1975년 10월 11일에 결혼에 이른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중간 이름을 ‘로댐’으로 계속 쓰기로 했다. 빌 클린턴은 1974년 선거에서 패했으나 1976년에 아칸소의 지방법관으로 선출된다. 이때 그들은 아칸소 주의 수도인 리틀 록에서 살기 시작했고 힐러리는 로즈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7년 어린이 보호 재단인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한 아칸소 대리인협회’의 공동창업자가 되었으며,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법적 지원재단의 이사로 임명돼 1981년까지 일했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으며 초기 9천만 달러였던 재단예산은 그녀의 임기 동안 3억 달러로 성장했다. 1980년 2월 27일 첼시 클린턴를 낳았다. 같은 해 주지사 선거에서 빌 클린턴은 패배했지만 2년 후 다시 주지사에 선출되었으며, 이때부터 빌 클린턴의 부인으로서 ‘미세스 빌 클린턴’ 혹은 ‘힐러리 클린턴’으로 유권자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며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칸소 교육표준위원회의 회장을 맡아 활약했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미국 변호사 협회의 여성회원 회장을 지냈으며, 그 동안 내셔널 법학지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 100인중 한 명으로 두 번 선출되었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아칸소 주에 뿌리를 둔 TCBY와 월마트의 이사진을 지냈다.

최초의 석사학위 이상을 가진 대통령 영부인
르윈스키 추문과 탄핵 등으로 위기, 슬기롭게 극복해

1992년 빌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고 대통령에 당선돼 1993년 1월 집권을 시작하자 그녀는 미합중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녀는 최초의 석사학위 이상을 가진 퍼스트레이디이기도 하였다. 보통 동관에 사무실을 가지는 대신 그녀는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서관(West Wing)에 집무실을 가졌으며 엘리노어 루스벨트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은 클린턴 선거 전략에 있어 “하나 가격에 둘을!”이라는 표어로 긍정적으로 활용되었으며 ‘빌러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1993년 클린턴 대통령은 그녀를 국민건강보험 개정을 위한 일을 맡겼다. 이에 따라 클린턴 건강보험계획이라는 건의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고용자가 피고용인의 건강보험을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으며 민주당이 다수당이었음에도 상하원에서 필요한 표를 얻지 못해 1994년 부결되었다. 이때 국민들의 힐러리에 대한 지지율은 50퍼센트 이상에서 1994년에는 44퍼센트로 그 해 말에는 35퍼센트로 하락하고 만다. 이는 1994년 중간선거의 중요사안이 되었으며 공화당은 ‘힐러리 캐어’라 부르며 반대세력을 모아 결국 공화당에게 상원과 하원 양쪽 모두에서 패배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1997년에는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함께 어린이 건강 보험 프로그램 법안을 만들어 추진했는데 이 법은 각 주로 하여금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연방차원의 지원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그 외 전립선암과 어린이 천식 치료를 위한 기금 조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걸프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참전군인들을 위한 조사활동에서 일했고 1997년에는 사법부의 여성폭행방지사무소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힐러리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러한 활동 중 가장 애착이 가는 활동으로 1997년의 입양과 안전한 가정을 위한 법률을 만든 일을 손꼽고 있다. 대통령 영부인 시절 중 최대의 위기는 바로 르윈스키 추문과 탄핵일 것이다. 1998년 백악관 인턴이였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클린턴 대통령과의 혼외정사에 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에 이르는 일파만파의 사건으로 번졌다. 힐러리 클린턴은 이러한 소문에 대해 우익의 음모라고 일축하였고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믿는다고 밝혔지만, 이러한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자 빌 클린턴과 힐러리 사이의 결혼에 대한 위기설이 퍼졌으나 그녀는 그들의 결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당당히 밝혔다. 하지만 이후 자서전에서 과연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클린턴에게 매우 화났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중은 그녀가 이러한 사건에서 보인 결단력과 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그녀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이때 71퍼센트를 기록하였다. 그녀는 2003년의 자서전에서 결혼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 “빌처럼 나를 웃게 만들고 이해하는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흥미로우며 정력적이고 활발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꿋꿋한 모습을 보였던 상원의원 시절부터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 후보 지명에 탈락하기까지…
1998년 뉴욕의 상원의원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한은 은퇴를 발표하였다. 민주당 인사들에 의해 이 자리에 출마할 것을 권유 받은 힐러리 클린턴은 1999년 9월 뉴욕 북쪽의 차파쿠아에 집을 사고 이주한 후 상원의원 출마를 발표했고 그녀는 전립선암으로 인해 출마를 포기한 루디 줄리아니 대신 공화당의 릭 라지오와 대결했다. 그녀의 상원의원 출마는 전국적 관심을 끌었으며 이때부터 차기 대권을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2000년 11월 7일에 열린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55%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상원의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예산위원회, 국방위원회, 환경과 공적사업위원회, 건강/교육/노동/연금 위원회와 노년층을 위한 특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참사 이후에는 복구를 위한 기금조성에 노력했으며 214억 달러의 기금모집을 하는데 일조했다. 