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시민군, 부활절 봉기 100주년

영국이 아일랜드에 군대를 상륙시킨 것은 1170년 헨리 2세 때였다. 그 후 16세기 초 헨리 8세가 아일랜드를 재침공해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강요하고 아일랜드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방식으로 아일랜드 지배를 강화했다. 아일랜드 대부분이 영국의 통치령이 된 것은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엘리자베스 1세 재임(1558~1603) 때였다. 그때 복속되지 않은 북부의 얼스터(현재의 북아일랜드) 지방은 제임스 1세 재임(1603~1625) 때 영국에 무릎을 꿇었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주민들에게 “얼스터 지방에 정착하면 좋은 조건으로 넓은 땅을 주겠다”며 대대적으로 식민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얼스터 지방은 구교(가톨릭)를 믿는 아일랜드의 다른 지역과 달리 영국 국교회(신교)가 지배하는 지역이 되었다. 20세기 내내 테러로 얼룩진 ‘북아일랜드 사태’는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1649년 9월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 북쪽 드로이다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4,000여 명의 아일랜드 주민을 살해한 사건은 아일랜드인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게다가 크롬웰이 아일랜드 전체 토지의 50% 이상을 몰수해 영국인 부재지주에게 분배하는 바람에 상당수 아일랜드인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1703년에는 전체 토지의 5%만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원주민의 소유로 남았고 나머지는 신교도 영국인의 차지가 되었다. 게다가 구교도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고 일체의 공직에서도 배제되었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공식 합병한 뒤 국가명을 ‘영국?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개칭한 것은 1801년이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연합법(Act of Union)에 따라 ‘영국의 일부’가 되었다. 1845년에는 비극적인 대기근이 아일랜드 전역을 강타했다. 1845년 9월 감자마름병으로 주식인 감자가 바닥나고 이후 5년 연속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듭했다. 결국 그 기간 820만 명 중 100만 명이 굶어죽고 이후 50년 동안 300만 명이 미국 등지로 떠났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집안도 그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 심지어 아일랜드의 비극을 돈벌이 기회로 삼아 곡물을 비싼 가격에 파는 데 몰두했다. 영국의 이러한 야속한 처사는 아일랜드인들에게 또다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노를 남겼다. 영국 정부는 150년 후인 1997년 6월 대기근을 방치한 과거를 공식 사과했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은 의회를 통한 자치권 획득 투쟁, 소작료 인하, 토지 소유권 회복 등에 집중되었다. 당시 토지 투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일명 ‘보이콧 전술’이다. 영국계 지주 이름에서 유래된 ‘보이콧’이란 지주 측 가족과의 접촉을 단절하는 투쟁 방식이다. 이후 토지 문제는 영국 자유당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로 해결되는 듯했으나 자치권과 독립 문제만은 영국 보수당과 얼스터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신교도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닥쳐 해결을 보지 못했다.

‘부활절 봉기’는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그런 가운데 1905년 무력 투쟁을 불사하는 강경파 정당인 ‘신페인당’이 결성되었다.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인 아서 그리피스가 조직한 신페인당은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향한 까닭에 출범 당시만 해도 아일랜드 일반 국민들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이런 신페인당이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부상한 것은 1916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뒤였다.
봉기는 부활절인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더블린의 중앙우체국을 점령한 뒤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한 것을 신호탄으로 무장 게릴라들이 더블린의 주요 건물들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영국군의 진압으로 1주일 만에 끝이 났다. 봉기와 진압 과정에서 450여 명이 죽고 2,600여 명이 다쳤다. 당시 영국은 정규군을 1차대전에 대거 투입한 터라 죄수들을 주축으로 구성한 임시군을 아일랜드에 파견했다.

▲ 아일랜드 시민군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정부군에 저항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무자비한 보복과 잔인한 진압이었다. 당초 봉기에 동조하지 않았던 시민들이 봉기 후 신페인당을 지지하게 된 것도 이들의 과잉 진압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결과적으로 ‘부활절 봉기’는 실패했지만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신페인당은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에 할당된 총 105석 중 73석을 차지해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력한 정당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영국 의회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는 걸 거부하고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해 1919년 1월 21일 제1회 아일랜드 국민의회를 개최했다. 국민의회는 독립을 선포하고 마이클 콜린스를 수장으로 하는 신페인당 산하의 무장투쟁 조직 ‘IRA(아일랜드 공화국군)’를 정식 승인했다. 신페인당의 이 같은 도발에 영국은 탄압의 강도를 높여 나갔다. 아일랜드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IRA 등 독립 투쟁 세력의 거점들은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 많은 시민과 독립 투쟁가들은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
IRA는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에 맞섰다. 요인 암살과 영국군에 대한 철저한 보복이 원칙이었다. 투쟁 과정에서 주목을 끈 사람은 IRA 결성의 주역 마이클 콜린스였다. 그는 20대 중반까지 런던에서 공무원 생활을 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되는 등 고난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면서 투사로 변모했다. 그는 신페인당 정부의 장관직을 수행하면서도 무기 밀반입을 주도하고 암살을 지휘했다.
IRA가 이처럼 무력 독립 투쟁을 선동하고 정면 대결로 맞서자 영국은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분리하고 아일랜드에 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예상대로 남북 분리안은 신교도가 60%인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전역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IRA가 북아일랜드의 분리 반대를 외치며 각종 테러를 감행하자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세기 내내 유혈 사태 멈추지 않아

이 같은 혼란 속에서 1920년 12월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분리해 각각의 자치 의회를 보장하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키고 아일랜드와 독립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와 전쟁장관 윈스턴 처칠이, 아일랜드에서는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고 1922년 1월 아일랜드 국민의회가 근소한 차로 조약 비준에 동의함으로써 아일랜드 남부 26주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했다.
신교도가 다수인 북아일랜드 6개주는 영국에 잔류했다. 그러자 아일랜드 민족 내부에서 또다시 큰 분열이 생겨 아일랜드는 내전(1922~1923)에 휩싸였다. 내전은 조약을 수용하자는 측과 북아일랜드까지 포함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는 반대파 간의 대립이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의 당사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조약을 수용하자는 세력이었다. 그는 분단 독립이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테러와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분리 독립을 치욕으로 여긴 반대파들은 콜린스를 격렬히 비난했다. 두 개의 분파로 분열된 신페인당과 IRA의 내전 과정에서 수천 명의 아일랜드인이 사망했다. 콜린스도 1922년 8월 20일 자신의 호위병에게 암살당했다. 영국군과의 지루한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결국 동족에게 살해된 것이다.
이후 콜린스는 아이랜드계 사람들로부터 비열한 협잡꾼이거나 무능한 정치 모리배 취급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 교과서나 신페인당의 공식 문서에서 삭제되었다. 콜린스는 결국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마이클 콜린스’(1995)를 통해 사후 73년 만에 세계적 지명도를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1937년 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에이레로 바꾼 뒤 독립을 선포했다. 1949년 4월에는 국명을 아일랜드로 바꾸고 1926년 이래 가맹해 있던 영국 연방에서도 탈퇴해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가 되어 1955년 유엔의 구성원이 되었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사태는 좀처럼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 후 신교도의 얼스터연합당이 경찰?교육?사회복지 부문 등에서 자치권을 행사하고, 신교도 경찰이 북아일랜드 내 구교도들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테러와 보복이 빈발했다. 20세기 내내 북아일랜드에서는 이렇게 유혈 사태가 그치지 않았다.

■앤드루 와일스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수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의 올해 수상자로 영국 수학자 앤드루 J 와일스를 선정했다고 노르웨이 과학·문학아카데미가 3월 15일 발표했다. 아카데미 측은 와일스 교수가 ‘반(半)안정 타원 곡선에 대한 모듈러성 추측’을 통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해 냄으로써 정수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동아일보 2016년 3월 17일>

피에르 드 페르마(1601~1665)가 법관으로 활동하던 17세기의 프랑스에서는 법관이 일반인과 자유롭게 만나는 것이 금기 사항이었다. 법관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법관들은 무료하고 답답했다. 페르마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페르마는 수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자신의 열정을 수학 연구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페르마는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과 정기적인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도 수학자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아마추어 수학의 왕자’다. 흔히 미분법은 뉴턴, 적분법은 라이프니츠가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페르마가 이들보다 먼저 미적분의 중요한 개념을 고안하고 응용했다. 확률론은 파스칼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탄생시키고 해석기하학은 데카르트와 독립적으로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페르마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였다. 당시 그는 3세기경 디오판토스라는 사람이 쓴 ‘아리스메티카(산술학)’의 라틴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뭔가 떠오르면 책 여백에 메모나 주석을 달았다. 이 중 단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페르마 사후 모두 증명되었다. 증명되지 않은 단 하나의 메모에는 “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 정리를 증명했으나 책의 여백이 부족해 여기 옮기지는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른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다.
메모에서 말하는 ‘이 정리’란 ‘n을 3 이상의 정수라고 한다면, X(n제곱)+Y(n제곱)=Z(n제곱)을 만족시키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 X, Y, Z 중 하나가 0이거나 모두 0인 경우는 제외한다’는 내용이다. ‘페르마의 정리’는 이처럼 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 파생된 극히 간단한 명제인데도 이후 350여 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적 수학자를 곤혹스럽게 했다. 도무지 증명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페르마의 정리가 거짓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정의 자체가 정말 맞느냐고 의심하는 수학자들도 있었다. 1908년 독일의 볼프스켈이 페르마의 정리를 푼 사람에게 10만 마르크의 상금을 주라고 유언을 남겼는