국방위원회의 상원위원으로서 힐러리 클린턴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 작전을 지지했으며 탈레반 정권에 억압받는 아프간 여성의 삶을 개선하는데 이러한 테러와의 전쟁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녀는 2002년 10월 이라크 전쟁에도 찬성표를 던졌는데 이는 이후 대선 후보 지명 운동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2004년 힐러리 클린턴은 67%의 득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고 2007년에는 이라크 파병 증파에 반대했으며 부시 대통령으로 하여금 철수 시한을 정하도록 하는 법에 찬성하도록 했다. 그녀의 뉴욕 상원의원 재임기간 동안 지지율은 계속 72~74% 정도였으며, 대선 출마를 발표할 때는 약 6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2007년 힐러리 클린턴은 타임즈와 포브스지가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인물로 뽑혔다. 2007년 1월 20일 그녀는 웹사이트의 동영상을 통해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을 발표했다.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기 위해 버락 오바마, 온 에드워드 등과 함께 선거전을 벌인 그녀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버락 오바마에게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면서 미합중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는 역사적인 일은 다음으로 접어야 했다. 결국 버락 오바마를 위해 같은 민주당 의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그를 보필할 것을 약속했고, 버락 오바마는 결국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그녀는 미국 국무장관 자리에 오르며 최근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4개국 순방을 통해 그녀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시켰다.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아시아 4개국 순방
정치인으로서 자신 있는 모습에 각 나라 대표들 탄복
지난 2월 22일까지 있었던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아시아 순방은 바쁘고 틈 없는 숨막히는 일정으로 정신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동안 조지 부시 대통령 정부를 통해 상처투성이가 됐던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일깨워 주었고 그간 아시아 외교의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작업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아시아 외교 순방에서의 상처 치유 과정은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인도네시아 방문길에서 보여준 이른바 ‘스마트 외교’의 의미 강조에 따른 대북정책의 ‘통미봉남’ 우려 불식과 동남아 우호조약에 대한 미국의 입장 변경, 일본 신사 참배와 납북인 가족 만남 등에서 순조로운 지적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스마트 외교 자체가 바로 전임 정부의 상처 치유이자 미진함의 보완인 셈이었다. 경제적 비중이 높은 일본에 대한 첫 방문국 일정 배려는 기존 북핵 억제라는 업적을 정책 우선에 둔 부시 행정부에서 논외로 밀렸던 납북자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신사 참배 역시 기존의 전범자 묘소라는 의미에서 기피되던 것이 이번 ‘일정’에는 포함돼 일본과의 깊은 우호관계를 과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보여준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대한 표현은 중동을 직접 향하지 않더라도 많은 회교권 국민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끼게 해줬다는 지적이며, 특히 동남아 회교권의 맏형 국가를 끌어안음으로써 호주 이북의 동남아시아 지역 관계 개선에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이다. 중국에서의 친선우호의 강조와 경제협력 강조, 그리고 경제위기에 대한 공동대응 노력 언급 등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사안을 논의했다는 지적이다. 중국은 2조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가진데다 현재 세계 최대 규모인 6962억 달러의 미국채를 보유, 최대 미국 채권국가로서 필요한 립서비스를 주고 받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지난 1995년 퍼스트레이디로 중국에 방문, 중국의 당시 인권에 대해 일갈을 가했던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이번에는 이 같은 입장과 외교관 수장으로서의 신분으로 강력한 지적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서로가 국내 문제에 간여하지 않는 수준에서 대화를 오가는 선을 그었다”는 설명으로 그러한 비판에 답했다. 방한 시 동맹국 한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성 발언은 지양돼야 한다는 지적은 동맹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북한의 대남 비난에 거리를 두던 기존 미국 정부의 자세를 뛰어넘는, 북핵 해결 시 미북 ‘외교관계 수립’의 언급 속에서도 한국의 동맹의식을 전혀 저촉하지 않는 단계 높은 혈맹관계를 과시했다는 평이다. 때문에 그간 일부에서 회자되었던 ‘통미봉남’이라는 출처미상의 4자 성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계가 그어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측면지원 문제도 완곡하면서도 점잖은 자세로 한국민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전달됐다는 지적이다. 한편 기존 6자 회담의 틀을 이어가기로 한 오바마 정부의 북핵 정책 노선을 강조하면서 북핵 검증과 완전 공개 시 ‘외교관계 수립’ 은 물론 에너지를 포함한 경제지원, 국제사회 협력 등을 제시하면서 북한 지도자에 대한 비공개 언급 등으로 ‘금기’ 사항을 넘나드는 언변을 구사, 북한의 공포외교를 넘어섰다는 평가이다. 북한에 대해서는 공격성 호언장담에도 6자 회담 틀을 벗어날 경우 언급은 되지 않았지만, 의회 보고서를 측면에서 공개하면서 부시 행정부에서 이루어진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의 번복 등 새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 검토돼 제시될 수도 있다는 단호함이 엿보인 가운데 회담장을 거부한 북한측에 다시 공을 넘겼다는 분석이다. 특히 일본 신사 참배, 이화여대 토론,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등 국가에서의 언론인들과 원탁대화 등은 이전에 보여지지 않은 폭넓은 대화 수용의 자세였으며, 풍부한 외교 역량에서 온 자신감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는 평가과 함께 국무장관의 외교 형태를 국빈급으로 끌어올렸으며 그 동안 교정을 요하는 부분과 보완이 필요한 사안에 대한 검토가 대부분 이루어졌다는 성공적 평가를 받았다. 또한 순방 내내 빡빡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은 ‘정치의 정석’이 이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다시 한 번 힐러리 클린턴의 정치적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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