▲ 앤드루 와일스

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1963년 앤드루 와일스라는 10살 소년이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지막 문제’라는 책을 보았다. 소년은 자신이 반드시 그 문제를 풀겠다고 다짐했다. 와일스는 옥스퍼드대 머튼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1979년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의 프린스턴대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수학계에서는 페르마의 정리를 풀려는 시도가 시들해진 상태였다. 와일스 역시 다른 분야에 몰두하느라 잊고 살았다.
1986년 여름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다니야마-시무라의 추론이 옳다고 밝혀지면 페르마의 정리도 증명되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니야마-시무라 추론은 일본의 수학자 다니야마 유타카가 1955년 처음 제기하고 동료 수학자 시무라 고로가 이후 10여 년 동안 검토해온 타원곡선과 모듈 형식에 관한 추론이었다. 이 추론을 의심하는 수학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다.

페르마의 정리는 해결되었으나 의문은 여전해

와일스는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꿈이 되살아났다. 다행인 것은 다니야마-시무라 추론이 당시 와일스가 정통했던 타원곡선론 분야라는 점이었다. 와일스는 추론에 몰두했다. 주변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다. 논문을 발표하지도, 학회나 심포지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7년째가 되었을 무렵 추론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1993년 6월 23일부터 3일 동안 케임브리지대의 뉴턴연구소에서 추론과 관련된 강의를 했다. 첫날과 이튿날 발표가 끝났을 무렵 참석자들 사이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마지막 날은 강연회장이 빈틈없이 채워졌다. 와일스는 3일 동안의 강연을 마치고 “이제 끝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는 강연장을 떠났다. 곧 그를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와일스의 발표는 이메일과 팩스를 통해 전 세계 수학계로 퍼졌다. 하지만 수학자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무수한 수학자가 페르마의 정리를 해결했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와일스는 200쪽이 넘는 논문을 전문 학술지 ‘수학연보’에 보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논문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오류가 발견되었다. 와일스의 증명은 한꺼번에 무효가 될 처지에 놓였다. 와일스는 좌절감과 굴욕감을 느꼈다. 하지만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자신이 없는 분야는 자신의 제자인 케임브리지대의 젊은 수학 강사 리처드 테일러에게 문의했다. 1994년 1월부터는 테일러도 공동 작업에 참여했다. 그래도 생각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그러던 1994년 9월 19일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생각이 섬광처럼 와일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 눈물이 솟구치고 감정이 복받쳤다. 와일스는 논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너무 단순하고 우아했다. 다음날 와일스는 전날의 아이디어를 다시 한 번 정밀하게 확인한 후 전화로 테일러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렸다. 테일러는 그것을 기초로 엄밀한 증명을 완성했다.
1994년 10월 2편의 논문이 수학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는 ‘모듈 타원곡선과 페르마의 최종 정리’(앤드루 와일스 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종류의 헤케 고리의 이론적 성질’(리처드 테일러-앤드루 와일스 공저)이었다. 전자는 페르마 정리 자체를 증명하는 본체였고 후자는 그 중 한 단계의 증명을 서술한 것이다. 학자들이 검토해보니 이번에는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다.
와일스는 최종적으로 ‘수학연보’에 논문을 보냈다. 심사는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오류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학연보’ 1995년 5월호는 와일스-테일러의 새로운 논문을 수록했다. 이로써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와일스는 1908년 제정된 볼프스켈상을 수상했다.
페르마의 정리는 해결되었으나 의문은 여전했다. 페르마가 주석을 쓸 당시인 17세기에는 와일스가 증명하는 데 사용한 수학 논리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책 여백에 쓴 메모로 미루어 지극히 간명하면서도 영감으로 가득찬 뭔가 새로운 증명 방식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수학계는 페르마가 창안했을 천재적인 증명방식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앤디 그로브와 인텔
앤디 그로브(79) 인텔(Intel) 명예회장이 3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 알토스의 자택에서 파킨슨씨 병으로 별세했다. 30여 년간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미국 인텔의 대표이사와 최고경영자(CEO), 회장 등을 역임하며 오늘날 IT(정보통신) 혁명의 기반이 된 마이크로프로세서(초소형 연산장치) 산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조선일보 2016년 3월 23일>

최고 전성기 때는 세계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CPU 시장을 좌지우지해 온 인텔의 역사적인 항해가 시작된 것은 1968년 7월 18일이었다. 출항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뷰 페어차일드 부근이었다. 그러나 인텔의 진정한 출발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8인의 배신자’에서 비롯된다.
이야기는 그로부터 21년 전인 1947년 12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브래튼 3명은 연구소 안에서 트랜지스터를 공개 시연함으로써 20세기의 반도체 혁명을 견인할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했음을 공표했다. 세 사람은 이 공로로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후 쇼클리(1910~1989)는 직접 반도체 사업을 하기 위해 1956년 고향인 샌프란시스코의 팰로앨토 근처 마운틴뷰에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세웠다. 실리콘밸리 내 최초의 반도체 기업이었다.
쇼클리는 당시 과학계의 샛별로 불리는 로버트 노이스(1927~1990)와 고든 무어(1929~ ) 등을 영입했다. 노이스는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고주파 트랜지스터를 연구하고 있었고, 무어는 존스홉킨스대 응용물리학연구소에서 무기 추진력을 연구하고 있었다. 노이스와 무어는 쇼클리 사단의 쌍두마차였다. 문제는 창업주 쇼클리였다.
그는 과학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탓에 조직을 이끌 만한 위인이 못되었다. 회사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는 범인을 색출한다며 직원들에게 거짓말탐지기를 들이대기까지 했다. 쇼클리의 이런 독선적인 경영 스타일은 연구진의 불만을 샀고, 결국 직원들은 하나 둘 짐을 싸 쇼클리를 떠났다. 노이스와 무어를 비롯한 핵심적인 8명의 연구원도 1957년 9월 18일 연구소를 떠났다. 쇼클리는 그들을 향해 ‘8인의 배신자’라며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쇼클리에게는 배신자였겠지만 세계 반도체 산업과 실리콘밸리로서는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8인의 배신자’는 1957년 셔먼 페어차일드 등과 합작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세웠다. 페어차일드는 승승장구했으나 뉴욕의 본사가 끊임없이 간섭하고 투자에 인색하자 8인의 배신자는 또다시 페어차일드를 떠나기 시작했다. 페어차일드를 그만둔 무어는 1968년 봄, 노이스와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은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라고 정했다가 통합(Integrate)과 전자공학(Electronics)이란 단어를 합친 ‘인텔(Intel)’로 바꾸었다. 두 사람은 페어차일드에서 함께 일했던 앤디 그로브(1936~2016)와 8인의 배신자 중 나머지 사람들도 끌어들였다.
그로브는 헝가리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반소 폭동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소련이 헝가리를 무력 점령한 12월 어느 날 밤 오스트리아를 거쳐 195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식당에서 접시를 닦아가며 뉴욕시립대 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캘리포니아대에서 화학공학 박사 학위를 딴 뒤 페어차일드에 입사해 노이스?무어 두 창업자와 인연을 맺었다.

흐트러지기 쉬운 조직에 팽팽한 긴장감 불어넣어

▲ 앤디 그로브

인텔은 1969년 봄 첫 메모리칩 ‘3101’을 출시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1970년 10월 ‘1103 D램’으로 다시 도전해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1971년 11월에 선보인 첫 CPU ‘4004’는 손톱 만한 크기인데도 1946년에 개발된 30t 무게의 에니악과 맞먹는 성능을 자랑했다. 1972년에는 ‘4004’보다 10배나 빠르면서 값은 비슷한 8비트의 ‘8008’을 선보였고 1974년에는 세 번째 CPU ‘8080’을 출시함으로써 인텔의 매출액은 급속히 증가했다. 인텔은 이후 10여 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인텔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이 저가 공세를 펼친 1980년대였다. 두 창업자와 그로브는 고심 끝에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메모리 말고도 CPU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인텔은 메모리 생산라인은 모두 폐쇄하고 두 곳에서만 CPU를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7,000여 명을 해고하고 1982년에는 1억 7,0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그런데도 인텔은 또다시 모험을 감행했다.
당시 인텔의 최대 고객은 PC 제조사였기 때문에 이들 대형 PC 메이커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인텔은 이런 역학구도를 깨기 위해 1985년 야심작 ‘80386’을 선보였다. 이후 소비자들의 관심은 386으로 쏠렸고 PC 제조사들은 ‘386PC’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인텔은 PC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인텔의 신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1979년 사장으로 취임한 그로브의 경영 실적은 놀라웠다. 두 창업자가 자유로운 생각을 기반으로 신제품 개발에 전념하는 동안 그로브는 조직을 매섭게 다그쳤다. 조직을 비정하게 이끌어 직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로브는 흐트러지기 쉬운 조직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로 인해 인텔은 실리콘밸리에서 드물게 강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그로브는 운전기사를 두지 않고 사무실도 일반 직원들과 같은 크기를 사용했으며 출퇴근할 때도 직원들과 함께 줄을 서서 검색대를 지났다. 이런 그의 수평적 사고는 이후 인텔의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로브는 1987년 최고경영자(CEO), 1988년 회장을 거치며 20세기 최고경영자로 각광받았고, 1997년 타임지에 의해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